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석탑 교양 총서]의 문을 여는 첫 책, 『호모 주리디쿠스』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서 윤리적 인간으로 살아남기
고려대학교 문과 대학 교수들이 필진으로 참여하는 열린책들의 새로운 인문 교양 시리즈 [석탑 교양 총서]의 첫 책. 이 시리즈는 인문 교양에 대한 일반 대중의 높아진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여 대학의 학문적 성과를 보다 쉬운 언어로 시민과 소통하고 함께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고려대학교 문과 대학과 열린책들이 함께 기획한 것이다. 손병석 교수(서양 고대 철학 전공)의 『호모 주리디쿠스』는 이러한 기획에 값하는 첫 결과물이다. 정의를 추상적인 사변을 통해 개념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정의란 과연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침몰하는 보트에서 승객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받은 승무원 홈즈, 인질들의 석방 조건으로 살인을 강요받는 식물학자 짐, 그리스군의 승리를 위해 필록테테스를 속여 활을 빼앗도록 요청받는 정의로운 품성의 네오프톨레모스. 과연 어떠한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 그리고 그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호모 주리디쿠스』는 실제 또는 가설적 상황에서 마주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세밀히 검토하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어떠한 선택 원리가 가능한지 모색한 철학 교양서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시중엔 정의론과 도덕철학에 관한 많은 교양서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표제인 [호모 주리디쿠스Homo Juridicus](우리말로 [정의로운 인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단순히 딜레마 상황에서 주는 지적 게임에만 머물지 않는다. 윤리적 판단을 위한 이론적 전개를 넘어 [인간은 왜 정의로워야 하는가?] 하는 실존적 물음으로까지 주제를 확장하고 있다. 샌델이 [정의]를 물었다면, 이 책은 정의로운 [인간]을 묻는 셈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제1부 생과 사의 갈림길, 어느 것이 정의로운 선택인가?
윌리엄 브라운호 침몰과 승무원 홈스
동굴 안의 로저ㆍ모어
짐의 선택
제2부 효와 정의, 무엇이 더 우선하는가?
공자의 효자와 소크라테스의 에우튀프론
공자의 효와 소크라테스의 정의 이해하기
제3부 정의로운 거짓말은 가능한가?
거짓말과 정의의 문제
정의로운 거짓말은 가능한가?
정치인의 거짓말
제4부 사유하지 않는 자는 왜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없을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부정의한 국가와 정의로운 인간
나가는 말
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손병석
출판사리뷰
윤리적 행위를 위한 원리 찾기
철학이 단순한 지적 놀이가 아닌, 실천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이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윌리엄 브라운호 침몰 사고. 1841년 북대서양에서 배가 빙산에 충돌하고, 승무원 홈즈는 1등 항해사의 명령에 따라 남자 승객 12명을 보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사건 후 홈즈는 유가족들에 의해 살인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다. 저자는 현실의 재판 결과를 떠나, 당시 홈즈의 행위 속에서 가능했을 올바른 선택원리the selection principle를 추출해 내고자 한다. 희생자 선정 과정에서 합의가 있었나? 왜 여성과 승무원은 배제되었나? 항해사의 명령을 받아들이기 전에 다른 대안은 없었나? 이런 물음 속에서 홈즈의 행위가 위험의 공동 부담 원칙, 승객 안전 우선 원칙, 선택원리의 필요성 충족 요건에 합치되는지 다각도로 살피고 있다. 2부 거짓말에 대한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거짓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심지어 살인자 앞에서도)는 칸트의 거짓말 불허용론과 다수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당연히 허용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를 논하며, 각각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를 통해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거짓말의 세 가지 구성 요건, 곧 발화자의 양심, 타인의 지지와 승인, 공동체적 가치 충족 여부를 이끌어내고 있다.
