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출항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묘파한 삶의 풍경을 독특한 시간성으로 배치해 경이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소월시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1), 대산문학상(2005), 목월문학상(2014)을 수상한 바 있는 김명인의 열세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직전의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으로 그동안 발표한 55편의 신작 시를 묶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죽변도서관
차견借見
구름척후
흰동백
살구
달의 이행
봤어?
지상의 꽃
밥 한 끼
튤립
2부
꽃잠
서해
엄벙덤벙
유령거미의 시간
초점의 값
이모들
코끼리와 호리병
느리게 가는 시
저녁의 둘레
복안
언니
담소화락談笑和樂
달의 미늘
종점
고비
3부
들림 노래
정류장 못 미쳐 술도가 있다
짙푸른 슬픔이 사는 곳
오징어 게임
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문경
이 구역과 저 별무리가 한통속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느 영원에서 다시 만날까?
정든 땅 언덕 위
겨울 오이도
포항
정말 비가 내렸을까?
혹서기
산통算筒을 깨다
비운다는 것
모과 혹은 모란
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
4부
노래라고 누가 일깨웠을까
바람무릎도리
동백 현관
헌 집 새집
날개 달린 냄새를 따라나선 적 있다 해도
입동
경청
금어기
조치원
허리에 헛도는 전대처럼
곡두
봄날의 내력을 더듬어간 소설도 잊히겠지
목관
옥수수 시간
해설
무한과 중심, 지상의 표징으로 읽기ㆍ오형엽
저자
김명인 (지은이)
출판사리뷰
“말문조차 닫게 하는 우주의 황홀이
오늘 밤은 한층 가까이 있다”
유장한 연속성과 파란만장한 굴절성을 동반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시적 결정체
‘허무의 심연’을 탐사하는 끈질긴 모험 정신, 김명인 열세번째 시집 출간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출항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묘파한 삶의 풍경을 독특한 시간성으로 배치해 경이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소월시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1), 대산문학상(2005), 목월문학상(2014)을 수상한 바 있는 김명인의 열세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직전의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으로 그동안 발표한 55편의 신작 시를 묶었다.
언어의 의미 극대화를 통한 세계와의 관계성 탐구(김치수), 현실과 불화한 존재들이 풍경에 휘말려 들어간 치열한 여정(정과리), 관조와 탐색으로 쌓아 올린 한국 시의 경이(이숭원), 고통스러운 내면의 어둠을 태운 불꽃의 상상력(오생근) 등으로 일컬어진 김명인의 시 세계는 반세기의 시력을 이어온 그가 오랜 시간 집중한 시적 토대인 ‘바다’와 ‘길’ ‘시간’이 얼크러져 오늘날 새로운 유속으로 흐른다.
“김명인의 시는 시적 형식과 내용의 양 측면에서 유장한 연속성과 파란만장한 굴절성을 동반하면서 50년의 시간을 흘러왔다. [……] 이번 시집에서 김명인 시의 미학적 특이성은 ‘회상’의 구조화 원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오형엽). 김명인의 시는 회상의 힘에 기대어 생의 지난한 시절을 그물로 엮어 지상의 빛 속으로 끌어 올린다. 시절의 풍상과 허기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원동이 되어 시인의 언어는 깊은 늪을 박차고 우주를 활보한다. 시를 장악한 끈질긴 모험 정신은 쓸쓸한 풍경 너머 시적 체험이 풍요로운 대지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다”의 “비장의 어둠”을 독해하려는 끝없는 시도는 김명인이 필생의 과업으로서 “어둠”이라는 ‘허무의 심연’을 유랑하며 탐사하는 모험을 통해 그 비밀을 읽어내려는 ‘형이상학적 질문’의 시적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형엽, 해설 「무한과 중심, 지상의 표징으로 읽기」에서
가없이 일렁이다 지워지고 비워지는
어슴푸레한 둘레의 시간
임종 무렵의 어머니는
지워지는 둘레에 골똘한가 보았다
눈가 묽어지는 저물 무렵
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반짝이는 석양을 켜 들곤 했으니
회상으로 떠올리면
첫눈 맞는 갈참나무숲이
한참이나 산자락을 잡아두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땅거미
물고 오는 오늘의 어스름 속
희끗희끗 섞이는 눈발,
눈 감아 선연한 회상이라 해도
이내 깜깜해질 저런 풍경을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담아 가려 하셨을까?
