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스틸라이프』는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는 책으로,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 시대적으로는 고대에서 중세,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미술사와 자연사를 넘나들며, 고대 그리스 문학부터 대중소설까지, 라스코 동굴 벽화부터 피카소 그림까지 망라한다. 이 모든 것이 ‘정물’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지적 역량을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이 책은 정물이 표현되는 방식의 ‘벌거벗음’이나 명료한 표현 그 자체에서 오는 조용한 희망과 자신감, 그 말없음의 깊이를 보여 주고자 한 결과물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탁자 위에 놓인 사물들을 바라볼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
가이 대븐포트 (지은이), 박상미 (옮긴이)
출판사리뷰
인류의 문명과 공생해 온 정물
정물 혹은 그것들을 화폭으로 옮긴 정물화의 역사는 길다. 신석기 시대 동굴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17세기가 거론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무척이나 오래된 장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정물화는 미술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해 왔다. 꾸준히 그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풍경화, 역사화, 초상화 등에 비해 그 가치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거나 때로는 생명이 없는 대상을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정물은 영어로 still life, 프랑스어로는 nature morte로 직역하면 각각 ‘부동의 생물체’, ‘죽은 자연’ 정도로 해석된다) 단지 사물들의 임의적 나열이거나 그것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별 의미 없는 장르로 여겨진 탓도 있을 것이다.
정물화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들이 있다. 탁자 위에 놓인 풍성한 과일, 반짝거리는 유리잔, 빵과 와인, 파이프와 촛대 같은 물건들이다. 정물의 이미지는 각종 문헌에도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구약성경 아모스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여기에서 보다시피 풍성한 과일 광주리는 그 이면에 종말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탁자 위에 놓인 파이프는 르네상스 정물에서 “삶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메멘토 모리’를 상징하는 사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듯 인류의 문명과 공생해 온 정물은 “현재의 안녕이 미래의 재앙”일 수 있음을 일깨워 주는 “모든 아름다움에 내재된 비극에 관한 상징”으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정물을 탐색하다
『스틸라이프』는 이렇듯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 저자인 가이 대븐포트가 1982년 토론토대학에서 진행한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시대적으로는 고대에서 중세,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미술사와 자연사를 넘나들며, 고대 그리스 문학부터 대중소설까지, 라스코 동굴 벽화부터 피카소 그림까지 망라한다. 이 모든 것이 ‘정물’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지적 역량을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4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정물화는 대체로 소박한 이급 예술로 치부되었지만, 베토벤과 버르토크가 현악 4중주에서 그들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셰익스피어와 밀턴이 소네트라는 짧은 형식을 빌려 스케치를 해 나갔듯 그것은 화가들에게 “더 크고 야망 있는 회화”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과도 같은 장르였다. 소박하고 사소해 보일지언정, “그 표현 방식의 ‘벌거벗음’이나 소재의 명료한 표현에서 오는 조용한 희망과 자신감, 그 말없음의 깊이는 아주 깊어서 우리가 헤어릴 수 없을 정도”이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자 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탁자 위에 놓인 사물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저자 가이 대븐포트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고, 미국 현지에서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학계, 문화계 쪽에서는 매우 유명했고(존 업다이크, 코맥 매카시, 조이스 캐롤 오츠와 같은 작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천재들이 받은 상’이라 불리는 맥아더 펠로십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한 예로 자신의 수업 중에 비누가 등장하면, 하던 강의를 멈추고 갑자기 비누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 10분이 넘는 독백을 시작했다고 한다. 비누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영국의 왕과 왕비가 얼마나 가끔 목욕을 했는지, 수세기에 걸쳐 비누 성분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쭉 읊은 뒤에 다시 수업을 이어 간 식이다. 이러한 백과사전적 지식뿐 아니라 문학적 역량도 갖춰 『워싱턴포스트』의 문학평론가이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마이클 더다는 대븐포트를 두고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훌륭한 에세이스트다”라고 평한 바 있다.
책에는 정물화의 또 다른 예로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도 등장한다. 종종 정물과 풍경이 함께 있는 초현실주의 분위기를 풍기는 데 키리코의 회화 세계를 에니그마, 즉 수수께끼로 정의한 저자는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처럼 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 곁에 늘 있어 왔지만,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너무 익숙해 그 말없음의 깊이를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주변의 정물. 이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진실의 문이 열린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정물을 통해 과연 어떤 진실에 다가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