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 사이는 극명해지고
그 쓸쓸한 거리를 걸을 테니까”
여기에는 관계의 변화, 대립, 이별, 갈등 해소가 없다
교훈이나 주장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 이자켓 첫 시집 출간
유별나지 않아도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걷자.
거리가 길어서 오랜 시간 걸을 수 있어.
_대산대학문학상 당선 소감 中
2019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자켓의 첫 시집 『거침없이 내성적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시 속의 일원이 되”어버린다는 심사평과 함께 등장한 이자켓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시의 세계를 비틀지 않고 정면으로 직진한다. 축구장, 영화관, 이발소와 같은 생활의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화자 역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가는 데만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일상 언어로 이루어진 시 세계는 눈으로 따라 읽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자꾸만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그건 이자켓의 작품이 “바로 여기 감동이 아닌 감동이며,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이고 익숙함에서 끄집어낸 다름에 있(강성은, 박소란, 유희경)”기 때문이다.
이자켓이 펼쳐 보이는 시의 세계는 한밤에 도로를 질주하는 라이더의 재킷처럼 그 무게가 가볍고 행동거지가 가뿐하기만 하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의 낯섦을 연기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애써 끌어다 쓰지 않는다. 부를 나누지 않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40편의 작품은 아주 오랫동안 질주하던 사람이 자기가 오래전에 떠나온 길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걷는 것처럼 정직하기만 하다. 당선 소감에서 “하던 대로 하겠다 [......] 유별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한 시인은 시에서만큼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이자켓은 시를 걷는 사람이다. 그 길이 길고 혼잡할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 좋다며 묵묵히 걷는 사람이다.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들어가 앞을 보며 계속해서 걷는 그를 보면 거침없이, 내성적인 세계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목차
시인의 말
축구를 사랑해서
제일 멋질 오늘
프랑스에서 영화 보기
그것이 문제라면
떠나기 전에 묻기
복어 가요
그러고 보니
나를 써요
에차
말고라는 고양이
어느 재규어의 키스
멍청이들
양초를 빚고 빛나게 하지
혹은요
타운 칠링
피우지 말고 태우라
거침없이 내성적인
가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용된장
R insing
노란 날들
고쳐쓰기
아시안 훌리건
더 있어도 돼
회신 바람
와줘
유니버스 진화
당신의 수백 가지 갈색 동물
배 타요
그러다 보니
가는 버스
너바나
카 토크Car Talk
몫
미라빌리스
탓
개별적 놀라움
C/O
세상의 절반
고쳐 쓰기
해설
이 자켓 착용 설명서 · 이희우
저자
이자켓 (지은이)
출판사리뷰
그가 그리는 사랑의 관계 혹은 성적인 관계에는 단독성이나 고유성이 없고, 단단한 결속이나 동거를 위한 끈질긴 협상이 없다. 이자켓의 시를 관류하는 정서가 있다면, 이러한 관계의 불안정함과 찰나성,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어떤 동시대적 외로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계의 변화, 대립, 이별, 갈등 해소 같은 서사적 전개가 없다. 교훈이나 주장도 없다. 이자켓의 텍스트는 ‘리버시블’, 즉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어제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옷의 안쪽이 오늘은 세상 밖에 드러나 빛을 받을 것이다.
_이희우, 해설 「이 자켓 착용 설명서」에서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
그 끝에서 사라지는 연인들
합정까지 걸을까?
추운데
목도리 빌려줄게
너는?
난 추위 잘 안 타
-「복어가요」 부분
이미 객석은 가득 차 있는데 배우는 연기하지 않는다. 이자켓 시의 화자는 모노드라마 주인공처럼 홀로 서 있다. 물이 팔팔 끓고 담배 필터가 끝까지 타 들어가는 동안 그는 멀뚱히 서서 “방어 태세의 복어만큼 부풀어”(「복어가요」)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들은 “소파 가죽”이 내는 “맥 빠진 소리”(「축구를 사랑해서」)처럼 기운이 없다. 저 멀리 버려진 배에서도 “맥 빠진 소리가 뿌―”(배 타요) 하고 들려온다. 한 사람이 질문하면, 다른 사람이 대답한다. 분명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임에도 이자켓의 시에서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더는 서로를 추억하지 않는 연인처럼,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처럼. 그들이 연인이었다는 사실만을 감각할 뿐이다. 이러한 거리감은 시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단절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동시대의 외로움으로까지 확장된다. 자신이 아닌 이국의 관객에게 머리를 기대는 연인에게 “이젠 가야 해,/영화는 잊고/이제 가야 해요”(「프랑스에서 영화 보기」)라고 읊조리는 화자의 목소리는 쓸쓸하기만 하다.
다시 나타나는 이웃들
거침없이 내성적인 시인
있잖아, 옆 도시엔 도와 시가 없대
2지구부터 4지구까지만 있대
모두 트럭을 타고 다닌대
적재함에는 각 얼음이 깔려 있고
얼음 속에서 빈 병이 흔들린대
막 부딪친대
옆 도시의 교차로에선
세단을 탄대 드라이브를 한대
단독주택이 많고 집마다 사랑이 있대
응…… 거짓말
-「말고라는 고양이」 부분
명동에 있는 호텔 로비에서 명함을 주고받은 “오키나와 아저씨 슈”(「거침없이 내성적인」) “위층 사는 주민 퐁카”(「제일 멋질 오늘」) 당최 겁이라곤 없는 “복서 영감”(「너바나」)까지. 낯선 이웃들의 등장에도 화자의 시선은 덤덤하기만 하다. 이자켓이 그리는 시 세계는 우리가 사는 곳과 멀지 않고 곳곳마다 “집마다 사랑”이 떨고 있다. 화자는 이웃들과 악수를 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이내 어디로 가는지까지 꼼꼼하게 묻는다. 말투는 까칠하고 행동거지도 다정한 구석이라곤 찾기 어렵지만, 그 속에는 어떤 교훈이나 주장도 없다. 모든 것이 다 괜찮고 “누구의 탓”도 아닌 시 세계에서는 거침없이 상대에게로 다가가 가만가만 이야기를 들어주면 된다. 자주 가던 이발소에 앉아 “절반만 사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시인에게 이웃들은 “안고 있으면 시원한 늦여름”처럼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기도 한다(「세상의 절반」). 시 속에서도 사랑했던 연인, 우연했던 이웃, 잘 모르는 예보를 뒤로하고 떠나는 시인은 “설명서는 한마디 더 얹지 않”(「시인의 말」)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뒤표지 시인의 글에서 “연결 후, 흔들리도록 느슨하게 풀어두”라고 다시 한번 당부하는 걸 보면 이자켓에게 관계는 결속이 아닌 연결이고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마침내 각자의 세계로 해체되는 게 아닐까. 거침없이 내성적인 그의 세계에 남아 있지 않은 여지가, 그 쓸쓸함에 대해 자꾸만 말을 걸고 싶게 한다.
■ 시인의 말
설명서는
한마디 더 얹지 않고
한마디 없거나 참지 아니하고
2023년 3월
이자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