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무미하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끌어내는 감정의 지평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가 모친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라는 〈한 여자〉를 써 내려간 작품 『한 여자』가 전문 번역가 정혜용 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한 여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10여 개월에 걸쳐 쓴, 자신의 어머니이자 한 시대를 살다 간 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과 회한의 무게에 짓눌리는 법 없이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며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그리는 수사학적 장치가 없음에도 감동이 한없이 지평을 넓혀 가는 신비롭고도, 전혀 색다른 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저자
아니 에르노 (지은이), 정혜용 (옮긴이)
출판사리뷰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 『한 여자』(69면)
작가는 어머니에 대해 쓰는 일은 자신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늘 그곳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르망디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그녀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의 열등함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새로 나온 노래와 책을 접하고 화장을 하고 연극, 영화를 보러 다니며 〈자신도 그들 못지않다〉는 자신감을 얻고자 했다. 또한 자신의 딸을 통해 배움에 대한 열망을 추구하고 딸에게 자신이 누리지 못한 모든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딸은 너무나 찬미하고 동경하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더는 자신의 모델이 될 수 없음을 느낀다. 그녀는 이제 많이 배운 사람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어머니가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부끄럽고, 그녀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싶지 않다. 한편 어머니는 점점 다른 세계로 멀어져 가는 딸에게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한없는 베풂으로 사랑을 얻으려 애쓴다. 둘 사이를 이어 주던 은밀한 교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남는 막연한 애정이 대신 자리한다.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후 그녀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자신이 아는 한 여자로서 그녀의 삶, 자신과 함께한 어머니로서 그녀의 삶을 기록하기로 한다. 어머니 사후 보름 만인 4월 20일경이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 기억의 분석을 보다 쉽게 해줄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자면, 아버지의 죽음과 남편과의 헤어짐이 그랬듯 어머니의 병과 죽음이 내 삶의 지나간 흐름 속으로 녹아들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 『한 여자』(18면)
전작 『남자의 자리』에서 〈단순하고 꾸밈없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던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에서 문학적인 것에 담긴 통념을 다시 한번 거부함으로써 〈자전〉을 새롭게 정의한 자신만의 독보적인 글쓰기를 확고히 한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 『한 여자』(110면)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해 모두의 이야기로 승화시킨다. 작가는 내밀한 이야기를 냉담하고 예리한 언어로 옮기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한 단순한 회고를 넘어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아간 〈한 여자〉를 역사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면서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어머니,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였던 어머니의 상실을 차근차근 복기한다. 이처럼 가장 감정적인 체험을 가장 담담한 문장으로 써 내려감으로써 이 작품은 더없이 정확한 거울로서 우리에게도 자신을 마찬가지로 선명하게 들여다보도록, 함께 삶을 사유하고 느끼도록 해준다.
역자의 말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고자 하는 글쓰기〉, 〈역사와 문학과 사회학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글쓰기〉(110면)라는 발언은 소위 〈문학적인 것〉에 담긴 통념들에 대한 명백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시적인 표현〉, 〈아름다운 표현〉, 요컨대 〈미사여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번역도 이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여인/여자/여성 가운데 일부러 가장 무미하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여자를 선택하는 식, 아울러 문장을 구성할 때 될 수 있으면 군더더기를 끊임없이 쳐내고, 뭔가를 덧붙여서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전략을 가능한 한 피해야만 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작가가 어머니의 일대기를 유장하게 서술하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집요하게 쌓아 나가며, 그저 보여 줄 뿐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에 부합하는 서술 전략을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 흐름을 툭툭 끊어 놓는, 때로는 길고 때로는 짧은 간격들이 자리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전략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완벽하게 갖춘 문장을 구사하지 않고 간단한 메모를 연상시키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크로키풍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특성 또한 번역에 최대한 반영했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작품에서 어머니를 가리키는 〈elle〉이라는 대명사의 번역 문제이다. 작가는 자신의 모친을 〈나의 어머니〉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심정적인 거리를 좁히지 않고서, 한 시대를 살다 간 중하층 계급의 전형적인 여자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한 여자Une Femme〉라는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듯 특정 사회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살다간 한 시대의, 한 계급의 전형이기도 한 것이다. ― 역자 정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