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사지왕 고리자루 큰칼에서 근대 항일운동가와 프로이트까지
한민족의 원형 DNA를 추적한 국내 최초 글씨의 고고학
가장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한 신라인들이 왕의 보검에 왜 어린아이 같은 글씨를 새겼는가? 김구의 필적이 1,600년 전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 옥기에서 왜 한민족을 닮은 글씨가 발견되는가? 한국인의 발목에는 격식과 체면이라는 쇠사슬이 잘가당거리지만 원래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테닉한 민족이었다. 네오테니neoteny란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며 장난기가 가득한 기질을 말한다. 민족의 고대 글씨를 분석하여 민족의 첫 시작, 실체, 의식, 문화 원형을 규명하는 시도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최초다. 필적학에서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진화생물학을 망라하며 200점이 넘는 희소가치 높은 도판을 실었다.
목차
서문 - 한민족의 핏줄과 박동을 찾아서
제1부 고대 글씨에서 찾은 한민족의 DNA
제1장 단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1. 비밀스런 옛 문
고대사의 수수께끼
풀리지 않은 의문들
고대 비밀의 속삭임
2. 잊혀진 지혜의 실마리
안톤 패트리히와 아이빈스 박사
글씨는 뇌의 흔적
명백한 혼란 속에서 질서 찾기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제2장 단군의 글씨 찾기
1. 수수께끼의 열쇠
태양의 침묵
위창 오세창
유전하는 글씨체
2. 중국 문화를 거부한 고신라
집집마다 모신 단군 화상
돌무지덧널무덤과 수목관 왕관
뼈 깊이 새긴 조상의 한
거대한 변혁의 소용돌이
3. 고조선의 DNA가 암호화된 글씨
신령스러운 자연미, 〈이사지왕 고리자루 큰칼〉
춤추는 곡선미, 〈포항중성리신라비〉
예측 불가의 역동성, 〈영일냉수리신라비〉
제3장 고대 한민족을 말하다
1. 천성이 뛰어난 군자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어진 이의 나라
은은하고 깨끗한 화강석
죽을 먹고 살아도 속이 편해야 산다
2. 자유분방과 즉흥성
테레제를 위하여
한민족을 닮은 분청사기
변덕 죽 끓는 듯하다
3. 신속성과 활력 충만
한민족 고유의 필기 속도
걸음걸이가 마치 달려가듯이 한다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다
4. 정신적 네오테니
어린이화 현상
사람은 철들면서 죽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테닉한 사람들
제2부 한민족 DNA의 계승과 변화
제4장 중국화되는 한민족
1. 글씨로 본 중국인
예의와 격식에 어긋남 하나도 없도다
비록 천 편의 시를 쓴다 해도 역시 하나의 문체이다
군자가 꾸미지 않는다면 소인과 무엇이 다른가
죽으면 위로는 군주도 없고 아래로는 신하도 없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2. 무쇠처럼 강인한 신라
일그러진 호쾌함, 〈울진봉평신라비〉
중국화가 시작되다
삼국통일을 이룬 힘
3. 당당하고 늠름한 고구려
위풍당당한 〈광개토대왕비〉
대륙을 호령한 패기
진취적 기상
4. 우아하고 맑은 백제
우아한 귀족풍, 〈무령왕지석〉
단아한 〈사택지적비〉
선량하고 맑은 사람들
제5장 네오테니가 이울다
1. 자신감 넘치는 통일신라
짙어지는 중국색
부정형의 인쇄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한민족 최고의 서가, 김생
2. 한민족의 역사, 발해
발해사를 짓지 않은 잘못
말갈족은 누구인가
글씨체로 확인되는 한민족의 국가
3. 세련된 고려
중국화된 지배 계층
고려인의 삶과 죽음, 묘지명
계속된 봉기의 원인
4. 완고한 조선
틀에 박힌 양반 사회
한글, 이 세상에 오다
미감의 절정, 추사 김정희
민民의 삶
제6장 다시 고대 한민족으로
1. 양극화된 일제강점기
경직되는 한민족
불멸의 안중근
나라를 잃은 미치광이
탈중국화의 실마리
2. 힘차게 뛰는 한민족의 맥박
자유민주주의와 한민족
세월호 사고의 교훈
한민족의 미래
제3부 단군의 조상을 찾아서
제7장 홍산문화와 흑피옥
1. 홍산문화를 주목한다
홍산문화의 충격
주인공은 누구일까?
