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해외특파원 25년 경력의 기자가 쓴 베트남전에 대한 해부서. 얼굴없는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베트남전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시작과 끝을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한편의 소설처럼 스피디하게 읽히며 중간 중간 흑백사진이 실려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베트남은 멀리 있지만 베트남전의 여파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미국 군사서적클럽과 문학협회에서 필독 도서로 선정한 책.
목차
역자의 말 ... 6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하여 ... 11
감사의 말 ... 13
서문 ... 15
1 첫번째 전환 ... 19
2 프랑스의 점령 ... 51
3 디엔비엔푸 ... 73
4 초기의 희망 ... 99
5 암살 ... 131
6 결단의 시기 ... 155
7 홍당무와 채찍 ... 185
8 타운트 다운 ... 203
9 어려운 동맹 관계 ... 235
10 웨스티의전쟁 ... 271
11 미로 ... 311
12 포위 ... 335
13 구정 공세 ... 359
14 전선은 미국으로 ... 393
15 게릴라 사회 ... 423
16 촌락의 전쟁 ... 453
17 절규하는 병사들 ... 473
18 4년의 기다림 ... 505
19 가자, 사이공으로! ... 559
20 항복 ... 591
저자후기 ... 615
참고문헌 ... 620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
출판사리뷰
끝나지 않은 전쟁, 베트남전쟁의 실체를 파헤친 책!
20세기 후반부를 수놓았던 전쟁,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었던 전쟁,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전쟁, 프랑스와 미국이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 처음에는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의 시작은 1945년 4월이었고, 끝은 1975년 4월 30일이었다. 얼굴 없는 전쟁, 신비스러운 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은 때로는 왜곡되기도, 때로는 묻혀 버리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베트남 30년 전쟁을 새롭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중동분쟁, 보스니아내전,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는 21세기의 향방을 가늠해 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호치민과 패티 소령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이 펼쳐지던 1945년 4월 어느 날,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윈난 성 근처의 시골 찻집에서 그저 ‘장군’이라고만 부르던 50대 중반의 게릴라 지도자와 미군 OSS 대원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만난다.
30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의 패전, 베트남의 독립, 프랑스의 재점령이 이어지면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민주의는 문명의 수치다’라고 생각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원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젖줄이라고 여겼던 영국의 처칠과 프랑스의 드골이 루스벨트의 발목을 잡았다.
베트남은 다시 투쟁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5월, 전쟁의 달인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 병사들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공수부대 진지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백기는 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항한다. 대포의 포신에 줄을 매서 허리에 묶고 하루에 반 마일씩 정글 속을 끌고 간 베트민 병사들과 물자 수송용 자전거의 펑크를 막기 위해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타이어를 감싸는 바람에 팬티밖에 입을 수 없었던 노력 봉사자들의 의지가 베트남이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끊은 원동력이었다.
고 딘 디엠과 군부의 부패
프랑스가 물러간 자리에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에 빠져 있던 미군의 깃발이 세워졌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을 베트남 문제 해결의 정답으로 인식하고, 고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고 딘 디엠은 족벌정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CIA가 지원한 남베트남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정의 부패와 초점 잃은 미국의 정책은 베트남 인민들의 마음을 북베트남에게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은 5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10%에 불과했고, 병사들의 평균 연령도 18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년마다 교체되는 복무 기간으로는 강철같은 의지로 무장한 북베트남 게릴라들과 대적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국방장관을 지냈던 클라크 클리퍼드는 이런 대목을 꼬집어 ‘미국은 정책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고 평했다.
호치민의 타계
1969년 9월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죽음에 앞서 11명의 정치국원들에게 ‘단결하라’는 한마디 유언을 남겼다. 단결만 하면 통일은 기필코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하 30피트에서 7만 명이 3년 반을 견디어 낸 인내심, 밥 한 공기를 먹고 험악한 ‘호치민루트’를 하룻밤에 50km씩 행군했던 북베트남 병사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오직 독립이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안 했다는 청렴 강직한 ‘호 아저씨’가 만들어 낸 신화의 실체였다.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식민주의의 잔인한 행태를 젊어서 수없이 목격한 호치민이 당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어조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베트남을 건설하는 데는 맞지 않는 이데올로기’라고 고백했었다. 식민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욕심이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미국을 흔들어 댔을 뿐이다.
베트남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
파병 인원이 늘어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거세게 일어난다. 그러자 1972년 12월 평화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은 크리스마스 대공습을 감행한다. 이 공습으로 하노이와 하이퐁은 초토화가 되었고, 외국 언론들은 ‘인륜의 파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잠정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지자,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 둑 토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된다. 그러나 레 둑 토는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수상을 거부했다. 키신저 같은 협잡꾼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보는 30년 전쟁
디엔비엔푸 전사였던 UN 주재 초대 베트남 대사 ‘하 반 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점령 시절 같은 형무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깨를 맞대고 싸웠지요. 자주독립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30년 전쟁 동안 약 1천 5백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아마 각 가정마다 최소 한 사람씩은 희생되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온 뉴욕 서민 집안 출신인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30년이 지난 뒤 플로리다에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트남은 미국의 얼굴에 남겨진 화농化膿 자국이다. 미국의 정가는 자본주의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이런 생각은 잘되어야 미국의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