─「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전문
김명인의 시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둘레”는 사전적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삶의 흔적이 담긴 근방의 물리적 터전을 가리키는 동시에 의식의 바탕에 그어진 저지선이다. “임종 무렵의 어머니는/지워지는 둘레에 골똘하고”(「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배석을 허락받아야 가담하는 둘레”(「저녁의 둘레」)와 “가라앉을 듯 가라앉은 듯 어둑한 둘레”(「유령거미의 시간)이 있으며, “누군가의 구름은 둘레가 가려지길 기다”(「달의 이행」)린다. 「짙푸른 슬픔이 사는 곳」에서 “뭘 풀칠하는 줄도 모르는/이웃과 친족의 둘레”는 없는 살림에 작은 도움이 아쉬운 모자母子로 하여금 외가댁으로 향하는 외출을 끌어내지만 길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일시에 가시로 곤두”서 깊고 날카로운 슬픔인 접시꽃 군락이다.
화자는 둘레를 따라 과거를 회상하며 장면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고 현재의 질문을 무심히 던져 넣는다. 마치 수묵화에서, 종이에 한 점의 먹을 떨어뜨려 번지게 하는 발묵潑墨 기법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독특한 시적 태도는 세월의 축적을 고스란히 전하면서 경험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형상을 시 바깥의 독자로 하여금 화자와 동시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이건 비유를 머금는 것이지만 형상을 잃기까지/사물들은 얼마나 오래 인내하는 것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시간은 둘러선 구경꾼” 같고 인간의 생은 스스로 일군 역사를 돌파하며 “용도를 다한”(「목관」)다. 감히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간직한 채.
기다리는 사람아, 무릇 진앙은
쓸개로 치면 몸이 간직하는 것,
미답의 모서리에 떨어진
운석이 식으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는 가혹한 한때를 지나가야 하니
견디리라, 맹하의 뱀들이 울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손 디밀면
손등 가득
독니로 새긴 핏발들이 묻어난다
─「혹서기」 부분
현실에서 맞닥뜨린 나와 다른 존재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에너지로 팽창하는 풍경 들을 일정한 거리를 갖고 술회하는 김명인의 시는 강인한 어조를 유지하면서도 시시각각 정신의 물꼬를 트는 언어적 실험을 이어나가며 예상 밖의 시공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회상을 통한 감각이 단순한 회한이나 쓸쓸한 정조에 머물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물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오랜 고투와 담금질에도 식을 줄 모르는 의지가 시의 저변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믿음 안에서, 믿음 밖으로” 흐르는 생의 참혹으로 읽히는 “혹독한 여름”을 견디며, 신체에 새겨진 “핏발들”(「혹서기」)을 세워 “천만리 저쪽까지 생생한” “기억에도 없는 혈흔”(「구름척후」)을 이곳에서 쓴다.
고래 같은 생의 지느러미를 잡고
수평선을 그리는 구도자의 기록
말을 조직하고 완결하는 시의 힘,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지만 결코 완성으로 이끌리지 못한다. 그 불완전함 탓에 질서를 새롭게 마련하려는 수많은 고투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시의 끈질긴 내력은 실패로 이어져 오래인 것이다.―뒤표지 시인의 산문에서
혼혈아, 미군, 양공주가 일상의 이웃으로 거리를 메운 동두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까지, 고통으로 얼룩진 시절의 한 자락을 그린 첫 시집 『동두천東豆川』(1979) 의 「동두천東豆川」과 「영동행각嶺東行脚」 연작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상처, 바닷사람들의 고단한 속살을 생생하게 보여준 바 있다. 거대한 힘으로 밀려드는 운명의 파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이곳저곳 흘러간 유랑자로서 시인의 정체성은 일찍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향에 자리 잡은 ‘바다’는 시인의 오랜 주제이자 시적 자아의 원천이다. 화자가 생래적인 결핍으로 먼 곳으로의 도피를 꿈꿀 때, 눈앞의 바다는 매 시편에서 생명이 펄떡거리는 자연 그 자체이면서 존재의 탄생과 소멸을 건드리는 영혼의 물결로 작용해왔다. “파도는 일생일대를 제자리에 돌려놓잖아!”(「봤어?」)