책소개
박지원이 풍자의 인파이터였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아웃복서였다!
풍자의 글쓰기에서 기궤첨신의 글쓰기까지 동서양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비결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에게 배우는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동심의 글쓰기는 무엇이었는가? 신세계를 향해 떠난 미친 선비 서하객의 60만자 일기에는 어떤 욕망과 포부가 담겨 있었는가? 조닌 계급의 애욕과 삶을 대변한 이하라 사이카쿠의 소설은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는가? 풍자의 글쓰기가 유행했던 18세기 영국과 19세기 일본의 제국주의 사회는 어떻게 서로 닮아 있었는가? 서양의 마르코폴로에서 중국의 이탁오와 공안파, 그리고 조선 호모 스크립투스 심노숭에 이르기까지 39인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에게 배우는 글쓰기의 모든 것.
목차
들어가는 글
1. 동심의 글쓰기 : 천하의 명문은 반드시 동심에서 나온다
·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무목적의 글쓰기 _이덕무
· 유교반도의 운명, “내 책을 불사르고 감추어라” _이탁오
· 작은 어른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어린이의 발견 _루소
· 낙타의 굴종, 사자의 투쟁, 아이의 창조 _니체
2. 소품의 글쓰기 : 반 페니 은화처럼 작고 반짝거리는 글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벼룩과 성호의 이 _이익
· 찰나의 미학에 사로잡힌 패트론 상인들 _바쇼
· 인간 장사에 대한 노여움에서 서호의 몽환적 풍경까지 _장대
· 모든 혁신은 갓 태어난 흉한 새끼이다 _프란시스 베이컨
3. 풍자의 글쓰기 :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광대로 살고자 한다
· 시대와 불화했던 최고 문장가의 풍자 전략 _박지원
· 유자들의 외전에 청나라 지식인의 타락상을 담다 _오경재
· 고양이의 눈으로 본 학벌과 금전의 야합 _나쓰메 소세키
· 인류 전체의 탐욕을 폭로한 최초의 문학 _조너선 스위프트
4. 기궤첨신의 글쓰기 :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 스승 이익을 넘어 문단을 지배한 권력 _이용휴와 이가환
· 조닌 계급의 애욕과 삶의 철학을 대변하다 _이하라 사이카쿠
· 이탁오의 후예들, 조선 선비들을 매료시키다 _공안파
· 앙시앙 레짐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 _볼테르
5. 웅혼의 글쓰기 : 사마천의 문장은 광활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
· 천애지기의 만남과 북벌에서 북학으로의 대전환 _홍대용
· 신세계를 향해 떠난 광사狂士의 60만 자 일기 _서하객
· 대항해시대의 시작점이 된 뜨거운 욕망과 심원한 포부 _마르코폴로
· 대문호의 재생을 이끌어낸 고대 로마와의 조우 _괴테
6.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 수천의 존재가 탄생하는 수천 겹의 주름
· 붉을 홍 한 글자로 꽃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_박제가
· 조선을 사랑한 유일한 17세기 일본 지식인 _아메노모리 호슈
· 암흑과 절망의 목도, “하지만 절망은 희망처럼 허망하다” _노신
· 천 개의 눈으로 좇은 천 개의 주름과 창조 _니체
7. 일상의 글쓰기 : 수숫대 속 벌레가 노니는 소요유
· 문체반정이 지워버린 19세기 조선의 문학 천재 _이옥
· 불교적 무상과 생에 대한 애정의 잔잔한 충돌 _요시다 겐코
· 책과 글과 꽃과 나비와 구름과 바람과 물소리의 글 _장조
·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 속의 조화로운 삶 _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8. 자의식의 글쓰기 :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 조선 호모 스크립투스의 참된 자아 찾기 _심노숭
· 문화대혁명으로 사그라진 계급 혁명의 뜨거운 불꽃 _곽말약
· 근대 문명국가 일본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자화상 _후쿠자와 유키치
· 자유를 향한 여정 끝에 만난 그리스인 조르바 _니코스 카잔차키스
9. 자득의 글쓰기 : 한 자루의 비를 들고 온 땅의 덤불을 쓸어버리다
· 수만 권의 독서가 온축된 살아 숨 쉬는 문장 _홍길주
· 옛사람을 업신여긴 한 은둔자의 적자지심赤子之心 _원매
· 문장에서 한학까지를 통섭한 대방가의 깨달음 _사토 잇사이
· 인간은 언제 돌에서 별이 되어 빛나는가? _쇼펜하우어
미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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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정주
출판사리뷰
박지원이 풍자의 인파이터였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아웃복서였다!
