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더 위대한 책이 되려면 다뤘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 로버트 실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무엇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가
이 책에서 에드먼드 펠프스는 무엇이 국가의 부를 만드는지, 그리고 그 번영의 원천이 왜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펠프스는 혁신의 문화, 근대적 가치의 추구가 번영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번영이란 단순히 경제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다수의 개인들이 도전하고 모험하며, 일로부터 만족을 얻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좋은 삶]을 영유하는 것이 바로 번영이다. 19세기에 출현한 근대 경제는 이전의 상업 자본주의와는 달리 개인의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와 제도를 정비했고, 따라서 전에 없는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번영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번영은 수십년에 걸쳐 약화되었다. 펠프스는 이것이 근대 경제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가치관이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적, 코포라티즘적 가치관의 부상으로 위협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절박한 과제는 근대적 가치관을, [자생적 혁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그것을 장려하는 문화와 제도가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중국의 리커창(李克强) 총리에게 영향을 미쳐 이른바 창커(創客, 혁신 창업자)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경제적 역동성을 잃고, 도약과 추락의 갈피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펠프스의 관점은 막대하고도 끝이 없는 영감을 준다.
목차
머리말
서론: 근대 경제의 등장
1부 근대 경제의 경험
1장 근대 경제 역동성의 기원
2장 근대 경제의 물질적 영향
3장 근대적 삶의 경험
4장 근대 경제의 형성 과정
2부 근대 경제에 대한 반발
5장 사회주의의 유혹
6장 제3의 길: 코포라티즘적 우파와 좌파
7장 경쟁 체제들의 목표 대비 성적표
8장 각국의 직무 만족도
3부 쇠락과 재건
9장 1960년대 이후 쇠퇴의 조짐들
10장 1960년대 이후의 쇠락을 이해하기
11장 좋은 삶: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주의자
12장 좋은 것과 정의로운 것
에필로그: 근대성 되찾기
모더니즘과 근대성의 연대기
참고 문헌
감사의 글
찾아보기
옮긴이의 말
저자
에드먼드 펠프스 (지은이), 이창근, 홍대운 (옮긴이)
출판사리뷰
대번영의 조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더 위대한 책이 되려면 다뤘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 로버트 실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2014년 [액시엄 비즈니스 북 어워드] 경제학 부문 금메달
2014년 『초이스』 선정 [탁월한 학술서]
2014년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선정 [올해의 책]
2013년 「파이낸셜 타임스」 선정 [올해의 경제학 도서]
무엇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가
『대번영의 조건』은 200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 에드먼드 펠프스의 최신작이다. 경제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이 책을 펠프스 만년의 역작으로, 대가의 통찰이 집약된 대담하고 위대한 책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새로운 고전의 탄생을 증언했다.
이 책에서 에드먼드 펠프스는 무엇이 국가의 부를 만드는지, 그리고 그 번영의 원천이 왜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펠프스는 혁신의 문화, 근대적 가치의 추구가 번영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번영이란 단순히 경제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다수의 개인들이 도전하고 모험하며, 일로부터 만족을 얻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좋은 삶]을 영유하는 것이 바로 번영이다. 19세기에 출현한 근대 경제는 이전의 상업 자본주의와는 달리 개인의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와 제도를 정비했고, 따라서 전에 없는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번영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번영은 수십년에 걸쳐 약화되었다. 펠프스는 이것이 근대 경제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가치관이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적, 코포라티즘적 가치관의 부상으로 위협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절박한 과제는 근대적 가치관을, [자생적 혁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그것을 장려하는 문화와 제도가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중국의 리커창(李克强) 총리에게 영향을 미쳐 이른바 창커(創客, 혁신 창업자)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경제적 역동성을 잃고, 도약과 추락의 갈피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펠프스의 관점은 막대하고도 끝이 없는 영감을 준다.
