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진실은 이들이 모두
‘회화로 이룰 수 있는 것’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2013년 11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경매 사상 최고가로 낙찰됐고, 2018년 11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에 낙찰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개최한 호크니 전시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영국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고,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영국 화가들과 회화계를 다룬 책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이자 집필가인 마틴 게이퍼드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루어진 영국 회화의 발전과 흐름을 호크니,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 브리짓 라일리 등 세계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화가들을 중심으로 풀어낸 이 책은 ‘지금의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된 시기에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런던을 배경으로, 회화의 갈 길을 모색하고 성장한 과정을 들려준다. 게이퍼드는 그간 영국 미술계의 인물들을 꾸준히 인터뷰하고, 『다시,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내가, 그림이 되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등의 책을 집필해 왔는데, 이 책은 그의 작업들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다.
목차
머리말
1장 젊은 루시안 프로이트: 전쟁 시기 런던의 미술
2장 프랜시스 베이컨: 즉흥과 우연
3장 캠버웰의 유스턴 로드파
4장 덩어리 속의 정신: 버러 기술 전문학교
5장 장미를 든 소녀
6장 빈 공간으로 뛰어들기
7장 미술 속으로 들어간 삶: 1950년대 베이컨과 프로이트
8장 하나로 묶인 두 등반가
9장 무엇이 현대 가정을 색다르게 만들었는가
10장 행위의 무대
11장 1960년의 런던
12장 생각하는 미술가: 호크니와 그의 동시대인들
13장 사라진 고양이의 활짝 핀 웃음: 1960년대 베이컨과 프로이트
14장 미국과의 관계
15장 불가사의한 전통
16장 데이비드 호크니: 제복을 입지 않는 화가
17장 희미하게 빛나면서 사라지는
18장 행위의 부재
맺음말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석
참고 문헌
도판 출처
찾아보기
저자
마틴 게이퍼드
출판사리뷰
이 책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진실은 이들이 모두
‘회화로 이룰 수 있는 것’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런던이 파리, 뉴욕과 더불어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시기가 있었다. 이 책은 그 시기를 포함한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루어진 영국 회화의 발전과 흐름을 데이비드 호크니,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 프랑크 아우어바흐, 질리언 에이리스, 브리짓 라일리, 프랭크 볼링, 하워드 호지킨, R. B. 키타이 등 세계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화가들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는 당시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 변화에 직접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과의 방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들의 삶이 연결된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서 회화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색이 전혀 다른 상반된 교육자들의 수업을 들었고, 전통적인 서구 미술은 물론이고 피카소나 마티스 등 전 세대 대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잭슨 폴록 같은 동시대 화가의 작품도 의식했다.
이 시기의 화가들은 (그 역할을 사진에 넘겨준) 풍경이나 인물을 재현하는 그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새로운 물결이자 대세였던 추상화와 전통 회화인 구상화의 경계에서 자신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 속에서 그들은 변화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자신의 색을 찾아 갔다. 그렇게 그들은 “회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추구한 색깔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한결같은 열정으로 물감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민과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림만이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회화 세계를 창조해 냈다.
저자는 런던 소호의 보헤미안 지역을 배경으로 여러 일화와 작품 이야기들을 적절히 배치해 이야기를 풀어 간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정치적·문화적인 측면에서 영국사의 전환기였고,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있어 매력적인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의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된 시기라 볼 수 있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의 런던은 많은 미술가가 모여드는 예술계의 중심지였고, 런던의 화가들 또한 다른 예술 중심지였던 뉴욕·파리 미술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시기 주류 현대 미술의 전반적인 동향을 알 수 있다. 또한 미술과 다른 분야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 등 문화계 전반의 흐름을 볼 수 있다.