풍자의 글쓰기에서 기궤첨신의 글쓰기까지 동서양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비결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더불어 읽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시공간의 차이를 떠나 그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비자가 진시황이라는 군주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통일하려 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라는 군주를 모델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정치철학을 제시하려 했다. 그 시공간적 차이를 고려할 때 《한비자》와 《군주론》의 유사성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한 동서양의 지성사를 살펴보면 어린아이의 발견, 백과사전식 저술의 발흥, 소품문의 등장 등 똑같은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 《글쓰기 동서대전》의 지은이 한정주는 일국사와 민족사의 한계를 넘어선 지역사(아시아사) 연구와 더불어 동서양 문명과 지식의 차이점을 교차, 비교하는 작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전 연구가이자 역사 평론가다. 글쓰기에는 글 이전에 반드시 철학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에서는 18세기를 중심으로 14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서양 최고 문장가 39인의 핵심 비결을 동심에서 자득까지 아홉 가지로 정리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휴, 이옥, 조희룡 등 조선 작가와 중국 작가 오경재, 장대, 서하객 그리고 일본 작가 요시다 겐코, 이하라 사이카쿠 등을 소개한다. 물론 박지원, 노신, 바쇼, 볼테르 등 잘 알려진 대가들도 당연히 등장한다. 풍자의 글쓰기가 유행했던 18세기 영국과 19세기 일본 제국주의 사회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조선의 영정조 대와 중국의 강희제?건륭제 시대를 함께 위선의 시대로 규정짓는다. 또한 일본 문화를 동아시아의 갈라파고스로 묘사하는 등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하면서 동서양 최고 문장가들의 글과 삶에 녹아 있는 인문학을 풀어낸다.
이덕무에서 루소까지, 새로운 인간 어린아이의 발견
18세기를 전후해 동서양의 글쓰기에서는 공통적으로 ‘동심’과 ‘어린아이’가 새삼 발견되고 강조됐다. 동양과 서양에서는 전통적인 권력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동양에서는 성리학의 정치-문화 권력이,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정치-문화 권력이 쇠퇴했다. 그리고 낡은 사상과 문장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지식인 집단들이 출현했다. 조선에서는 성호학파와 북학파가, 중국에서는 이탁오와 공안파가, 서양에서는 루소, 볼테르,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력에 길들여지기 이전의 인간에서 시작해 철학과 사상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력에 길들여지기 이전의 순수한 인간을 어린아이와 동심에서 발견하고 ‘동심의 글쓰기’를 역설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했을 때, 왜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무목적성?일상성?다원성?개방성?기궤성?불온성?혁신성 등이 봇물 터지듯이 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에서 동심의 글쓰기를 대표할 만한 인물은 청장관 이덕무다. 이덕무는 자신의 첫 시문집의 제목을 ‘영처고?處稿’라고 지었다. 어린아이 영?에 처녀 처處자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듯이, 처녀가 부끄러워하듯이 글을 썼다는 뜻이다. 이덕무는 글쓰기는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워하듯 감추는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어찌 억지로 힘쓴다고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18세기 이전 조선 문사들의 글쓰기는 ‘목적이 있는 글쓰기’였다. 그들에게는 성현과 같은 삶을 살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글쓰기 역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덕무의 글쓰기는 순수하게 자신의 동심에 따르는 글쓰기, 즉 무목적의 글쓰기였다. 동아시아 지성사상 가장 문제적 인물인 이탁오 역시 동심의 글쓰기를 주창했다. 자신의 책을 ‘감추고 불살라야 할 책’, 즉 《장서藏書》와 《분서焚書》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탁오는 “천하의 지극한 문장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며 “만약 사람이 항상 동심을 보존할 수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견문이 행세하지 못하게 되므로, 아무 때나 글을 지어도 훌륭한 문장이 되고, 아무나 글을 지어도 훌륭한 문장이 되고, 어떤 양식과 문체와 격식과 문자를 창제한다고 해도 훌륭한 문장이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자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를 혁명적으로 전복했던 유교반도儒敎叛徒 이탁오는 결국 간수에게서 머리를 깎는 면도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베어 죽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18세기 서양에서도 ‘어린아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이전까지 서양에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저 작은 어른, 축소된 어른일 뿐이어서 어른들과 노동과 놀이를 공유했다. 이러한 시기에 루소는 저작 《에밀Emile》을 통해 어린아이를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본원적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루소는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완전하지만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변질되고 만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 완전하다는 것은 곧 인간은 어린아이였을 때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닌 악한 존재라는 기독교-신학의 인간관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군림에서 향유로, 소품문과 백과사전의 탄생
