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생의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은 어떻게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추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추천
아시아계 최초의 프랑스 장관에서 스타트업 투자자로
경계를 허물고 한계를 뛰어넘은 플뢰르 펠르랭의 첫 책 전 세계 최초 출간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후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 후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워 벤처 투자자로 변신한 플뢰르 펠르랭의 첫 책. 플뢰르 펠르랭이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아시아계 최초 프랑스 장관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비상했다. 2013년 자신을 마치 “딸처럼” 환영했던 한국인에게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한국으로 프랑스로 다시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국경을 넘기까지 분투하고 환호했던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마음의 국경까지 넘어섰을 때, 플뢰르 펠르랭은 그의 바람대로 “멋진 방법”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목차
프롤로그. 이국으로 나아가기
1. 서울의 거리에서 파리의 교외로
2. 거울에 비친 백인 여자아이
3. 평등이라는 기회
4. 진화하는 진보를 위하여
5. 폭풍의 눈으로 더 가까이
6. 돌아오는 방식
7. 유예 없는 시작
8. 치명적 행운
에필로그. 우리는 다시 만나는 선택을 했다
저자
플뢰르 펠르랭 (지은이), 권지현 (옮긴이)
출판사리뷰
아시아계 최초의 프랑스 장관에서 스타트업 투자자로
경계를 허물고 한계를 뛰어넘은 플뢰르 펠르랭의 첫 책 전 세계 최초 출간!
2013년, 한 프랑스 장관이 콘퍼런스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검정 치마를 입고 검은 단발머리를 한 그의 이름은 플뢰르 펠르랭. 인천공항에서부터 국내외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았다. 그 프랑스 장관의 답 “나는 프랑스인입니다”는 생후 6개월 때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는 소식과 함께 언론에 특필됐고, 아시아계 최초 프랑스 장관에 오른 플뢰르 펠르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폭증했다. 그는 몇 년이 지나서야 그때 기자들에게 받았던 질문을 되새기게 된다.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기자들은 내게 한국인의 정서가 있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2013년에 한국에 애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국은 나를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에 내버린 나라가 아니었던가. 반면 프랑스는 나에게 여권 이상의 것을 주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말이다. 이를 알면서 어떻게 내가 두 나라를 단순하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플뢰르 펠르랭은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후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 후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워 벤처 투자자로 변신했다. 한국에서 최초 출간되는 그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날로부터 정치인과 사업가로서의 최근 활동까지 담았다. 동시에 2013년 자신을 마치 “딸처럼” 환영했던 한국인에게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책이다.
누군가는 그가 운명을 극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플뢰르 펠르랭은 운명을 탓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유전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그냥 주어진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입양아, 동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온 한 사람의 작은 이야기는 자신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사회가 만든 경계라는 게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넘어설 수 있음을 깨닫는 데 큰 힘”(네이버 창업자 이해진)과 “여성 리더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답”(CJ그룹 부회장 이미경)을 줄 것이다.
“멋진 방법으로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다”
종숙과 플뢰르 사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내면의 이야기
서울의 판자촌에서 발견된 갓난아기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이듬해 프랑스에 도착했다. ‘종숙’이라는 이름 외에 ‘플뢰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연거푸 두 아이를 잃은 부부가 지난한 입양 절차를 거쳐 부모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이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 덕분에 플뢰르는 명문 그랑제콜 에섹경영대학교(ESSEC),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프랑스감사원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교육에 관해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이상으로 문화적으로도 완전히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바로 그 시기, 플뢰르 펠르랭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남편과 이혼하면서 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상처를 건드렸을 거라고,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프랑스 장관으로서 한국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한 적도 없었고 한국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것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그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이 애써 무시해오던 다름, 그래서 프랑스에 동화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 자신의 출신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후부터였다. 잘못된 경로로 세상에 진입한 사람이라는 부끄러움, 부모가 원하지 않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수치심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플뢰르 펠르랭은 “부모님과 프랑스에 또다시 거부당할 이유를 만들지 않기 위해” 타고난 기질을 거스르면 서까지 어릴 때부터 늘 규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플뢰르 펠르랭이 한국에 “다시 돌아오는” 방식은 다른 많은 입양아가 그랬듯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누구인지 안다고 해서 더 완전한 사람이 되거나 마음이 더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기에,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에 되돌아왔다.
