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20세기를 전후한 문화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국내외 거장 아티스트의 평전으로 구성된다. 2018년부터 다시 출간되는 본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주인공은 미국의 전설적인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다.
페기 구겐하임은 독일계 유대인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여 미술의 중심 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그 자신이 재능 있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예술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수많은 예술가를 물심양면 지원하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잭슨 폴록을 비롯해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수많은 작가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까지, 페기 구겐하임을 함께 거론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 평전은 예술 애호가로서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한 쾌락주의자의 면모까지, 페기 구겐하임의 다채롭고도 드라마틱한 삶을 펼쳐 보여 준다.
목차
추천의 글
서문
1. 숙명, 가문
2. 미국을 떠나다
3. 보헤미안의 왕
4. 상속녀와 아나키스트
5. 본조 부부
6. 끝나는 것들과 시작되는 것들
7. 마흔 살, 돌파구
8. 새로운 인생
9. 구겐하임 죈
10. 전쟁의 기운
11. 소장품의 시작
12. 금세기 예술 갤러리
13. “예술이 장미꽃 옷을 입을 때”
14. 폴록 그리고 페긴
15. 금세기를 벗어나며
16. 전설이 되다
17. 베네치아의 영광
18. 예술 중독자의 고백
19. 마지막 날들
옮긴이의 글
‘금세기 예술 갤러리’ 작품 목록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메리 V. 디어본 지음, 최일성 옮김
출판사리뷰
여성 컬렉터로서 페기 구겐하임의 진면모를 재조명하다
2022년 9월, 세계 3대 아트 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가 아시아 시장 처음으로 서울을 찾아 화제였다. 국내 미술 시장의 호황이 절정에 달했음을 증명한 이벤트답게, 전시장에는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몰렸고 매출 역시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피카소, 샤갈, 알렉산더 콜더 등 거장의 작품이 등장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동안, 소위 ‘큰손’으로 불리는 컬렉터들은 조용히 인파 사이를 누비며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작가를 판별해 자신만의 소장품 목록을 늘려 나갔을 것이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의 주인공이자 피카소, 샤갈, 콜더가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기 전 이미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찌감치 작품을 수집한 페기 구겐하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책은 20세기 현대 미술의 대표적인 여성 컬렉터로 이름을 아로새긴 페기 구겐하임의 일생을 다룬 전기다. 2006년 초판 출간 이후 절판되었다가, 16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개정판이다. 2006년 출간 당시 커리어적인 면보다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는 돈 많은 상속녀에 관심의 방점이 찍혔다면, 지금이야말로 페기가 ‘여성 컬렉터’, ‘여성 사업가’로서 예술에 쏟은 열정, 예술과 예술가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를 재조명할 적기일 것이다.
이번 개정판에는 평소 미술과 미식에 대해 글을 써 왔던 에디터 출신 안동선 칼럼니스트가 ‘추천의 글’을 썼으며, 이 글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페기의 숨결이 남아 있는 베네치아 구겐하임 컬렉션의 향취를 전해 주고 있다.
동시대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행보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19세기 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큰 부를 일군 독일계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이자 동시에 뉴욕을 상징하는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한 솔로몬 R. 구겐하임이 바로 페기의 큰아버지다. 페기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당시 부르주아적 전통에 따라 현모양처로 한평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으나, 자신이 가 보지 않은 길로 인생의 행로를 택하는 모험을 한다. 그렇게 해서 런던에 ‘구겐하임 죈’이라는 갤러리를 운영하며 칸딘스키, 브랑쿠시, 무어, 콜더를 비롯한 많은 작가의 조각품을 전시하고, 전시회를 할 때마다 최소한 하나의 작품을 매입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뉴욕에 문을 연 페기의 두 번째 갤러리인 금세기 예술 갤러리 역시 수많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에 귀족적이고 확고한 위치에 있던 마리 해리먼이라는 여인을 제외하면 페기가 뉴욕에 갤러리를 소유한 유일한 여자였으며, 건축가 프레더릭 키슬러를 고용해 예술가와 관객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콘셉트의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런 행보는 동시대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며, 이러한 점을 인정한 마르셀 뒤샹은 페기에게 여성 화가들의 작품만으로 전시를 꾸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녀는 알려지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화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실험을 했다. 세기의 이름 잭슨 폴록은 이렇게 탄생했다. 페기 구겐하임은 폴록이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초창기의 작품에서도 그의 천재성을 간파해 내 거기에 자신의 명성을 걸었던 것이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그녀와 그녀의 갤러리가 이룩한 변화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인간적인 견지에서 예술을 관람케 하며, 미술관에 갇혀 있는 유미주의에서 탈피하는 것. 페기 구겐하임은 한낱 운 좋은 상속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패와 실험을 거듭하며 한 땀 한 땀 자신만의 인생 지도를 만들어 간 인물이었다.
과감한 결단이 바꾸어 놓은 예술 풍경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이 전기에서 저자 디어본은 성실하고 자세한 조사를 바탕으로 페기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페기가 주변 사람들과 나눈 서신, 갤러리 운영 당시 언론 보도 등을 인용하며 페기의 사생활과 공적인 일들을 균형감 있게 전하려 애쓴다. 일례로 페기의 회고록인 『금세기를 벗어나며』에 대한 페기 주변인들의 평(대체로 도덕적이지 못하고 퇴폐적이라는)을 두고는 낡아빠진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페기는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고, 자서전을 통해 이를 솔직히 고백하는 데 떳떳했다. 저자는 유독 여자만 도마 위에 올려지는 상황을 문제 삼으며 책 곳곳에서 페기의 절친한 친구였던 오노 요코를 소환한다. 그렇게 해서 “마녀같이 보이고” “천박하고 퇴폐적인” 페기는 오노 요코의 입을 통해 “허심탄회하면서 지성적이고 요즈음 말로 ‘힙한’ 여자”로 탈바꿈한다. “많은 남성 화가들이 자기들의 성공한 인생에서 그녀의 역할을 인정하기 꺼린다”는 오노 요코의 지적과, “여자였기에, 더욱이 퇴폐적이라고 매도된 삶이었기에 폴록의 이름 옆에 당당히 오르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히틀러가 노르웨이로 진군한 날 페르낭 레제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그림을 구입하고, 사비를 들여 전쟁의 한복판에서 예술가들을 피난시켰던 한 여인의 과감한 결단들이 지금의 예술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다시금 페기 구겐하임을 읽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