조선 문장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소품문은 성호 이익의 《관물편》이다. 대표작인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성호사설》은 ‘성호 노인의 희필戱筆’이라며 자질구레한 글이라는 뜻의 ‘사설僿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겸손과 겸양의 의미에서 썼다고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기호에 따른 글쓰기, 즉 놀이와 무목적의 글쓰기에서 나온 결과였다. 《관물편》은 개미, 누에, 이, 두더지, 거위, 뻐꾸기, 모란, 작약, 국화, 가시나무, 뽕나무, 감나무 등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질구레한 존재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깊다. 이익은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물과 식물들을 통해 천하 만물의 이치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세태까지 깨우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관물편》 속의 우언 소품들을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트북》 속 ‘동물과 식물들에 대한 우화’와 비교해 읽어보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250여 년의 시간과 수만 리의 공간을 뛰어넘어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유사성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소품문을 살펴보려면 ‘찰나의 미학’을 공유하고 있는 하이쿠에 주목해야 한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울음소리.”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쇼의 하이쿠는 일본의 상인계급이었던 조닌町人들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사카의 상인 목홍공은 서책을 3만 권이나 구입하고 날마다 가객들을 초대해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었으며 나니와 강변에 겸가당이라는 건물을 지어 시인 묵객들과 아취 있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조닌들은 일종의 패트론이었고 겸가당은 당대의 문화 살롱이었던 셈이다. 일본에서 상인계급인 조닌들이 문화 향유자로 성장하면서 글쓰기가 바뀌었던 것처럼, 서양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이 사회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글쓰기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대표적인 것인 백과사전식 저술의 탄생이다. 이전의 지식들이 기독교-신학에 의거한 도그마적인 지식이었다면, 부르주아계급의 등장은 실용적인 지식들을 백과사전 속에 모아놓게 만들었다. 군림하는 지식에서 향유하는 지식으로 변한 것이다. 근대 유럽의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인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백과전서》가 18세기 중반인 1751년에 첫 출간되었다. 조선에서도 중인 계층이 발흥하는 시기에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잡동산이》,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연이어 나왔다. 중국에서는 1728년에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이자 고금의 도서를 집대성한 총서인 《고금도서집성》이 간행되었고, 다시 이 《고금도서집성》을 저본으로 하여 1785년에는 《사고전서》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 최대 규모의 총서가 완성됐다. 일본에서는 1713년에 의사인 데라시마 료안이 저술한 《화한삼재도회》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백과사전의 탄생은 동일한 사회 졍제적 변화가 만들어낸 동일한 세계 지성사적 흐름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와 《걸리버여행기》, 위선의 시대를 뚫고 나온 풍자문학
조선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풍자문학가를 꼽자면 박지원을 들 수 있다. 박지원은 〈호질〉, 〈허생전〉, 〈광문자전〉,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우상전〉, 〈김신선전〉 등을 통해 풍자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호질〉은 아바타 호랑이를 내세워 타락한 조선 사회와 양반 사대부를 질타한 풍자문학의 백미다. 《열하일기》 속에 실려 있는 〈호질〉은 기록으로만 보면 박지원 자신의 작품인지 모호하다. 중국 연행 중 한 점포에 걸린 글을 베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글을 겨냥한 사대부의 비난과 공격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박지원의 전략으로 보인다. 박지원의 아바타가 호랑이였다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의 아바타는 고양이였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19세기 일본 제국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태평의 일민逸民’을 고양이의 눈을 통해 풍자하고 있다. 여기에서 ‘태평한 시대’란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을 풍자한 용어다. 나쓰메 소세키가 본 근대 일본은 ‘태평한 시대’가 아니라 “이 사회는 미치광이들의 집합소”, 다시 말해 “미치광이들이 세포처럼 모여들어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며 우격다짐을 하고, 물고 뜯고 싸우고, 욕하고, 빼앗으면서 쓰러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사는 단체”였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나쓰메 소키가 풍자하고 있는 19세기 일본 사회가 인류 전체를 풍자한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가 등장한 18세기 영국 사회와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제국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했듯이, 18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아시아 민중들의 눈물과 영국의 무단통치에 질식당하는 식민지인들이 있었다. 