홍산문화 문자와 글씨
2. 흑피옥에 새겨진 글씨
흑피옥의 진실
다양한 형태의 문자들
고대 한민족을 닮은 글씨체
저자
구본진
출판사리뷰
이사지왕 고리자루 큰칼에서 근대 항일운동가와 프로이트까지
한민족의 원형 DNA를 추적한 국내 최초 필적의 고고학
여기에 세 가지 유물이 있다. 모두 5~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첫 번째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금관으로 저명한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은 “5세기경의 신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고리자루 큰칼]. 그런데 왕의 보검에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한 글씨를 새겨놓았다. 엄정한 격식을 갖추고 꾸밈이 있는 세 번째 중국 [손추생등조상기孫秋生等造像記]와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난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했다는 신라인들이 왕의 보검에 어린아이 같은 글씨를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한국인들의 발목에는 격식과 체면과 겉치레라는 쇠사슬이 잘가당거리지만 이것은 오랜 중국화의 역사적 산물일 뿐, 원래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테닉한 민족이었다. 네오테니neoteny(어린이화)란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며 장난기가 가득한 기질, 궁금증과 애정, 사회성과 협동하려는 내적인 욕망 등을 말하며, 최근 한국인의 네오테닉함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등 한류로도 표출되고 있다.
매우 중대한 문제 한 가지가 있다. 중국 요하 지역 홍산문화紅山文化 옥기에서 한민족을 닮은 글씨체들과 고조선의 숫자 글씨로 주장되는 산목算木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700~기원전 2900년경의 문명으로서 황하문명보다 3,000년이 앞선다. 지금 한민족의 원류에 관심이 가진 사람들은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하고, 학문과 지식을 전유한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어떤 민족의 고대 글씨를 분석하여 민족의 첫 시작, 실체, 의식, 문화 원형을 규명하는 시도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최초의 케이스다. 필적학에서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진화생물학을 망라하며 200점이 넘는 희소가치 높은 도판을 실은 이 책은 한민족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소중한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천년을 유전하는 ‘뇌의 흔적’, 글씨
평균적인 수준의 지능을 가졌으며 학생 시절 성적이 변변치 않았음. 20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자.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며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 놓인 채 열등감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임. 예를 들면 창고 같은 데서 일하는 단순 노무자. 외모는 보수적이고 체격은 건장.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범행을 했을 것. 부모는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이혼했을 것. 이미 과거에 크지 않은 범죄를 저질러서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1962년 6월과 7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다섯 번에 걸쳐 폭탄이 터졌다. 경찰은 기폭 장치를 추적하여 이를 판매한 총포거래상에서 아플레드 스푀니라는 이름과 그가 쓴 주소를 찾아냈다. 필적 감정을 의뢰받은 M. 리츠노가 필체를 앞과 같이 분석했다. 스위스 경찰은 리츠노의 조언에 따라 12명의 용의자를 심문하여 1명으로 좁혔는데 그 용의자는 안톤 패트리히였다. 그는 20세였고 창고에서 일하는 잡역부였으며 옷차림새는 보수적이었다. 최근 권투 챔피언 자리를 2개나 땄다. 그의 부모들은 음주 운전으로 여러 차례 적발된 뒤에 이혼을 하였다. 용의자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결국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서’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다.