선택은 어떻게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가
경계에 갇히지 않고 넘어서는 방법
프랑스감사원에서 일하던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2002년 사회당 대선 후보의 연설문 작성을 담당하면서부터다. 2007년 대선 때는 IT 정책보좌관으로서 디지털경제 전문가로 활약했고, 2011년 당시 올랑드 사회당 후보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플뢰르 펠르랭이 올랑드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게 된 것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대단한 뉴스였다. 그는 정치계 스타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얼마간의 운이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플뢰르 펠르랭은 자신이 설 자리,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올랑드 후보 선거 캠프 합류 당시 플뢰르 펠르랭이 처음 제안받은 것은 ‘다양성’ 분야 업무였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양성 문제가 내게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경제, 재정 분야에서 내가 쌓아온 경력을 볼 때 외모가 내 능력을 가리는 것은 내게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후보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
그는 ‘디지털’ 분야를 맡고 싶다고 피력했다. 디지털이 미래 핵심 분야가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대선 캠프에서의 담당 업무는 대선 승리 이후에도 이어져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 시절 프랑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하는 ‘라 프렌치 테크(La French Tech)’를 이끌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동양인 외모가 아니었다면 남자였다면 겪지 않아도 될 폭력도 온몸으로 겪었다. 그를 두고 ‘가사도우미’ ‘게이샤’ 등의 모욕적인 표현이 나돌았다.
선거운동에서부터 장관으로 임명되기까지 대통령 선거판의 막전막후,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하는 단계에서의 치열한 이해관계, 정권교체에 따른 분주한 이합집산 등 공직자로서는 알 수 없었던 정치판의 경험은 그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한한 세계가 우리 앞에 있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다시 국경을 넘는 선택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맡을 때까지만 해도 플뢰르 펠르랭은 정치계에서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기류가 바뀐 것은 그가 한 방송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말한 때부터였다. 부적절하게 편집된 탓이라는 말을 할 사이도 없이 문화부 장관 자격이 없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샤를리 에브도〉 편집국, 축구경기장과 공연장에서 발생한 테러를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몇 달을 보내고 나서 정부 각료 교체 시간이 다가왔다. 플뢰르 펠르랭은 장관직에서 내려와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장관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한 뒤 다시 혼자가 되는 것,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테이블 위 전화기를 바라보는 것, 나를 예전처럼 존중하지도 않고 아예 거리를 두는 주변 사람 등 모든 것이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장관 시절 한국과 맺은 인연으로 한국 기업과 미팅을 몇 차례 하고 나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퇴임 후 감사원으로 돌아갔을 때 대사직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다. 이 모험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였다. “실패는 온전히 내 책임이고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없었다. 특히 공직을 떠남으로써 파트너들에게 앞으로 열심히 임하리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어서 결정을 내리고 흡족했다. 사직서에 서명하면서 나는 실패해도 돌아갈 자리가 없고 고위 공직자의 넉넉한 월급과는 영원히 안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 시작 전 파트너와 작성한 ‘의향서’가 ‘계약서’로 오인되면서 공직자의 윤리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가택 수색을 당하고 수십 명이 조사를 받았다. 무혐의로 결론이 나기까지 장장 18개월이 걸렸다. 예상하지 않았던 도전에 따라붙은,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였다. 이제 코렐리아캐피탈은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할 준비를 하고 있고, 플뢰르 펠르랭은 장관 시절보다 더 자주 한국을 방문한다.
생후 6개월 당시 한국에서 프랑스로 이동했을 때처럼 그는 한 번 더 국경을 넘었다. 차이점은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그가 선택한 운명이라는 점이다. “내 수치심은 사라졌고 우리의 운명은 얇은 트레이싱 페이퍼 여러 겹을 포개 그린 조화로운 그림처럼 겹쳐 있다.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선이 만나 한국과 나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것, 유전자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멀어짐과 망각, 무관심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만나는 선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