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핵무기와 국제 정치』 출간 7년 만의 개정증보판
IAEA 한국인 핵 사찰관이 들려주는 핵무기의 현대사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0년간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서 선임 핵 사찰관, 기술 자문 위원 등으로 활동한 안준호 박사가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원자의 발견에서부터 핵무기가 개발되기까지의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정치 무대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 핵무기를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이번 개정증보판은 2011년 초판 출간 이후 변화된 국제 환경과 업데이트된 자료들을 보완했으며, [북한의 핵무기 야망]이라는 새로운 장을 추가해 최근 이슈로 떠오른 비핵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는다. 추가된 장은 2012년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후 감행된 세 차례 핵 실험의 배경과 의미를 분석하고 있으며, 전직 핵 사찰관의 경험에 비추어 북한의 비핵화 검증 과정이 매우 힘든 노정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세계 각국의 현대사는 내부적으로는 경제 발전, 민주화, 과학기술 혁명 등이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대결, 자원 확보 경쟁, 국제 간 무역 등이 굵직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세계사의 이런 흐름 뒤에는 국제 관계의 역학 관계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무기, 곧 [핵]이 있었다. 1938년 핵분열이 이론적으로 규명된 이후의 세계사는 가히 핵무기의 역사라 할 만하고, 현재도 국제 정치에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국제 경제와 더불어 바로 이 핵무기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핵무기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 이 책은 핵이 현대사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역사적?정치적 과정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핵의 기술적 특징도 심도 있게 담았다.
목차
추천의 말
머리말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1부 핵무기의 탄생
1_ 원자의 모습
2_ 방사능 물질
3_ E = MC2
4_ 핵분열
5_ 맨해튼 프로젝트
6_핵폭발의 참상과 핵겨울
2부 핵무기 경쟁과 감축, 그리고 국제 정치
7_ 미소 간의 핵무기 경쟁
8_ 뒤늦게 출발한 영국, 프랑스, 중국
9_ IAEA와 NPT
10_ 강대국이 되기 위해
11_ 도전받고 있는 NPT
12_ 북한의 핵무기 야망
13_ 핵무기 없는 세상
부록
부록 I. 핵연료 주기와 핵무기 제조 경로
부록 II.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전문
부록 III.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전문
감사의 글과 참고 자료
용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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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준호
출판사리뷰
핵무기의 탄생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추앙받는 아인슈타인. 그러나 말년에 그는 원자 핵폭탄을 탄생시킨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여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스웨덴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우라늄 핵분열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냈고, 헝가리 출신 유대인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핵을 타격할 때 여분의 중성자가 나올 수 있으며, 두 개의 중성자는 다시 다른 원자핵을 타격하고 이렇게 해서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허버트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에 나오는 [원자 폭탄]이 공상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 공상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이 원자 폭탄을 먼저 만들게 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냈고, 결국 미국은 원자 핵무기 개발 임무를 부여한 [S-1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이 프로젝트는 수개월 후 군부의 손으로 넘어가 맨해튼 프로젝트로 탈바꿈했고,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하기에 이른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위력을 목격한 인류는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의 신무기에 찬사를 던지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업적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계속 사용될 경우, 인류의 종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강대국의 핵무기 개발 경쟁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소련과 영국, 프랑스, 중국도 서둘러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40명의 과학자들을 독일의 동부 전선에 투입해, 그동안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원자 핵무기에 대한 막대한 자료와 함께 관련 과학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겼다. 20세기 초에 영국은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었다.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J. J. 톰슨과 러더퍼드가 영국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배출한 제자들이 영국의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인 [튜브 알로이스]의 조직을 가능케 했다. 원자 물리학의 선구자였던 베크렐과 퀴리 부인을 배출한 프랑스는 퀴리 가족과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동원해 핵폭탄 연구를 위한 파리 그룹을 결성했다. 중국 대륙을 평정한 마오쩌둥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는 세계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우라늄광을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넓은 중국 대륙에는 우라늄 광산이 풍부했고, 마오쩌둥은 우라늄을 소련에 제공하는 대가로 중국 학생들을 소련에 보내 기초 과학 훈련을 받게 했다.
냉전 시대의 핵무기 - 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로마 시대 때부터 내려온 라틴어 격언이다.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을 길러야 했고, 핵무기는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새로운 무기였다. 양국은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지난 45년간 냉전이라는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수만 기에 달하는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들이 펴는 논리는 판박이였다. 핵무기를 선제공격에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를 가짐으로써 핵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실제 대량 핵무기를 미국과 소련이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국지적인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수십 년 동안 대규모의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핵무기가 한번 사용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는 확실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북한과 중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가 철회한 사례가 있었고, 냉전 시대에 쿠바 위기와 여러 차례 대만 위기에서도 그러했다. 상대방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욕구가 마지막 단계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과 소련은 결코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적국의 핵무기 수를 뛰어넘는 대량의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66년 미국의 핵무기 보유 수는 31,700기, 1986년 소련의 핵무기 보유수는 40,700기에 달했다. [지구 마지막 날의 시계]는 종말 2분 전까지 가리키고 있었다.