번영의 기원, 근대 경제란 무엇인가
이 책은 먼저 번영의 기원을 이른바 [근대 경제]에서 찾는다. 펠프스는 자본주의 대신 근대 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가 번영의 조건을 두루 갖춘 경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근대 경제]는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 경제]이다. 그러나 모든 자본주의 경제가 근대 경제는 아니며,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근대 경제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상업 자본주의에서 진화한 근대 경제는 19세 초부터 놀라운 번영을 구가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설명이 있었다.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에 따른 생산성 도약은 그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펠프스는 실증 지표를 통해 이 같은 설명이 사실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공정과 이론의 개선에 따른 생산성의 개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번영의 핵심 요인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펠프스는 번영의 원천이 평범한 개인들의 무수히 많은 작은 혁신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몇몇 탁월한 혁신이 아니라 비록 작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작은 혁신들이다. 대번영Mass Flourishing, 즉 대중 번영이란 오직 이 요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하다. 이를테면 이 책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실제로 경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음을 강조하고, 기층 대중으로부터 일어난 거대한 혁신의 파고, 즉 [자생적 혁신]이 경제에 역동성을 불어넣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근대 경제는 어떻게 [자생적 혁신]을 만들어 냈을까. 상업 자본주의 시대의 혁신은 몇몇 귀족과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는 국가를 부유하게 했지만 대중의 부에는 기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는 근대의 출발이었다.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로 명명한 이 시기에 개인의 성장과 참여를 강조하는 [근대적 가치관]이 점차 보편성을 확보했다. 참정권이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회사법 등의 상업 및 금융 제도가 경제 참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전과 모험, 혁신을 강조하는 [문화]가 힘을 얻었다. 근대는 개인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상에 나아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 일에 탁월했던 몇몇 국가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혁신이 잇달았고, 마침내 번영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근대 경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 주었을까. 사회 사상과 문학, 예술은 이 시기의 삶과 경험을 대체로 어둡게 그렸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상기해 보라. 아동과 여성까지 노동자로 끌어들여 쉴 새 없이 가동되던, 블레이크가 묘사한 [악마의 방앗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인상에는 오류가 있다. 펠프스는 이것이 근대 경제로 인한 폐헤라기보다는 근대의 출현에 따른 사회적 혼란에 대한 하나의 인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위고가 그린 것은 근대 경제가 작동하는 프랑스의 모습이 아니라 루이 필리프 왕정기의 반동적 사회상이었다. 펠프스에 따르면 비록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19세기의 지표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근대 경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민중들의 생활 수준은 분명히 개선되었다. 평균 임금이 상승했고 실업률과 빈곤, 불평등이 감소했다. 글래드스턴과 로버트 기펜은 의회 자료를 바탕으로 [거대한 물질적 진보의 혜택이 거의 대부분 빈곤층에게 돌아갔다]고 평했지만, 마르크스는 애써 이 사실을 무시했다.
실제로 근대 경제가 사람들에게 선사한 경험은 놀랍고 흥분되는 것이었다. 펠프스가 특히 강조한 것은 [일의 경험]이다. 전통적 경제에서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일은 근대 경제에서 좀 더 개인적인 만족에 기여한다. 적극적인 참여, 지적 만족과 이따금씩 생기는 발견의 기쁨과 보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전에는 없던 이런 경험이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켰고, 혁신 의지를 고양시켰다. 펠프스는 이러한 경험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정신을 그린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작품들을 거론한다. 이를 통해 근대 경제가 출현한 시기에 형성된 근대적 가치관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 준다.
대안인가 환상인가? 사회주의와 코포라티즘
근대 경제에는 마르크스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일종의 저항과 거부감도 존재했다. 근대 경제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제에 참여해서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다. 도전과 모험은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이므로, 누군가 막대한 보상을 얻는 동안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사람들은 소수 특권 계층의 오래된 부는 그 기원이 오랜 시간 속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새로운 부]가 싹트는 현상은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근대 경제는 때때로 극심한 불황을 겪었는데, 이에 따른 일자리와 임금 불안은 중대한 불만 중 하나였다. 이로부터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사회주의는 근대 경제에 대한 반발로서, 그리고 근대적 가치관에 대한 반발로서 [일의 권리]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옹호한다. 누구나 일을 할 권리가 있고, 동일한 일에 대해 동일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경제가 근대 경제와 마찬가지로 이윤 동기를 발견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며, 일을 게을리해도 일자리를 잃을 염려도 없다. 이런 경제가 역동성을 상실하고 정체된 것은 당연해 보였다. 사회주의는 또한 계획 경제를 옹호했다. 국가와 전문가 집단의 주도로 계획된 경제는 더 효율적이며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회비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설정할 수 없는 사회주의 경제는 애초에 계획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사회주의 전망은 상당히 밝았다.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사회주의는 선진국도 아니고, 근대화를 통해 선진국이 되는 과정에 있지도 않았던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초기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외로부터 다양한 발전된 수단들을 신속히 도입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기록했다. 누구도 차르의 복귀를 바라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계속해서 거부되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인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 보장의 측면에서도, 경제적 효율의 측면에서도 근대 경제는 언제나 사회주의를 압도했다.
