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압록강물 어느 땐들 마르리, 이내 한 끓어올라 끊어질 기약없네!”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제8권으로, 국권을 상실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 20인의 활동을 담았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국내와 국외를 무대로 해서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강인한 민족애로 생애를 바쳤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이념대립도 있었고 노선갈등도 있었다. 또 투쟁노선을 두고 각기 주장을 달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부 갈등과 분열이 유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념은 하나에 맞추어져 있었다. 일제 식민지 집단을 조국의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성분과 노선을 따져 분류하면 주로 국내에서 독립활동을 벌인 인사와 해외에서 독립항쟁을 벌인 인사로 나눌 수 있고 중국 국민당 또는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쟁취하려는 인사와 중국 공산당 또는 소련 볼셰비키 정권의 도움을 받아 민족해방을 이룩하려는 인사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그 활동무대와 지향이 다르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과제로 삼고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 역사의 주역은 누구인가
1부 칼에는 칼로 맞서라
안중근 항일 독립투사의 표상
홍범도 만주 항일투쟁의 주역
신돌석 신출귀몰한 태백산 호랑이
허위 항일의병의 상징
김좌진 청산리전투의 큰 별
2부 나라 잃은 백성을 깨우치고
이상재 타협을 거부한 민족독립운동가
신규식 임시정부의 주춧돌
장지필 형평운동을 주도한 인권운동가
안재홍 중도우파로 신민족주의 제창
방정환 하얀 눈을 사랑한 어린이 운동가
3부 노선은 달라도 목표는 같다
김원봉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투쟁과 죽음
이화림 조선의용군 출신의 여인
이회영 독립운동 초석 마련한 지도자
이동휘 좌파 민족해방의 교량
김규식(노은) 만주독립투사의 거목, 암살당하다
4부 분단만은 막아야
김구 나의 소원은 통일
김창숙 실천적 유학자로 독립운동에 헌신
조소앙 사상적 선각자, 삼균주의 이론틀
김규식(우사) 남북협상의 주역, 좌절된 중도우파
여운형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지도자
저자
이이화 저자(글)
출판사리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안중근은 천주교 신도로 한 개인을 살해하는 것이 교리에 어긋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개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유린하고 동양평화를 깼으며 최소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세계의 민권운동가를 기만한 장본인을 응징하고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임을 천명했다.
“이토는 한국을 침략하여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정권을 손아귀에 쥐고서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 광산, 산림, 천택川澤을 빼앗았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 집들을 병참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묘소들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안중근은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들면서 대한민국의 의병참모 중군의 자격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서 그의 깊은 사려와 논리의 정당성을 발견하게 된다.
압록강의 새벽바람은 매서웠다. 몇 개월 전에 완성된 시꺼먼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는 신규식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대륙 침략의 가교!’
‘아, 망국민의 설움!’
사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하고 사공의 노젓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조각배는 갈대숲에 멎었다. 신규식은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디디고 선 땅은 이젠 남의 땅, 강 건너 어렴풋이 보이는 조국의 산하.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국을 그는 그 뒤 다시 못 본 채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봉천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신규식이 그곳의 사정을 알아보니 교포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30명 내외의 인사들이 생업에 종사하기에도 급급하여 독립투쟁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예관은 이들을 한데 뭉치는 방법을 구상하는 한편 중국 혁명인사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제일 먼저 만난 중국인사는 불과 스물이 갓 넘은 『민립보民立報』의 기자 서혈아徐血兒였다.
“서 기자, 나는 꺼저우리팡스(고려개)요. 이 망국민을 도와줘야겠소.”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지요?”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몇 천 년을 두고 깊은 교류를 해왔소. 양국간을 형제의 사이라고 말해 왔소. 중국이 우리를 외면해서는 도리가 아니잖소?”
예관의 말은 계속되었다.
“입술이 떨어지면 이가 시린 법, 이미 입술은 떨어졌소. 쭝궈팡스(중국개)를 면하려면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것이 첩경이란 말이오.”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어떤 방법으로…….”
“우선 동맹회(국민당 전신) 인사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제가 잘 아는 황흥 장군을 소개해 드리지요.”
신규식의 식견과 애국심에 경복한 서혈아는 3년 뒤 죽을 때까지 신규식을 도왔다. 당시 중국의 정치정세는 수년 전의 한국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열강의 손은 중국 전역에 뻗쳐 있어 하나씩하나씩 이권을 노리면서 뻗쳐 들어오고, 부패한 청조 및 수구파는 중국 근대화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신규식을 만난 황흥은 그 높은 기개와 앞날을 내다보는 형안에 감탄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황흥은 중국 혁명세력의 제2인자 격이었고, 신해혁명 후 대원수부의 육군총장을 역임한 거물이다. 황흥을 만난 신규식은 손문이 만든 혁명단체 동맹회에 가입했다.