조너선 스위프트 시대의 영국과 나쓰메 소세키 시대의 일본은 제국주의적 번영과 자본주의적 야욕에 환호하는 인간들의 탐욕과 야만성이 어느 때보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처럼 만연해 있는 시대였다. 이런 세상에서는 인간성은 무능력으로, 양심은 나약함의 상징으로 치부될 뿐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방식을 통해서 그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기 어렵다. 그래서 아바타 고양이와 퍼소나 걸리버를 통해 지독한 풍자를 구현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은 노신이 ‘진정한 풍자소설의 출현’이라고 극찬했던 중국 작가 오경재의 《유림외사》와 박지원의 풍자소설에도 적용된다. 오경재가 살았던 18세기 초중반의 청나라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전성기를 맞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 그리고 문화적 융성을 한껏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평성세였으나 강력한 황제 권력 하에서 정치-사상적 통제와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에 지식인 사회는 오직 과거 시험을 통해 입신양명과 출세를 일삼는 풍조가 만연하고, 이들 지식인 출신으로 채워진 관료 집단의 부패와 타락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오경재의 《유림외사》는 이러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옴니버스영화 같은 구성과 실존인물들에 대한 풍자를 통해 청나라 지배계급의 실상과 허상을 폭로했다. 박지원의 풍자소설이 등장한 영정조 대도 겉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노론과 성리학의 정치-지식 권력의 전제專制 하에서 양반 사대부와 관료 집단이 위선적인 존재로 타락해버린 시대였다. 왜 18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에서는 박지원, 청나라에서는 오경재라는 최고의 풍자 작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이중적인 시대, 곧 ‘위선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돌연변이의 문장들이 글쓰기를 혁신했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김수영의 문장론이다. 전위 문학을 고전에 적용하면 ‘기궤첨신奇詭尖新’한 문학이다. 여기서 기궤奇詭란 ‘기이하고 괴이하다’는 뜻이고, 첨신尖新이란 ‘날카롭고 새롭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기궤첨신한 문학의 대표 작가로는 스승 이익을 넘어 문원文苑(재야 문단)의 권력을 지배했던 혜환 이용휴를 꼽을 수 있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든다. 재 가루로 달무리를 이지러뜨리고, 끓는 국으로 여름철 얼음을 만든다. 나무로 만든 소를 걸어가게 하고, 구리로 만든 종을 스스로 울게 한다. 소리로는 귀신을 불러오고, 기운으로는 뱀과 호랑이를 막아낸다. 서방 세계의 끝에서부터 동해 바다의 끝까지를 상상 속에서 눈 깜빡할 동안에 한번 둘러보고, 천상 세계에서부터 지하 세계까지를 생각 속에서 순식간에 도달한다. 백세百世 이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 세상을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미루어 헤아려 그 세상을 예측한다. 비록 지나가버린 옛날의 수많은 철인哲人들도 오히려 타고난 재주와 주어진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이렇게 거대한 직관과 지혜 그리고 거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와 살덩이에 불과한 7척 몸뚱어리에 부림을 당해서 주색과 재물과 혈기에 빠져서 지낸다면 어찌 크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용휴, 《혜환잡저》, 조운거 군에게 주다
이용휴의 저작 《혜환잡저》에 실린 ‘조운거 군에게 주다〔贈趙君雲擧〕’라는 글이다. 마치 상상 속 동물인 곤어鯤魚와 대붕의 변신과 비상을 담은 우화를 통해 자유정신을 묘사한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을 읽는 것 같다. 특히 상상을 통해 서방 세계의 끝에서 동해 바다의 끝까지 그리고 천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까지를 경각頃刻의 시간에 일주한다는 발상과, 백세 이전의 과거를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묘사는 이용휴가 문장 속에 담은 기상과 기백이 얼마나 거대하고 담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용휴의 잠언 〈환아잠還我箴〉은 유학사 최고의 이단자 이탁오의 〈동심설〉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환아잠〉에서 이용휴는 본래의 나를 순수한 천리로 본 다음,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지각과 견식과 재능이 도리어 순수한 천리를 해쳐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논리를 구사하는데, 강명관 교수는 이용휴의 〈환아잠〉이 이탁오의 〈동심설〉을 18세기 조선 버전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하면서 두 글의 논리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용휴는 〈동심설〉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강명관 교수는 그 까닭을 “당시의 조선 지식인이 도저히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이탁오의 이단성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용휴는 “모든 성인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주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탁오의 이단적 사유를 이용휴 자신의 글에 담았던 것이다. 생명체의 진화와 혁신은 ‘돌연변이의 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법칙은 문장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당대 사람들에게 낯선, 즉 익숙하지 않은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문장은 대개 기이하고 괴상한 문장으로 취급받아 배척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러한 문장의 출현이 글쓰기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고 일거에 혁신했다.