효와 정의의 목적은 하나, 윤리적 인간의 배양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 중 하나가 동양의 효와 서양의 정의를 대비?분석한 대목이다. 죄를 지은 가족을 보호하는 게 옳은가, 나라의 벌을 받도록 재판대에 세우는 게 옳은가? 이 물음은 동서양의 옛 문헌에서 다른 온도차를 보여 준다. 공자의 『논어』에서는 양을 훔친 아버지를 관가에 고발하는 게 아니라 숨겨 주는 게 옳다고 하고, 플라톤의 『에우튀프론Euthyphron』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죽게 한 아버지를 고발한 에우튀프론의 논변, 곧 살인자에게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오염miasma이 공동체 전체로 퍼져 재앙을 맞을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효와 정의는 공히 동서양에서 [윤리적 인간 만들기]라는 교육적 역할을 수행해하기 위해 강조된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저자가 보기에 유교에서 효 윤리는 단순히 부모 봉양 이상을 의미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식이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아실현과 자기 수양의 덕목으로 이해되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 정의 윤리는 올바른 인격 형성을 위해 강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의에서 벗어났을 때는 (……) 색욕과 식욕을 밝히는 동물이 되지만, 정의로 무장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윤리적 인간]은 폴리스Polis라는 정치 공동체에서 정의를 체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고, 가족은 마을로, 마을은 다시 폴리스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온정주의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올바른 통치를 위해선 가족을 해체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유다. 그럼에도 동서양 공히 [윤리적 인간]을 키운다는 궁극적인 지향에는 차이가 없다. 그 배양소가 가족이냐 폴리스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동양에서 [윤리적 인간]은 가족인(家族人)이 됨으로써 가능했다면, 서양에서 그것은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나쁜 국가의 훌륭한 시민은 왜 유죄인가 - 생각하지 않은 죄
이 책의 4부에서 저자는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올바른 시민 윤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은 나치하에서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이송시킨 총책임자였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분석을 빌려 아이히만의 주장을 꼼꼼히 따져 묻는다. [좋은 정부의 시민인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시민인 것은 불행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는 아이히만의 강변, 어떻게 봐야 할까?
전체주의 국가의 훌륭한 시민이 있을 수 있고, 민주 국가의 훌륭한 시민이 있을 수 있다. 저자는 훌륭한 시민은 정체(政體) 의존적이지만, 선한 시민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선한 정부(민주 국가)에서 훌륭한 시민은 곧 선한 시민이 되지만, 나쁜 정부(독재 국가)에서 훌륭한 시민은 곧 그 정권과 악을 공유한다. 나쁜 정부하에서 선한 시민은 정권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나치하에서 유대인을 구해준 안톤 슈미트나 라울 발렌베리 같은 인물들이 그 예로 등장한다.
저자는 무사유의 전형인 아이히만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모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니모스phronimos(실천지를 가진 인간) 개념을 끌어온다. 실천지는 행동 결정을 위한 구체적 상황에서 발휘되는 지적인 덕으로, 프로니모스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비판적 검토한 뒤 행동하는 인물이다. 올바른 일일 경우에 명령을 따르지만, 국가의 지시라고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는다. 아이히만은 행위의 결과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 주어진 명령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도구적 이성만 발휘했다. 저자가 보기에 아이히만이 범한 가장 심각한 죄는 바로 [생각하지 않은] 데 있다.
정의의 실천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
정의로운 삶은 우리에게 꼭 필요할까? 이 책을 통해 거듭 정의로운 인간을 요청하는 저자이지만, 정의로운 행동이 윤택한 삶을 누리는 데 유리한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실제 현실에선 부정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많고, 겉으로 내보이는 정의로운 행동 이면에는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결과를 기대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왜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역설한다. 한마디로 정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란 주장이다. 플라톤은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음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행복한 것처럼, 정의는 영혼을 건강하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해 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애마가가 말 타는 것을 즐기듯, 고귀함과 숭고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한다. 정의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발현할 때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저자는 한마디 덧붙인다. [정의란 인간이 야만의 존재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다.]
[정의론과 시민윤리]라는 대학 교양 강의에서 출발한 이 책은 일반인들이 삶 속에서 직면할 수 있는 중요한 윤리적 물음을 담고 있다. 다수의 생존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행위는 옳은가? 효와 국가의 의무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윤리적으로 허용 가능한 거짓말의 조건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는 자는 왜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없는가? 저자는 한국에 몰아닥친 샌델 열풍, 대학 강의실에 모인 수많은 학생들을 보며 우리 사회에 정의에 대한 지적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사회적 바람에 대한 작은 응답이다. 흥미로운 철학적 딜레마를 통해 정의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지적 즐거움은 물론, 윤리적 삶에 대한 고민도 함께 안겨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