펠프스에 따르면 근대 경제에 대한 좀 더 치명적인 반발은 코포라티즘이다. 근대 경제가 모험, 도전, 혁신 같은 근대적 가치를 옹호했다면, 코포라티즘은 안정, 조화, 질서, 연대 같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했다. 코포라티스들은 근대 경제가 무질서을 초래한다고 비판했으며, 따라서 경제에 [조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 행위자들, 즉 정부와 자본, 노동자 사이의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가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나 돈에 대한 욕망 같은 행태의 확산도 비판했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부추기는 사회 악이다. 그들에게 근대 경제는 또한 구질서와 사회적 계약의 파괴자였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보호, 장인에 대한 길드의 보호, 산업에 대한 특허의 보호 등은 약자에 대한 보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득권에 대한 보호였다. 그러나 근대 경제는 이런 사회적 계약을 제시하지 않았다. 코포라티즘은 이를 무질서와 폭력으로 보았으며, 이른바 [사회적 보호]로 불리는 새로운 계약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보조금으로부터 복지 부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 [사회적 보호] 개념은 이권과 피혜의 보호에까지 범위를 넓히게 되며, 궁극적으로 [피혜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최대한 [개입하는] 국가를 출현시킨다.
코포라티즘은 제3의 길로 보였다. 유럽 대륙에서 시작된 코포라티즘은 좋은 성적을 보였다. 이들은 근대 경제에 필적하는 성장률로 번영을 누렸다.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유럽의 코포라티즘을 근대 경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 실상 너무나 훌륭한 대안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펠프스는 여러 지표를 통해 코포라티즘 경제의 자생적 혁신이 지극히 부족했음을 확인하고, 이들이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근대 경제로부터 혁신의 결과를 손쉽게 수입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근대 경제의 선도적인 국가들, 즉 미국과 영국 등이 혁신의 동력을 잃고 성장을 멈추자 유럽 경제 역시 곧바로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제3의 길이 오랫동안 설명이 필요없는, 혹은 설명되지 않는 모범으로 제시된 것을 생각하면, 이 같은 펠프스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증거들은 명백히 납득할 만하다.
근대 경제의 쇠락, 번영의 상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다시 근대 경제를 이야기한다. 펠프스는 세계 경제를 선도한 근대 경제들이 1960년대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다. 펠프스는 근대 경제 내부의 역동성을 헤치는 구조적 문제들을 살펴본다. [기업 규모의 거대화]는 의사 결정 구조의 효율성을 저해함으로써 역동성을 훼손했다. [단기 성과주의]와 경영자 그룹에 대한 [과도한 보상]은 기업 경영의 장기적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는 뮤추얼 펀드와 은행의 투기 행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펠프스는 [돈의 문화]를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주식이나 투기를 통해 수십억씩 버는 사람들이 출현하면서 [돈에 대한 탐욕]은 이제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한다. 이러한 문화는 결코 혁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와 경제 사이의 유착]도 강조된다. 이제 국가는 시장 실패와 경제적 불공평을 교정하는 데 더 많이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대체로 더 큰 실패였다. 국가는 더 많은 규제로 불공평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는 신규 진입과 투자에만 악영향을 미쳤다. 특이하지만, 펠프스는 [특허]와 [저작권] 분야도 문제로 꼽고 있다. 어지럽게 뒤엉킨 특허는 빈번하는 소송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명백히 혁신에 방해가 되고 있다. 이제 혁신가들은 자신의 혁신에 대한 보상이 언제라도 특허 등의 소송으로 탈취당할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한다. 또한 국가의 과도한 [보호]도 문제로 꼽힌다. 무분별한 보조금은 물론이고, 과도한 복지 지출이 혁신에 쓰여야 할 자원을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펠프스에 따르면 쇠락의 좀 더 궁극적인 원인은 외부적인 것이다. 그는 미국 경제(즉, 한때 가장 선도적이었던 근대 경제)가 역동성을 잃어버린 주된 원인을 코포라티즘에서 찾고 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대변되던 미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코포라티즘이 강조하는 가치들이 도입됨으로써 힘을 잃었다. 펠프스는 전술한 구조적인 문제들 역시 근본적으로 코포라티즘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도 주장한다. 피혜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최대한 [개입하는 국가], 네오코포라티즘적 관리형 국가에 가까워진 미국은 이제 규제로서 기득권을 보호하고, 과도한 보조금과 사회 복지로 혁신 의지를 저해한다. 펠프스에게 미국 경제는 결코 더 이상 근대 경제에 가깝지 않다.
