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원한 진리와 자유를 향한 보조국사 지눌의 삶을 곡진하게 그린 최초의 다큐소설"
한국불교 사상 최대의 결사운동인 ‘정혜결사’를 만들어 고려불교에 자정의 새바람을 일으킨 보조국사 지눌의 일대기를 그린 최초의 다큐소설. 원효와 함께 한국불교의 정오를 환하게 밝힌 중흥조로 평가되는 대선사 지눌. 그는 출가의 초발심을 잃고 승과 속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불교계를 정화하고 부처님의 정법을 실현하고자 한 계정혜의 참스승이었다. 평생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범처럼 날카롭게 살피고 소처럼 우직하게 걸었던 지눌의 수행정신이 오롯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천년의 시공을 넘어 눈푸른 납자들의 뜨거운 수행의 현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목차
출가 인연
굴산사에서 다진 비구의 길
무신정변과 승려들
문자인가, 마음인가
범처럼 날카롭게, 소처럼 우직하게
대각국사 의천과 선교 통합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라
승과 급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육조단경》에서 찾아온 첫 깨달음
하가산 보문사, 선교 통합의 첫걸음
공산 거조사에서 시작된 정혜결사
상무주암에서 얻은 완전한 깨달음
정혜결사의 근본도량을 닦으며
뒤늦게 얻은 수제사 혜심
120일 동안 이뤄진 수선사 법회
침묵의 가르침, 열반
저자
이정범
출판사리뷰
“근본으로 돌아가라! 마음이 곧 부처이니 그대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대선사이자 위대한 사상가 지눌 스님이 혼탁한 세상에 던지는 불법과 수행 정신에 대한 벼락같은 화두!
한국불교 사상 최대의 결사운동인 ‘정혜결사’를 만들어 고려불교에 자정의 새바람을 일으킨 보조국사 지눌의 일대기를 그린 최초의 다큐소설. 원효와 함께 한국불교의 정오를 환하게 밝힌 중흥조로 평가되는 대선사 지눌. 그는 출가의 초발심을 잃고 승과 속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불교계를 정화하고 부처님의 정법을 실현하고자 한 계정혜의 참스승이었다. 평생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범처럼 날카롭게 살피고 소처럼 우직하게 걸었던 지눌의 수행정신이 오롯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천년의 시공을 넘어 눈푸른 납자들의 뜨거운 수행의 현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영원한 진리와 자비의 등불로 되살아난 보조국사 지눌의 장엄한 감동과 깨달음의 일대기!!
한국불교사의 중대한 이정표를 세운 지눌의 뜨거운 구도의 발자취를 찾아서
올여름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사건으로 불교계는 큰 홍역을 치렀다.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청정한 삶을 지키며 용맹정진해야 할 조계종의 계율을 생각한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눌 스님이 살았던 8백 년 전 고려 승단과 지금 승단은 크게 달라졌을까?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행패를 일삼던 고려 승려들과, 계율을 쉽게 생각하고 지키지 않는 오늘날 일부 승려들의 모습 중 어느 것이 더 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때일수록 근본을 생각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결사의 정신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수선사(송광사)를 중심으로 승려들의 수행 공동체인 정혜결사를 조직하여 오직 부처님이 정한 계율 속에서 계정혜 삼학에 힘쓰는 바른 수행을 강조했던 지눌 스님의 삶의 궤적이 오늘날 불교계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는 소행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구별해 이양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 속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 하나 덕이 있겠는가. ……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한심스레 여겨왔다.
-《권수정혜결사문》 중에서
양날의 칼처럼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던 선종과 교종을 합일하고, 보조선(普照禪)을 창시하여 참된 수행은 마음 안에 있음을 강조했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는 지눌의 일대기를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다큐소설로 풀어 써서 독자들이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에 대해 좀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 첫 시도이다.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어우러져 지눌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여주는 지눌에 대한 최초의 소설이다.
조계종의 기틀을 마련한 보조국사 지눌에 대해 50여 편의 학위논문과 600여 편이 넘는 학술논문, 그리고 10여 권의 단행본이 출간되었으며, 보조사상세미나 등의 학술 연구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지눌 스님의 삶에 대해 대중에게 쉽게 알리고자 한 노력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는 역사 교과서에 한 줄 정도 소개된 지눌의 일생을 더듬어 가상과 정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적 재미를 더하여 구성했다. 또한 학술적인 내용, 불교적인 지식 등도 놓치지 않아서 불교 독자, 역사 독자, 인문 독자 더 나아가 성인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다큐소설이자 역사소설, 구도소설이다.
지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탁한 승가의 풍토를 바로잡고 중국이나 서역이 아닌 고려만의 불법을 일으켜야겠다는 다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스승의 유훈처럼 호시우행의 길을 걷다 보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104쪽
“범처럼 날카롭게 살펴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걸어라”
초발심의 마음으로 선정과 지혜의 한 길로 묵묵히 가라!