프로이트, 베이컨, 호크니 그리고 예술계를 뒤흔든 화가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1932년에 독일 나치를 피해 일가가 영국으로 건너왔다) 루시안 프로이트는 모두가 추상화의 물결에 흔들리고 있을 때 ‘사실’을 그림 속에 담아내려 했다. 그는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것을 그렸다(그는 “나는 내 작품이 정확한 것이 아닌, 사실을 담은 것처럼 보이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훗날 유럽 미술계에서 가장 뛰어난 전라 초상화가가 되었는데, 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사실을 추구하는 전통 회화의 맥을 이어 가면서도 왜 사진을 경계하거나 의식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사진은 결코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의 색’이 발산된다. 하지만 최고가 되기까지 그는 몇 십 년간 대중에게 잊힌 화가였고, 어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한때 물감으로 삼차원 입체 형태에 대한 감각을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물감이 “살처럼 작동”하게 하는, 단지 모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체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 시기에 베이컨의 자유로운 붓놀림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보다 ‘대담한’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베이컨은 ‘회화는 현실을 모방하지 않으면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물감의 배열을 찾기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관람객의 신경에 무언가를 ‘통렬하게’ 보는 감각을 되돌려 주길 바랐다. 그의 그림은 구상화지만 추상의 냄새가 나고, 이야기를 담으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베이컨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선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지만 물감에 대한 뛰어난 본능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감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리는 도중에 물감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효과들을 얻으려 했다. 그것은 이미지와 물감의 완벽한 결합으로, 물감을 머금은 붓질과 그 붓질이 나타내는 대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베이컨에게 성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물감과 조우하고 때로는 사투하던 베이컨은 최고의 작품만이 가치 있다고 여긴 탓에 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그의 애인이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 작품들은 그의 바람처럼 최고의 가치를 지녔고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현재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화가, 호크니의 말처럼 인간은 그림에 대한 깊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림은 우리가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 방식은 하나에 머물지 않고 쪼개져 나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그림을 보고 느끼는 방식도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어쩌면 자신의 방식을 구체화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호크니는 추상표현주의로 시작한 뒤 다양한 표현 양식을 작품에 적용했다. 처음에 그는 단어의 형태로 그림에 개인적인 요소를 추가했고 그 뒤로 인물과 오브제, 풍경을 더해 나갔다. 그 결과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꾸준히 확대되었다. 그는 가능한 거의 모든 매체와 양식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 왔다. 덕분에 그의 작품 세계는 누구보다 넓다(하지만 그만의 뚜렷한 색은 옅어지지 않았다). 호크니는 양식을 바꾸는 이유에 대해 이전에 했던 작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려 온 그는 모든 규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전통적인 규칙을 무너뜨린 회화 하면 추상화가 떠오를 것이다. 추상화가 대세가 되면서 추상화만이 미래의 답처럼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추상화는 무언가를 표현했는지 알 것 같은 추상화(실재하는 무언가로부터 추상화시킨 추상화)와 무엇을 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추상화로 나뉘는데, 질리언 에이리스는 그린 대상을 알 수 없는 추상화를 그렸다. 그녀의 작업 방식을 살펴보면 “페인트와 맥주를 전부 그림 그릴 벽면 전체를 향해 던지”고 조정, 추가, 삭제했다. 그녀는 이런 작업 방식이 “바로 직전의 것으로부터 이어져 나가는 시의 행이나 음악의 마디가 발전, 변화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녀도 지질학적 특징과 대기 현상을 그린 연작이 있는데, 「적운」, 「비구름」 같은 제목이 달려 있지만 그 그림이 그런 것을 그렸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것이다).
이 외에도 연기자, 화가, 사회평론가를 결합한 여태껏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예술가가 될 수 있었지만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폴린 보티, 예술가에게 작품의 저작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브리짓 법안’이라 불렸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와 매체에서 작품을 도용당한 브리짓 라일리, 예술에 언어적인 논평을 부여하고자 했던 R. B. 키타이 등 개성 있는 예술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화가들의 노력이 만든 결실로 1970년대 중반엔 더 이상 추상만을 필연적인 미래로 보지 않았고 그저 그림 그리는 유형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미술가가 더 이상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말하지 못했고, 어떤 비평가나 큐레이터도 회화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못했다. 또한 ‘추상’과 ‘구상’의 경계가 훨씬 더 유연해졌고, 현대 미술이라는 넓은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몇 십 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변화였다. 어느 시대나 이단자들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 책의 이단자들 역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