번영의 철학, [좋은 삶]과 [정의]
펠프스는 근대 경제의 우월성을 주로 경제적 성과 측면에서 검토하지만, 또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도 우월하다고 본다. 가치 판단을 위해 그가 내세운 기준은 두 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여러 사상가들이 논의해 온 [좋은 삶], 그리고 롤스가 『정의론』에서 피력한 [정의로운 경제]가 그것이다.
펠프스는 근대 경제가 실현한 번영하는 삶이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코포라티즘적 가치, 즉 안정과 조화, 협력과 질서를 강조하는 전통적 가치관은 분명 개인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펠프스가 강조했듯이 코포라티즘은 [일의 경험]을 핵심 가치로 보지 않으며 따라서 자생적 혁신과 번영하는 경제에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코포라티즘은 근대 경제가 강조한 개인의 자아실현과 부의 추구 같은 것을 근대의 대표적인 해악으로 규정해 억압하는데, 이는 명백히 혁신을 저해하고 번영을 어렵게 했다. 따라서 펠프스는 사람들이 각자의 최고선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근대 경제야말로 [좋은 삶]에 기여하는 진정으로 좋은 경제라고 결론짓는다.
펠프스는 근대 경제가 때로 불공정할 수 있으며 불평등과 박탈감을 조장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 경제가 더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공리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다수가 누리는 이익의 합이 소수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압도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펠프스는 롤스의 관점이 현대적 경제 정의의 기본이 된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기회와 분배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공평한 기회는 참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누군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 금융 부문에서 자본을 조달하며 최대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상태, 이런 것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여의 자유는 곧 참여하지 않을 자유와 동일하다. 근대 경제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거부하는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경제에 참여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관점은 곧바로 분배 문제로 이어진다. 실상 정의로운 경제를 규정하는 데 핵심은 [분배] 문제에 있다. 사회적 소득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펠프스는 다양한 논쟁들을 검토하는 한편으로 자신만의 원칙을 세운다. 그는 [좋은 삶], 즉 번영에 기여하는 분배가 곧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근대 경제가 번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해지는 분배는 정의롭다. 반면, 근대 경제의 번영을 저해한 코포라티즘적 분배는 불의로 규정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혁신의 대가로 주어진 이익에 중과세가 부과되는 것을 기본적으로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세가 혁신을 좀 더 권장할 수 있는 곳에 쓰인다면 정당할 수도 있으나, 기존의 혁신 의지를 저해할 수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또한, 최저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극단적인 양극화를 해소하는 분배는 더욱 많은 경제 참여자들이 [좋은 삶]의 조건을 갖추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정의로울 수 있다. 반면, 코포라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회 부조]의 확대는 매서운 비판을 받는다. 펠프스는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부를 분배하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도 정의롭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바다에서 서핑만 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자립해야 한다]는 롤스의 말처럼, 번영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제가 거둔 사회적 부에 아무 권리가 없다.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은 첫째, 혁신 활동에 쓰여야 할 역량을 좀먹고 둘째, 열악한 임금을 받는 경제 참여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분배의 몫을 탕진시키며 셋째, 따라서 혁신을 저해하는 것을 넘어서 경제 참여 인구를 이탈시키기까지 한다. 현재 미국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은 실업 상태로 사회 부조를 수령하는 것보다 좋지 않거나 기껏해야 별다를 바가 없다. 펠프스는 이것이 명백히 수많은 인구를 경제로부터 이탈시켜 역동성을 심대하게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복지가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 그러나 펠프스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복지가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펠프스에게 지금의 경제는 지극히 정의롭지 못하다.
