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결정적 순간’의 대명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삶과 시선을 만나다
을유문화사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20세기를 전후한 문화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국내외 예술가들의 평전으로 구성된다. 2018년부터 다시 출간되는 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포토저널리즘의 언어를 창조하고,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이 책은 비평가이자 전기 작가인 피에르 아술린이 카르티에 브레송과 맺은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그에게서 건네받은 수많은 자료와 5년에 걸쳐 나눈 대화, 그리고 전화, 편지, 엽서, 팩스로 주고받은 내용을 토대로 완성한 생생하면서도 구체적인 기록이다.
목차
추천의 글 / 영웅과 친구가 될 때
1 실 공장 집 아들, 1908~1927
2 결정적 순간들, 1927~1931
3 도구를 찾아 나선 예술가, 1932~1935
4 이전 세계의 종말, 1936~1939
5 국적: 탈주자, 1939~1946
6 뉴욕에서 뉴델리까지, 1946~1950
7 세계가 그의 스튜디오다, 1950~1970
8 또 다른 삶을 향해서, 1970~
후기 - 세기의 눈이 세기와 더불어 눈을 감다
출처와 참고 자료 / 사진 출처 / 옮긴이의 글 / 찾아보기
저자
피에르 아술린 (지은이), 정재곤 (옮긴이)
출판사리뷰
단 하나의 순간을 위해 24시간을 기다리던,
카메라 뒤에 감춰진 대가의 진짜 모습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습도 그의 시선을 거치고 나면 시적인 순간이 된다.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남자의 모습도, 양손에 포도주 병을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도, 안개 자욱한 다리 위에서 파이프를 입에 문 사르트르나 고독한 자코메티의 모습도 그의 뷰파인더에 포착되는 순간, 예술이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20세기 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단순히 주변 풍경이나 일상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역사적인 현장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사진을 통해 시대를 증언하는 임무를 떠안았다. 스페인 내전과 조지 6세의 대관식, 해방된 파리, 폐허가 된 독일, 간디의 장례식, 중국의 내전 현장 등을 담은 그의 사진은 20세기의 역사 그 자체다.
살아생전에 카르티에 브레송은 명성만큼이나 많은 오해에 둘러싸인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그는 ‘우연의 혜택을 누린 사진작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연은 평생토록 우연 앞에서 경이로움을 잃지 않았던 사람에게 좀 더 관대”하며,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사람에게 유독 미소를 짓는” 법이라고. 저자는 누군가가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려고 카르티에 브레송이 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24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다』는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 무엇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친구’였던 저자 피에르 아술린이 카메라 뒤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대가의 진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촘촘히 완성해 나간 저작이다. 생전 자기 사진이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했고 미디어에의 노출도 최소화했던 이 예술가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그가 저자에게 사진을 포함해 자신의 아카이브를 모두 공개하고 내어 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평생에 걸쳐 분야를 막론하고 시각적 환희를 추구했던 예술가,
기하학과 휴머니즘의 경이로운 조합으로 만들어 낸 예술적 감동
저자 아술린은 전기 작가답게 카르티에 브레송의 일대기를 다룬다. 눈여겨볼 점은 사진가였던 그의 처음(유년 시절)과 끝(말년)이 그림(데생, 회화)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작품에서 ‘예술’을 감지해 내는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명한 [마른 강가에서Sur les Bords de la Marne]와 같은 사진에서 우리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Dejeuner sur l’Herbe]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시테섬Ile de la Cite]과 같은 풍경 사진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사진작가로서의 경력에 정점을 찍었던 시기에 돌연 사진을 그만두고 데생에 천착하기로 한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심은 그를 동경하고 그의 뒤를 좇은 수많은 후배 작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이는 필연적인 귀결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그가 영화에도 한때 몸담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장 르누아르 같은 영화감독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실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사진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카르티에 브레송은 평생 시각적 기쁨을 추구한 예술가였다. 그중에서도 ‘기하학적인 시각’을 빼놓고는 그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의 사진 전반이 그렇지만, 특히 미술사가인 언스트 곰브리치의 명저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 사진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실린 [아브루치의 아킬라Aquila degli Abruzzi]를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구성과 기하학적인 우아함이 완벽한 조합을 이룸으로써 예술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저자 아술린은 카르티에 브레송이 자서전을 쓴다면 채택할 만한 제목으로 ‘삶’이라는 단어를 꼽았다. 그가 사진의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데에는 시각적 안목이 크게 작용했지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휴머니즘적 시각도 그만의 예술을 한층 더 농밀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회의 참모습을 찍으려 늘 주변부로 눈을 돌렸다. 수많은 매체가 윈스터 처칠 경의 장례식을 취재하던 현장에서, 우리는 카르티에 브레송이 아니었다면 그곳에 “「타임스Times」”를 외쳐 대며 신문을 파는 판매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여덟 장이 새롭게 수록된 개정판 침묵으로 모든 것을 웅변했던 사진가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전기
이번 개정판에는 정진국 사진 평론가의 추천의 글이 더해져 본문을 읽기에 앞서 사진과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 아술린의 이 책은 그동안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정작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진이 도판으로 실리지 않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이번 한국어판 개정판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여덟 장의 사진이 책 앞부분에 실렸다. 본문에 언급된 사진이 주를 이루는, 매그넘 측으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원본 파일의 사진에서, 카르티에 브레송 특유의 사인처럼 인식되는 검은 테두리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에 대해서 말을 아꼈던 사람이다. 텔레비전에도 거의 출연하지 않았고, 인터뷰에서 너무 많은 증거를 대다 보면 결국 진실이 죽어 버린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결국 사진들만이 우리 앞에 남았다. 우리는 이 대가가 남긴 사진과 그가 사진에 대해 취했던 태도, 지나가면서 했던 말 들을 토대로 그의 예술관을 짐작할 따름이다. 이 전기가 중요성을 띄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정진국 평론가의 표현대로 저자는 “거장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모든 풍경에서 풀 한 포기 바위 한 덩어리 놓치지 않으려고 샅샅이 훑었다.”
2004년, 거장의 장례식에 참석한 저자는 생전 카르티에 브레송이 남긴 말이 적힌 일종의 명함을 한 장 받는다. 거기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 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다.” 마찬가지로 아술린의 이 전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주지 않을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카르티에 브레송이 살았던 순간을 영원히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