제3세계의 핵무기 개발사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과학자 출신인 바이츠만. 1948년 이스라엘이 아랍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바이츠만은 아랍국에 둘려 싸여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고려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5년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했다. 수에즈 운하 분쟁에서 시작된 이집트와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4백만 명의 인구로 주변의 아랍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핵무기였다.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영토 분쟁으로 1947년, 1965년, 1971년 세 차례 전쟁을 치렀다. 중국과도 1962년 영토 분쟁으로 소규모 전쟁을 겪어야 했다. 미소의 개입으로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카시미르 지역에 인접한 아크사이친 지역을 지금도 중국이 강점하고 있는 데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다. 인도는 중국과 거의 맞먹는 크기의 영토와 인구를 가졌음에도 중국처럼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인도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 이유였다. 인도 정부는 영국에서 독립하자마자 1년 뒤에 원자력법을 만들었으며, 법의 시행에 맞춰 네루 수상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원자력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평화적 목적에 이용할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다른 목적에 쓰이도록 인도가 강요를 받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없을 것이다.] 인도는 지금도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가입을 거부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인도와 적대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의 부토 수상은 1968년 인도가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도가 핵무기를 가질 경우, 우리는 나무와 풀로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자신의 것을 하나 만들거나 아니면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현재 파키스탄은 50~100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성공은 중국의 도움이 많이 작용했다.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경쟁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의 균형에서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베트남전에서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의 손에 맡긴다는 1969년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에 따라 1970년부터 1971년 6월까지 1만 8천 명의 주한 미군의 감축을 단행했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립 경제와 함께 자주 국방을 주창하면서 핵무기 보유를 꿈꾸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약속한 한국에 대한 안보 정책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고, [비 오는 날을 위해 반드시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핵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미사일 개발 등에서 미국의 협력을 얻지 못할 경우 제3국의 도움이라도 얻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도 강했지만, 미국의 입장 또한 강경했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이 인접 국가, 특히 북한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유사시 핵무기 지원을 보장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한국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한미 안보 관계에 불가피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20년이 지난 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 국무성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10년 이내에 핵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노력했던 이유다. 1974년 말부터 1976년 초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의 국무성, 백악관 사이에 비밀리에 오고 간 총 15건의 비밀 외교 문서는 한국의 핵 개발과 미국의 압력을 보여 주는 극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
북한 비핵화의 조건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핵심이다. 1993~1994년도의 한반도 첫 번째 핵 위기 때에 북한은 이라크와 같은 벼랑 끝 전술을 펼쳐 국제 관계의 개선과 경제 지원이라는 대가를 얻어 냈다. 하지만 두 번째 핵 위기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그들의 전술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미국은 2003년부터 이뤄진 6자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폐기가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고verifiable,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섯 번에 걸친 6자 회담의 결과에서 어떤 소득도 없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연거푸 성사됐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높지만,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은 경계해야 한다. 1992년 남북이 비핵화공동선언을 했고,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나왔고, 2005년 이후에도 9 ?19 공동성명 등 6자 회담의 결과물이 있었다. 사반세기 넘는 북한 비핵화 노력은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제네바 합의로 잘 풀리는 듯했던 북핵 문제는 9?11 사태 이후 새로운 핵확산 정보를 확인한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자 합의가 파기됐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온 뒤에도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제재를 결정하자, 준비가 되었다는 듯 2006년 10월 북한은 제1차 핵 실험을 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등이 압박에 나서자 몇 달 뒤 다시 핵개발을 않겠다는 듯 돌아와 IAEA 사찰을 2년 정도 받았지만 2009년 4월 사찰관들을 모두 추방하고 5월에 2차 핵 실험을 감행했다.
저자는 북한 비핵화의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우선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로 돌아오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이 북한의 국제관계 정상화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IAEA에서 모든 핵 관련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구할 것이고 북한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 당연히 북한이 제공한 자료는 방대할 것이고 전문가들이 그것을 분석해 사찰 계획을 세운 뒤 제공한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사찰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찰 팀이 북한이 밝히지 않은 의심 시설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 과정이 몇 달이나 1년 정도로는 불가능하다. IAEA의 사찰 능력을 감안한다면 5~10년 정도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향후 정상 간 회의에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와 〈모든 시설·정보 공개〉를 직접 약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체제 안정을 보장받을 것이냐 핵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과 대결할 것이냐]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북한이다. 투명성과 일관성, 향후 행동에 대한 예측성은 거래의 기본 조건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제관계에서 그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가 알려 주듯 정상급의 약속이 파기되면 전쟁밖에 없었다. 북한의 비핵화가 북한의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문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번 개정판이 북핵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관심을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