모두에게 좋은 자본주의는 가능하다!
이 책은 근대 경제들의 번영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그것이 쇠락한 원인을 고찰한다. 펠프스는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작금의 경제가 처한 위기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다시 번영할 것인가? 이 책에 따르면 해답은 분명해 보인다. 혁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수가 지금의 경제가 처한 문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근대 경제, 즉 근대적 자본주의는 그것이 출현했을 때부터 줄곧 비판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과도적 체제라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코포라티스트들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그들의 체제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타의 체제들보다 언제나 우월했다. 경제적 성과 측면에서도, 개인의 성장을 장려하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측면에도 그러했다.
[이 책은 또 하나의 자본주의 예찬론이 아니다.] 펠프스는 자본주의가 최선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페혜는 그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를 대신할 경제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나 코포라티즘은 자본주의를 뛰어넘겠다고 공언했으나, 실상은 자본주의의 번영에 기댈 수 있을 때만 번영할 수 있었다. 반면 자본주의는 펠프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 체체로부터 심히 오염되었고 마침내 번영의 동력을 상실했다.
결론적으로 펠프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는 번영을 가져온다. 문제를 직시하고 핵심 가치를 되살릴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다시 번영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에게 좋은 자본주의는 가능하다. 이를 위해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정의로운 경제인지,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고민하는 일이 시급하고 절실하다. 표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 비범한 책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너무나도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추천사 & 리뷰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더 위대한 책이 되려면 다뤘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 로버트 실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펠프스는 거의 반세기 동안 경제학계를 선도해 온 학자이다. 이 책은 아마도 그가 내놓은 가장 통찰력 있고 대담하며 중요한 저작일 것이다. - 로런스 서머스,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좋은 삶]의 개념을 철학과 경제사상 차원에서 동시에 분석할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에드먼드 펠프스는 [근대 경제]를 분석한 이 역작을 통해 그 일을 해냈다. -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 비범한 책은 경제 체제와 혁신, 창의성의 관계를 흥미롭고 신선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 이안 골딘, 옥스퍼드 대학 마틴 스쿨 학장
세계 경제가 직면한 도전의 좀더 넓은 맥락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광범위하고 영감 넘치는 책에서 펠프스는, 현재의 문제들의 근원에 [역동성 고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목할 만한 책은 진실로 경제학의 핵심 문제, 즉 왜 어떤 경제는 번창하는데 다른 경제들은 그러지 못하는지를 고찰한다. - 디클런 조던, 런던 정경대
이 책은 호소력 있게 혁신의 문화를 논한다. …… 산업 시대의 경제적 약동과 베토벤, 베르디, 로댕 사이의 관련성을 밝히는 펠프스 덕분에 이 암울한 과학이 조금은 빛을 얻었다. - 에드워드 글레이저, 「월스트리트저널」
경제학자들과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대중 독자들 또한 호모이코노미쿠스에 대한 펠프스의 관점, 세련되고 때론 냉소적인 그 관점으로부터 얻게 될 막대한 지식을 즐기게 될 것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 탁월한 책에서, 펠프스는 개인의 진취성을 근대의 특성으로 규정한다. 그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떤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이들의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 마틴 울프, 「파이낸셜 타임스」
펠프스가 다루는 주제는 너무도 방대해서, 나이와 전공, 정치 성향에 무관하게 누구든 이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 새뮤얼 브리턴, 「파이낸셜 타임스」
대기업의 신경을 긁고, 좌파를 화나게 만들 위대한 책이다. - 다이애나 헌터, 「파이낸셜 타임스」
펠프스는 표준적인 경제학에서 유물론자들의 한계를 초월하는 책을 썼다. 이 책에 케인스 또한 경의를 표할 것이다. - 폴 데로사, 『어메리칸 인터레스트』
대단히 매력적이다. 광범위하고 심오하다. - 펠릭스 마틴, 『뉴스테이츠먼』
이 강렬한 책에서 에드먼드 펠프스는 좌파 우파 논쟁의 대립 구도를 무너뜨린다. 그는 우리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복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혁신과 성취의 폭을 제한하는 보수적인 태도와 뿌리 깊은 기득권의 방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필립 하워드, [커먼굿] 창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