숨 막히는 심리적 추격전이 벌어지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21년 동안 검사로 일한 이 책의 저자 구본진은 수사 과정에서 피조사자들에게 자필 진술서를 쓰게 했다. 흉악범의 글씨는 속도가 느리고 각이 많이 지며 마지막 부분이 흐려지고 필압筆壓이 무거우며 글자 사이의 공간이 좁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의 글씨는 무질서하고 읽기 어려우며 필압은 약하고 기초선이나 기울기, 크기, 간격, 속도 등의 변화가 심하며 느리고 억지로 꾸민 듯한 형태를 가진 것이 많다. 서예의 종주국인 중국은 전통적으로 ‘글씨가 곧 사람’이라 하여 서법書法을 지식인의 덕목으로 삼았고 기원전 1000년경에 이미 글씨 분석을 했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글씨를 크기, 모양, 간격, 기울기 등으로 분석하는 필적학이 발달했다. 필적학은 글씨를 쓸 때 머리에서 손과 팔의 근육에 메시지를 전달해서 선, 굴곡, 점 등을 만들기 때문에 필적이 내적 세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필적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글씨체가 유전한다는 점이다. 1911년 석주石洲 이상룡은 막대한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해외 독립운동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여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석주 선생과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의 글씨는 전체적인 풍격은 물론, 개별적인 글씨 모양까지도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거의 똑같다. 이름을 가려놓으면 누가 쓴 것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다.
할아버지의 글씨체가 손자에게 유전할 뿐 아니라 천 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도 글씨체는 유전한다. 그 사례로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와 1876년에 태어난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글씨체를 들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와 김구 선생의 글씨는 모두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루면서 글씨에 힘이 넘친다. 하지만 속도가 빠르지 않고 필선이 부드럽다. 이는 용기가 있고 강인하며 큰 포부가 있지만 꾸밈이 없는 천진한 인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가운데 중(中)’자 중에서 ‘입 구(口)’ 부분이 큰 것은 에너지와 힘이 충만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특징이 발견되고 글자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휘어지지 않고 곧게 시작하는데 이는 자유롭고 꾸밈이 없으며 순진무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들린 무당의 춤, 부정형의 네오테니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대 한민족의 DNA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고신라의 글씨는 김수천 교수가 “신들린 무당의 춤”이라고 표현했던 [포항중성리신라비]가 대표적이다. [포항중성리신라비]는 처음부터 어떻게 비를 새길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돌의 요철을 피해가면서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듯하다. 같은 글자라도 다른 형태를 추구하였고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구성하여 필획과 자형이 예측 불가능하고 질박하다. 글자의 대소와 기정寄正(바름)과 참치參差(들쭉날쭉함) 변화에서 박진감이 느껴진다.
고구려는 필기 속도가 매우 빠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걸음걸이가 마치 달려가듯이 한다”라고 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서 철갑을 두른 말과 병사의 모습이 날렵하고 강인해 보인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마한에 대해 “나라 안의 부락마다 비록 수령이 있기는 하나 마을에 섞여서 같이 살기 때문에 서로 잘 통제할 수가 없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절은 없다. 사람들의 성격은 강인하고 용감하다”라고 했다. 고구려인의 기질을 보여주는 글씨 유물로는 [광개토대왕비], [모두루묘지명], [평양석각석] 등을 들 수 있다.
백제의 글씨는 우아하고 맑고 세련된 변화무쌍한 특징을 보인다. 백제 글씨의 우아함을 두고 그동안 학계에서는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 주장은 남조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백제 글씨가 우아하지 않거나 세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369년)를 보면, 글자의 간격이 넓고 글씨의 속도가 다소 느리며 필선과 각이 매우 부드럽고 전체적으로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신해년 새김 쇠칼](471년)도 비슷하다. 백제 목간의 글자체들도 필선에 탄력이 있으면서 속도가 다소 느리고, 필선이 단정하고 유려하며 부드러우면서 우아하다.