자의식의 혁명,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여정
자의식이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은 18세기를 거치면서 성현을 좇는 성리학적 자의식에서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는 자의식으로 변모한다. 이 시기에 이덕무의 〈간서치전〉, 박제가의 〈소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을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을 준다. 본격적인 조선 자전 문학의 시작점은 심노숭의 《자저실기》다. 《자저실기》에서 심노숭은 이마 뼈가 툭 튀어나와 있고 배가 널찍하게 늘어뜨려져 있는 자신의 용모와 과일 먹는 것을 좋아해 ‘감에 미친 바보’라고까지 불린 자신의 기호, 정욕이 지나쳐 기생들을 데리고 개구멍을 기어 다녔던 치부까지 거리낌 없이 기록한다. 호모 스크립투스Homo Scriptus, 즉 글 쓰고 기록하는 인간의 자의식이라 부를 만하다. 중국 혁명문학의 대문호 곽말약의 자의식은 개인적 자의식이라기보다는 중국인의 집단적 자의식에 가깝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청나라의 멸망,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탄생, 중일전쟁, 국공합작, 국공 내전, 공산당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문화대혁명 등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변곡점마다 곽말약의 내면세계는 커다란 충격을 겪었다. 곽말약은 자서전에서 일본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매혹과 근대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의 갈등, 혁명문학에 대한 신념, 사회주의자로의 경도와 내면의 흔들림 등을 가감 없이 기록해놓았다. 문화대혁명에 휩쓸려 조반造反의 대상이 된 곽말약은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자아비판과, 자신의 책을 불살라버려야 한다는 분서焚書 선언을 하게 된다. 노회한 정치가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곽말약의 선택은 작가로서의 자의식에 사망 선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곽말약은 자아비판과 분서 선언 이후 12년을 더 살았지만 이 순간 이미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의식은 죽음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근대 사상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쿠옹자전》에서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근대 일본인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유년 시절 아버지의 부재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새로운 아버지를 찾게 만들었고, 그 새로운 아버지는 양학으로 대표되는 서양 문명으로 귀결됐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내면에서 서양주의와 문명주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일본의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박혀 있는 동양의 전통(특히 조선과 중국)에 대한 혐오와 멸시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러한 자의식의 혼돈과 착종을 “마치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삶을 사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이면서 두 개의 몸이 있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비록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을 “서양 문명의 안내자”이자 “동도東道의 주인”이라며 사상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지만, 그의 사상이라는 것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모델로 삼아 아시아 이웃 국가들을 침탈하는 침략주의에 불과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심어놓은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동북아시아 4개국의 관계를 흔들고 있다. 만약 근대 이후 일본인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일본인이 제국주의적 본성과 침략주의적 야욕을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곽말약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의식이 사회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면, 니코스 카잔차기스의 자의식은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향한 여정의 산물이었다. 카잔차키스는 터키의 압제 아래 크레타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터키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무기는 펜이었다. 그리스 본토 여행을 통해 세계사에서 그리스가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음을 자각한 카잔차키스는, 이제 신으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때 만난 인물이 니체와 베르그송이었다. 신을 죽여버린 철학자 니체는 영혼마저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갈망했던 카잔차키스에게 신에게 반항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붓다는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과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에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카잔차키스가 만난 마지막 스승은 불학무식한 그리스 민중 조르바였다. 조르바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하찮은 겁쟁이 인간들이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민족이나 조국 따위를 때려 부수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닌 인간이었다. 조르바가 갖고 있는 원초적 생명력은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었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인간 그 자체가 자유임을 가르쳐주었다.
개성과 자연스러움을 가진 글이야말로 진짜 글이다
이 책에서 줄기를 이루고 있는 18세기는 지식과 개성이 만개 폭발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부르주아, 조닌, 중인 계층 등이 사회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경제구조적 변화가 있었다. 백과사전식 저술을 통해 지식이 대량 생산되었던 당시 상황은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지식이 폭발하는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글쓰기는 어떠한가? 이것이 저자가 책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다. 동심의 글쓰기를 책의 첫머리에 놓은 까닭은 글쓰기에는 무엇보다도 개성과 자유,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갖춘 글이라면 비록 구성, 논리, 문법, 형식, 수사, 형식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글이다. 구성, 논리, 문법, 형식, 수사, 형식은 누구라도 고쳐줄 수 있지만 독창적인 것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서만 나오기에 다른 이들이 고쳐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에 얽매인 나머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소품의 글쓰기를 권유하는 제안도 귀 기울여볼 만하다. 글이란 간결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으로도 자신의 감성과 마음을 훌륭하게 담아낼 수 있다. 20세기 초 노신과 임어당이 중국 현대문학의 발전을 위해 시급하게 복원해야 할 옛 문장의 전통 중 다른 어떤 것보다 소품문을 들고 나온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