고려 중기인 1158년에 황해도 동주군(서흥)에서 국학 학정인 정광우의 아들로 태어난 지눌(아명 목우)은 몸이 몹시 허약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고, 부모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불법에 매달렸다. 그러자 병이 차츰 낫기 시작했고, 지눌은 8살 나이로 사굴산문(강릉시 굴산사에서 개창한 산문)의 종휘선사 문하로 출가한다.
“사실은 꿈속에서 부처님을 여러 번 뵈었어요. 부처님께서 법문하실 때 수천 명의 제자들 속에 섞여 있던 제가 딴청을 부렸고, 그래서 어른 스님들께 야단을 맞기도 했어요. 아마 제 전생이 게으른 중이었나 봐요. 하지만 언젠가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시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꿈을 꾸었어요. 그러니 금생에서라도 다시 출가할 수 있다면 한눈팔지 않고 수행에 힘쓸 것 같아요. 그런 때가 되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게 살겠죠?”
-23쪽
열일곱에 비구계를 받고 사굴산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지눌은 무신정권을 거치며 수행은 하지 않고 날로 혼탁해지는 불교계를 보며 번민에 휩싸인다. 결국 지눌은 스승 종휘선사가 입적하자 굴산사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깨닫고 만행의 길을 떠난다. 경기도 광주 근방의 교종 사찰인 관음사에 머물게 된 지눌은 그곳에서 젊은 시절 종휘선사와 함께 공부한 이안 노장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머물며 노장의 권유로 많은 불서들을 접하게 된다.
1182년 25세의 지눌은 승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선이라는 법계에 올랐으며, 곧바로 개경 보제사에서 있었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많은 대중 앞에서 수행 공동체인 결사를 제안한다.
“그런 뜻에서 소승은 이번 법회를 계기로 일체의 명예와 승려로서 누리는 특권을 버리고 숲 속에 은둔하며 선정과 지혜를 갈고닦기를 바랍니다. 예불과 경 읽기, 나아가서는 노동하고 울력하는 데까지 스스로 맡은 일을 다하며 인연 따라 성품을 길러 평생을 걸림 없이 지내 진인달사(眞人達士)의 높은 행을 따르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비록 소수만이라도 그런 결사가 이뤄진다면 고려의 승가가 개혁되고 정화되는 불씨가 될 것입니다.”
-128~129쪽
지눌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안하였으나, 당장 함께할 결사의 장을 마련할 수 없어 각자 수행처로 돌아가 시절인연을 기다리기로 한다. 창평 청원사에서 사형인 만학, 득재와 함께 천 일 동안 용맹정진하던 지눌은 《육조단경》을 읽던 중 불현듯 깨닫게 된다. 첫 번째 깨달음이다.
지눌의 생애 중 첫 번째 깨달음이 되는 그 대목은 대체 무슨 가르침을 담고 있을까?
‘진여자성’이란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 본래의 마음, 부처인 마음에 눈을 뜨면 무엇을 보고 듣고 알더라도 대상에 물들지 않고 자재하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이 부처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지눌은 《육조단경》을 통해 본래의 마음, 부처인 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152~153쪽
선교 회통의 필요성을 절감한 지눌은 천일 결사를 마친 뒤 교종 사찰인 하가산 보문사에 주석하며 《화엄경》 《반야경》 등의 경론 읽기를 참선과 병행한다. 그러던 중 《화엄경》 여래품을 읽다가 두 번째 깨달음이 찾아오고, 선과 교의 근본이 같음을 확신한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세 번째 깨달음을 얻은 지눌은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을 작성하며 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의 기틀을 다진다.
지눌은 이때 백장청규에 바탕을 둔 대중 규칙과 일과표를 만들어 도량 곳곳에 게시해놓았다. 그리고 새벽 예불에서부터 공양, 참선, 경전 읽기와 강의, 울력, 취침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과에 이르기까지 손수 모범을 보임으로써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수행의 근본정신을 익히며 실천하게 했다. 그 와중에 공동체 생활이 불편하고 이물스러워 슬며시 결사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고, 결사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비구도 있었다.
-196쪽
지눌의 결사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스님이 계속 늘어나자, 지눌은 순천 송광산 길상사(송광사)로 정혜결사의 터를 옮긴다. 이곳에서 지눌은 초발심자들이 지켜야 할 경책을 담은 《계초심학인문》을 편찬하였고, 이는 고려 승가 전체를 정화하는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혜결사를 굳건히 하던 지눌은 1208년 3월 27일 수선사 선법당(지금의 송광사 설법전)에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마친 뒤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만약 진실로 세상을 뛰어넘은 장부라면 언설이나 지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언제나 경계에 부딪히는 인연을 만나는 곳에서도 세속의 이치도 퍼뜨리지 않고 또 불법의 이치도 논하지 않으면서 한 가닥의 사는 길을 얻으면 그는 저절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허물과 6대 조사의 허물과 천하 선지식의 허물을 보게 될 것이니, 그때 자기 집의 보물을 실어내어 모든 중생을 구제하면 곧 임금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한꺼번에 다 갚을 것이다.”
-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