의 일갈이나 “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때로는 일대가 뒤집히기도 하니/소용돌이를 잠재운 바다에겐/넓이만 아득한 게 아니”(「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라는 대목에서 보듯 삶의 은유로서 바다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함부로 거스르려는 인간의 투쟁을 한없이 작은 것으로, 파편적인 것으로, 낮은 자리에 내려놓는다. 화자는 “같잖은 주장이나 웅얼거리는/고집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환멸 이하인 것,”을 알고 있으며 복잡다단한 세파를 비집고 끊임없이 ‘나’를 갱신하며 “닿고 보니 지척인 곳을/멀리도 돌아서 나는 왔다”(「모과 혹은 모란」)고 말한다. 잊거나 애써 회피한 존재의 실체를 담대하게 마주한 끝에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생의 속성을 이해했으되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는 이 기나긴 여정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오형엽의 말처럼 “‘풍경을 주시하는 시선이 신체적 이행으로 전이됨’이 기법적 층위에서 김명인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형성한다면, ‘존재론적 질문과 해석’이 주제적 층위에서 김명인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시인은 소용돌이치는 생에 휩쓸린 얼굴 없는 영혼에 존재의 자발적인 증거로서 표정을 부여한다.
시대의 풍경을 껴안고 무수한 물음으로
고쳐 쓰는 일생일대의 순간
이 낭송은 세월로 가거나
미궁으로 가라앉겠지만
지워지기만 하는 복사를
마침내 접어야 할 저녁이 온다
늦게 도착한 짐짝일수록 귀중한 것들로 꾸려진다
다정한 마음으로 네 환심을 사서
노을 앞에 활짝 펴고 싶다
발설할 수 있을까, 지나가므로 환각인
저녁의 둘레를!
─「저녁의 둘레」 부분
김명인의 시는 여전한 뜨거움으로, 칼날 같은 의지로 현상의 일단을 싹둑 갈라 질문한다. 그의 시에서 대상은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라 수시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신체이며, 쓸쓸한 적막을 가로지르는 움직임으로 다가온다. “하오의 적막 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었냐고?/햇살만큼 벌어진 틈새가 있을까,/묻는 것이 필생인/설된 시 말고 무슨 파장을 덧입힐까”(「느리게 가는 시」). 그의 시는 자연법칙의 위대함 속에서 초월적 자유를 획득한다. 오랜 인내의 결과로, 시대와 개인의 역사에서 비롯된 상처의 산발적인 통증을 문학적 진동으로 승화해 세계의 비밀을 읽어나간다.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수많은 존재를 향한 애틋함과 너그러움은 그의 시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다. 『파문』(2005)에 실렸던 「찰옥수수」는 「옥수수 시간」으로 이어져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평해 장터의 노파와 처녀애들 사이에 놓여 있던 옥수수는 시간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사의 쇠락을 떠올리게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너른 귀를 열어 경청의 들판을 듣는”,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는 알알”(「옥수수 시간」)으로 가치를 지닌 ‘성숙의 시간’을 가리키며 내면의 겸허함을 일깨운다.
거듭나는 결단으로, 그치지 않는 질문으로 진리와 호흡하며 고통의 이면에서 서서히 아름다움을 키워나간 김명인의 시 세계는 한국 시단에 아로새겨진 커다란 족적이다. 살아 있는 한, 허무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한순간도 달의 몰락을 상상하지 않았으므로” “누리의 달도 저무는 달도/지상의 표징으로만 읽어낼 뿐”(「달의 이행)이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 오늘날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시인의 궁리는 각각의 작품을 통과하면서 겪어내는 변신에의 꿈이 저의 저작咀嚼으로 오롯하길 소망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작에도 한결같기를 바란다. 그러나 말을 조직하고 완결하는 시의 힘,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지만 결코 완성으로 이끌리지 못한다. 그 불완전함 탓에 질서를 새롭게 마련하려는 수많은 고투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시의 끈질긴 내력은 실패로 이어져 오래인 것이다.
■ 시인의 말
지금은 경작의 애락哀樂을 내려놓아야 할 때!
비가 오지 않는다고 탄식하던 농사의 시절은 지났다.
2023년 여름
김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