이 동맹회에서 신규식은 당의 실질적인 영도자요 이론가인 진기미를 비롯, 송교인, 호한민, 대계도 등 일곱 명의 혁명 정객들과 교유했다.
여름 어느 날 신규식은 손문과 상해에서 자리를 같이했다.
“예관 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신다니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바로 중국 혁명운동이 한국 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무력한 청은 우리에게 시모노세키조약 등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입술과 이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이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혁명의 이념을 보고,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 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논객이요, 애국자이십니다.”
“중국 혁명운동에 끝까지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예관 선생! 감사합니다.”
40대의 손문은 신규식의 손을 굳게 잡았다.
김원봉은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될 무렵인 1948년 8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벌이기 위해 북쪽으로 넘어갔다. 그는 남북협상이 결렬된 뒤 홍명희와 함께 북쪽에 눌러앉아 살았다. 아마도 남쪽에서 친일파들이 날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노동당 등의 고위직을 누리던 그는 간첩으로 몰려 1968년경 숙청당했고 이어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6·25동란을 겪으며 고향 땅의 가족을 그렸을 것이요, 죽으면서 남쪽의 자식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이 아닌가? 열렬한 혁명가의 생애는 참으로 비참했다.
오늘날 그를 두고 새로운 평가들이 나타난다.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다만 열렬한 좌파 민족주의자요, 통일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동휘의 독립운동 노선은 분명했다.
“우리는 민족혁명과 무산계급 공산혁명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한족의 혁명이라면 추진한다.”
이로 인해 그는 소비에트로부터 소외되는 처지였다. 코민테른의 원동부遠東部 위원은 “고려공산당은 조선독립에만 전념하고 공산주의 선전은 단지 편의로 겉으로만 내세우고 있으니 본래의 공산주의운동에는 백 가지 해만 있지 한 가지 이로움도 없다.”고 보고했으며, 조선총독부의 정보자료에도 “원래 고려공산당 최후의 목적은 조선독립에 있으므로 공산주의 선전에 사용한 자금도 요컨대 독립운동에 사용한 것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동휘 자신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평소에 말했다 한다.
이동휘가 구한국군인이 된 것이나 기독교도가 된 것이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는 몇 단계를 거쳐 방법적으로 변화를 보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남북 양쪽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편향된 정치적 작용과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떠나 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민족사의 참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좌우합작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성사를 지원하던 중 여운형은 극우청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빈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통곡했고 장례행렬에 자발적으로 모인 조문객이 큰 행렬을 이루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항목에 여운형 33퍼센트, 이승만 21퍼센트, 김구 18퍼센트, 박헌영 16퍼센트의 순서로 매겨졌다. 물론 어수선한 시기였고 정치활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지 않은 시기여서 국민의식이 자리잡았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는 중에 그 실패를 예견했다고 하며, 죽기 전에도 측근들에게 “나는 결국 죽을 거야. 그렇지만 죽더라도 분단만은 막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실패를 하더라도 끝까지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운동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이를 가지고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탓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 역사에 대한 통찰력으로 빚어낸 역사학자 이이화의 한국인이야기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 인물을 알아야 비로소 역사의 흐름과 그 시대상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 그 인물의 행적을 좇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접하기도 하고, 과대평가되었거나 과소평가된 경우가 허다하여 혼란을 주기도 한다.
이이화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왔다. 또 잘 알려진 인물일지라도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렇게 이루어진 인물이야기가 어느덧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의 주요 인물을 망라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인물로 읽는 한국사가 된 것이다.
이 시리즈는 1권 왕과 관료들의 이야기인『왕의 나라 신하의 나라』를 시작으로 10권의 시리즈로 완간할 예정이다.
왕과 관료들의 이야기『왕의 나라 신하의 나라』
시대에 맞서 변혁을 꿈꾼 혁명가와 의학?과학자『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열정의 예술혼을 불태운 문학가와 예술가『조선인은 조선의 시를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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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교?도교?기독교?민족종교 등 진리의 길을 쫓는 종교가 『진리는 다르지 않다』
봉건왕조에 저항한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파랑새는 산을 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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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찾아 독립 투쟁을 벌인 국내외 독립운동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리니』
한국사의 영원한 맞수
남북한 현대사의 주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