부정형不定形의 네오테닉함은 통일신라시대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도 두드러진다.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마치 손으로 쓴 것처럼 글자체가 바뀔 때마다 형태가 달라져서 어떤 것은 윗부분이 크고, 어떤 것은 아랫부분이 크며, 왼쪽이 크기도 하고, 오른쪽이 크기도 하다. 한 행의 글자 수가 다른 만큼 글자의 크기, 간격이 다르고 행의 간격도 서로 다르다. 기울기도 그때마다 달라져서 일정하지 않아 고대 한민족의 글씨체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명감을 느낄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진화한 인종
고대 한민족의 특성에 딱 들어맞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네오테니neoteny’이다. 이 단어는 독일어의 Neotenie에서 온 것으로 그리스어의 ‘ν?ο?(젊은)’과 ‘τε?νειν(성향)’에서 유래한다. 론다 비먼Ronda Beaman은 네오테니란 인간은 본래 신체, 정신, 감정, 행동의 모든 측면에서 어린아이 같은 특성이 줄지 않고 오히려 두드러지는 쪽으로 성장하고 발달한다는 것이라면서 그 특성으로 기쁨, 사랑, 낙천성, 웃음, 눈물, 노래와 춤, 경이감, 호기심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네오테니의 맥락에서는 아이들의 특징이 계속 유지되면서 느리게 발달하는 것이 ‘좋은’, 즉 더 우수한 것이다. 우수한 그룹은 성인이 되어도 아이들과 같은 특성을 유지하고, 열등한 그룹은 보다 고등한 아이들의 단계를 지나 원숭이와 흡사한 상태로 퇴화해가는 셈이다. 네오테니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몽골리안이 가장 네오테닉하다는 데 상당히 일치하고, 그중 일부는 이를 근거로 몽골리안이 가장 진화한 인종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인류학자인 리처드 그로싱어Richard Grossinger 교수는『배아 발생 : 종족, 성, 정체성Embryogenesis : Species, Gender, and Identity』에서 “만일 어린이화가 진화된 상태의 특성이라면 몽골리안이 대부분의 면에서 가장 태아화되어 있고 가장 큰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한민족이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테닉한 민족이라는 저자의 견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서양학자도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리처드 퓨얼Richard D. Fuerle은 『우리들 사이에서 활보하는 에렉투스Erectus Walks Amongst Us』에서 머리, 얼굴, 팔, 다리 등의 신체 특징 등을 분석한 다음 “지구상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네오테닉하고, 그중에서도 피하지방이 많은 한국인들이 가장 네오테닉하며 바로 그다음에 중국인과 다른 몽골리안들이 네오테닉하다”라고 한다.
이울었다가 되살아난 네오테니의 불꽃 : 고려에서 일제강점기
고려로 접어들며 한민족의 네오테닉성은 중국의 영향으로 경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고려는 혈통을 존중하는 신분제 사회였으며 지배 계층에서는 중국 고전의 문구를 외고 한시를 읊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구양순체가 성행했다. 자획과 결구가 엄격하고 정형화되었으며 한순간의 정신적 이완도 허용하지 않는 구양순체의 유행은 당시의 엄격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청자나 와당 등에 남아 있는 피지배 계층의 글씨는 부드러운 원필圓筆이고 크기, 기울기, 글자 간격 등이 불규칙하며 끝마무리가 정확하지 않고 크기가 들쑥날쑥하며 필기 속도가 빠르다.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등을 보면 무인정권 시기에 봉기가 자주 발생했는데 그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엄격한 지배 계층에 대한 자유로운 피지배 계층의 반발, 즉 성향상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1198년 만적은 개경 북산에서 공사노비를 모아놓고 “경인년·계사년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게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정승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주자학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는 완고하고 경직되는 사회적 경향이 굳어졌다. 윤휴尹?가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주해에 불만을 품고 자기의 설로써 대치하다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사형당한 것은 그 한 예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가와 친일파들의 글씨가 양극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항일운동가들은 곧고 바르며 보수적인 글씨를 썼고, 친일파들은 기이하고 미친 자태의 글씨를 쓰며 정신적 문제를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가혹했고 한민족이 입은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아무리 나쁜 일에도 좋은 일 한 가지는 따라온다.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로 인한 중국의 위상 저하는 탈중국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1,000년 이상 한민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중국의 틀을 깨뜨리고 나와 고대 한민족의 특성으로 돌아가는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이다. 일례로 이봉창 선생이 쓴 선서문을 보면, 글자가 네모반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전절부轉折部(예를 들어 ‘口 [입 구]’ 자에서 오른쪽 윗부분)가 부드럽다. 행을 맞추기는 했지만 행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곡선과 자유분방함을 사랑했던 그들은 누구인가?
