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것은 그에게 인간의 몸이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었다”
한 번도 꿔본 적 없는 악몽,
어쩌면 이미 경험했을지 모르는 세계,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기괴한 상상!
“이 책이 작가로서 나의 첫 책인 것을 여전히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 18년 만에 새롭게 찾아온 편혜영의 첫 소설집!
기약할 수 없었던 팬데믹의 끝이 서서히 보이는 듯하다. 2019년 겨울 전 세계를 매섭게 휘감은 전염병은 2023년 봄기운 앞에 그 기세가 확실히 꺾였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스크 안에 얼굴을 숨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과 코를 드러내고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어색한 표정만큼이나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의심이 고개를 내민다. 정말 끝난 것일까? 동면에서 깬 개구리의 뒷덜미를 확 낚아채기라도 하듯 한파를 몰고 오는 꽃샘추위의 엄중한 경고처럼, 이 불안을 예감하고 오래전에 이미 도착한 한 권의 책이 있다. 편혜영의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이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5년, 근대 이후 소설적 상상력의 어떤 ‘끝’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가 편혜영의 눈부신 문학적 시작을 알리며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던 『아오이가든』이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문제작으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왔다.
특히 표제작 「아오이가든」은 전염병으로 잠식된 도시에서 다른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이 남아 생존을 유지하는 상황이 작금의 현실과 겹치면서 한 걸음 더 밀착된 공포를 느끼게 한다. 당시에는 2002년 11월에서 2003년 7월까지 유행했던 ‘사스’를 떠올리게 했을 법한 역병의 공포는 ‘코로나19’의 생생한 체험 이후 그 거리감이 한층 좁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팬데믹이 막 선언되고 나서 과거에 전염병과 관련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씌어졌던 작품들이 마치 예언서라도 되는 것처럼 호명되었을 때가 아닌,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 이제 막 빛이 보이는 듯하는 지금 이 책이 다시 놓이는 것은 어찌 보면 편혜영 작가의 작품 색깔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 듯하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인 이미지들이 난무했던 첫 소설집 이후 그의 이야기는 평범하고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옮겨간다. 시체들 곁에 나란히 몸을 뉘었던 낯선 모험의 여정이 익숙함에서 스며 나오는 공포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로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가 편혜영식 서스펜스의 무대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은 거기 미세하게 갈라진 균열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하여 이제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는 우리에게 지금 이 소설이 다시 찾아왔다는 것, 이 사건 그대로, 편혜영식 서스펜스와 닮은꼴이 아닐는지.
주지하다시피 지금의 편혜영 작품과 『아오이가든』 사이에는 18년이란 시간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거리가 있다. 이 책의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부러 멀어지기도 했”다고,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작가가 밝히고 있거니와 편혜영 작가의 근작에 더 익숙한 독자들은 전혀 새로운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편혜영 작가의 작품이 왜 『아오이가든』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익숙함에 스민 공포의 기원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목차
저수지
아오이가든
맨홀
문득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
만국 박람회
서쪽 숲
마술 피리
시체들
해설 |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_이광호
작가의 말
개정판 작가의 말
저자
편혜영 (지은이)
출판사리뷰
Welcome to Hardgore Wonderland!
―편혜영 서스펜스의 시작을 알린 ‘아오이가든’이 다시 문을 연다!
한 여학생 실종 사건 이후 시체를 찾기 위한 저수지 수색 과정에서, 버림받고 방치된 세 아이를 뒤늦게 발견하는 이야기 「저수지」,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개구리와 집밖으로 내던져진 쓰레기 더미와 구역질을 퍼 올리는 악취가 가득한 도시의 한가운데, 역병으로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다른 도시로 갈 수 없는 이들만 남은 아오이가든을 배경으로,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한 가족(엄마, 누이, 나)의 모습을 그린 「아오이가든」, 생계 걱정을 하느라 자식들을 방치하는 부모를 떠나 도시의 땅 밑, 맨홀 안으로 들어간 아이들의 이야기 「맨홀」, 낚싯대에 걸려 올라온 시체 한 구에서 시작해, 구더기로 가득한 방에 홀로 누워 생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문득」, 추리소설의 결말을 끝내 읽지 못하고 하루가 온통 꼬여버린,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한 남성의 이야기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 폭우로 모든 걸 잃은 수재민들의 임시 거처가 된 박람회장, 박람회 개장에 맞춰 떠나야 하는 수재민 가운데, 엉터리 마술과 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 소년과 그의 삼촌의 이야기 「만국 박람회」, 의뢰인들에게 알 수 없는 서류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약국 여자의 이야기 「서쪽 숲」, 단백질 부족으로 죽어가는 실험용 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녀의 이야기 「마술 피리」, 아내가 익사한 장소로 추정되는 계곡으로, 아내의 신체 일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는 남편의 이야기 「시체들」.
『아오이가든』 속 아홉 편의 이야기에는 산 사람과 시체의 경계가 지워진 듯 보인다. 그렇게 이 세계에서 실종되고, 스스로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채로, 때로는 신체의 일부분으로 남은 이들이 여기에 있다. 저수지 속에서 썩어가거나 계곡물 아래에서 수초와 얽혀 부유하거나 구더기와 함께 더러운 방에 놓인 시체의 모습으로, 역병처럼 불길한 아오이가든이나 번화한 도시 아래 맨홀 속 혹은 누구도 가본 적 없이 소문만 무성한 서쪽 숲의 사람들로.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평범한 일상 뒷면에 놓여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젖게 하는지도 모른다. 편혜영의 작품 세계 가장 밑바닥에 묻혀 있는존재가 바로 이들이 아닐까.
개정판 작가의 말
『아오이가든』은 내게 가장 가까운 이름이자 가장 먼 이름이 된 소설이다.
소설을 쓰다 막막해지면 이 소설을 쓰던 때를 떠올렸다. 부러 멀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한 시절을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아오이가든』을 읽을 때면 특히 그러했다. 이 책이 작가로서 나의 첫 책인 것을 여전히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2023년 3월
편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