다시 고대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지금 학계와 재야사학계에서 한민족의 원류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한민족에 대한 환상을 취한 이들은 근거 없는 황당한 꿈을 꾸고 학문적 지식을 독점한 학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외면한다. 학문적으로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글씨 분석을 통해 가능한 객관적 접근을 시도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는 기원전 3100년, 중국은 기원전 1200년에 문자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양저문화良渚文化(기원전 3300년~기원전 2200년경)는 물론 홍산문화에서도 문자가 조각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어 동아시아의 문자 사용 연대는 더 올라간다.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했고 발달한 국가였던 고조선에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홍산옥기에 새겨진 문자를 보면 부드러운 곡선이고 선이 정확하지 않아서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 같다. 같은 문자도 크기나 기울기나 방향이 같지가 않고 자유분방하다. 다른 중요한 점 하나는 셈 문자인 ‘산목’으로 보이는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배달국 당시의 도읍지인 신시에서부터 산목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로부터 숫자를 기록하는 많은 문자들이 있었지만 산목과 동일한 형태는 없었다. 홍산옥기에서 산목이 발견되는 것은 홍산문화가 한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주로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본다.『환단고기』에 사용된 용어나 개념이 당시가 아니라 후대에 사용된 것이 많다거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대사의 모습과 내용의 차이가 크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반면 재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지는 사실 중에서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위서가 아니라는 주장도 많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 등에 나오는 오행성五行星 결집, 그리고 썰물과 관련된 기록을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실제로 그 당시에 있었던 현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흑피옥기에 조각된 글씨체는 고신라와 같은 특징(곡선, 자유분방, 빠른 속도)을 가지는데 그 정도가 더 두드러지며 고대 중국의 글씨체와는 확연히 다르다. 흑피옥 가면의 글씨체는 물 흐르는 듯 매우 유연한 곡선 형태가 그 특징이다. 홍산옥기는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무덤에 부장된 것이거나 제단에 묻혀 있던 것이다. 이런 옥기에 조각가 마음대로 아무 글씨체나 새겨 넣을 수는 없다. 게다가 흑피옥기의 문자는 대부분 음각이 아닌 양각인데 단단한 옥에 양각으로 글씨를 새기면 경직된 글씨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도 흑피옥기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곡선과 자유분방한 글씨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곡선을 선호하고 자유분방했는지 알 수 있다.
신·물고기 복합 흑피옥기는 특이하게도 ‘사람 인(人)’으로 보이는 문자가 여러 번 조각되어 있는데 갑골문의 형태와 비슷하다. 같은 문자이지만 수평선을 기준으로 할 때 왼쪽 선이 20도, 60도, 65도, 85도, 90도, 110도, 170도 등으로 여러 방향을 향하고 있다. 왼쪽 선과 오른쪽 선의 각도는 20도, 25도, 30도, 55도, 140도로서 매우 다양하고, 선의 길이도 2~3.5센티미터로서 최장과 최단이 42.9퍼센트의 편차를 보인다. 같은 글자라도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경우가 없고 전혀 다른 글자를 쓰듯이 했는데, 이는 고대 한민족 글씨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진정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인은 누구인가’는 저자가 20여 년간 검사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근무하면서 마음속에 품어온 질문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의 말대로 법률가는 ‘민족혼의 대변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글씨를 찾아 헤맸고 한민족의 필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더 많은 빛을 찾기 위해 필적학은 물론, 역사학, 고고학, 문자학, 인류학, 진화생물학을 공부했다. 연구를 하다가 벽에 부딪힐 때면 『제신과 무덤과 학자들Gotter, graber und gelehrte』을 쓴 세람C. W. Ceram의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직업적 훈련이라는 제동 장치나 전문가들이 지닌 신호등이 없어서 전통적인 학문에 의해 생긴 장애물들을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는 아마추어 독학자가 강박관념에 쫓겼을 때, 많은 위대한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민족은 한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될 수 없고, 또 다른 민족이 한민족을 모방할 수도 없으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민족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등 역사 전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지식은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인간과 현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한민족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현 시점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으며 통일 시대에는 어떤 전통을 창조해나가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독자제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