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달도 가짜라는 소문 들었어
그래도 네가 편안한 밤 보내면 좋겠다”
지금, 여기로부터 멀어짐으로써 가닿는
신예 조시현의 빛나는 상상력
* 한국 시의 SF적 상상력! 조시현 첫 시집 출간
왜 쓰냐고 나에게 자주 묻는다. 어떤 것은 대답이 되고 어떤 것은 되지 않는다. 다만 계속 싸우는 사람이고 싶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쓰고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산다고 적은 적 있다. [......] 그 안에서 진실했다고, 실패했거나 실수했을지언정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_「해가 세 번 뜨는 디스토피아」 시작 노트(『뉴스페이퍼』)
2019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시현의 첫 시집 『아이들 타임』이 문학과지성사 2023년 시인선 첫 책으로 출간되었다. 데뷔 당시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탈피한 독특한 상상력으로 이목을 모았던 조시현, 사실 그는 2018년 『실천문학』 신인상에서 단편소설 「동양식 정원」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오롯이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해 나가는 신예 조시현은 일찍이 테마소설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공저)』를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문학지 『현대시』 『문학동네』 『창작과비평』 『AnA Vol.01』는 물론 웹진 [시산맥], [뉴스페이퍼]를 통해 평단에도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켜왔다. 60편의 시를 5부로 나눠 수록한 이번 시집은 멸종된 ‘지구 인간’을 중심으로 지구 안팎의 이야기를 이채롭고 방대하게 담아낸다.
시집의 제목 “아이들 타임”은 컴퓨터를 작동시키지 않고 입력과 출력을 위해 대기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현대인에게는 사뭇 낯선 개념이다. 기계의 쓰임이 보다 명확한 오늘날에는 작동과 오작동만을 구분한 채 일련의 단계는 생략되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온전히 감각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탠퍼드대학교 교수이자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제니 오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제니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김하현 옮김, 필로우, 2021)이라 말했다. 조시현 역시 자신의 시 속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시공간의 ‘이동’이 아닌 ‘멈춤’을 택함으로써 자신이 발을 디딘 자리에서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해나간다. 이렇듯 장소성 혹은 시간성에 기대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조시현이야말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스토리텔러’로 그 가능성을 이번 시집 『아이들 타임』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게 아닌,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구로부터 멀어지기를 택하는데, 문학평론가 홍성희는 그러한 그의 작업 방식을 “멀어짐은 멀어져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멀어짐으로써 닿으려는 것”이라 했다. 조시현이 시에서 돋보이는 SF적 상상력은 소설 분야에서는 이미 수많은 독자에게 각광을 받아왔지만, 시에서만은 막연히 먼 세계나 상징적인 의미로 그치곤 하였다. 하지만 조시현은 자신이 상상한 세계에 이야기를 덧입힘으로써 독자들을 전혀 다른 우주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조시현의 시는 반복되는 무늬로 가득한 이야기로부터 공간적, 시간적, 감각적으로 분리되기 위해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지구 인간이 멸종된 시점에서 지구 인간을, 인간이 없는 지구에서 인간이 있던 지구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되새기는 방법을 활용한다. 그것은 단지 지금 여기로부터 아주 멀어져 초연해져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멀어짐은 멀어져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멀어짐으로써 닿으려는 것이고, 멀어짐을 멀어짐으로 정당화하는 언어들에 멀어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일이다.
_홍성희, 해설 「흰동가리 구하기」에서
목차
시인의 말
1부 해가 세 번 뜨는 디스토피아
해가 세 번 뜨는 디스토피아
아이들 타임
코끼리 그리기
섬
28880314
맨해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러시아 귀부인이 사향 고양이를 무릎에 얹고 쓴 시
토성의 고리
다이너스티
거장과 거울의 방
2부 위스망스로 가는 길
위스망스로 가는 길
해변
틸페츌라
눈썹 뽑기―방해하지 마시오
빛이 떠나는 경로
유령 버스
무중력 지대
벨 자
베개
적색거성
시월엔 결혼식
3부 로봇의 잠
우드의 저녁
유월
로봇의 잠
엔젤링
르방에서 온 하르방
리와인드
문
녹시울
인사이드 아웃
크리피파스타
I message you
진저브레드
버터나이프
교수가 받게 될 편지
B613
4부 사이먼이 말하기를
카타콤
불운
베케이션
에브루
거북은 거북으로
페이퍼 커팅
사이먼이 말하기를
바바 밀라의 한발 늦은 저녁 식사
캐러멜라이즈
같은 기도
파이어워크
5부 홀리 홀리데이
오래된 사랑과 미래
거장의 탄생―구멍 난 팔
2888년의 저녁 식사
홀리데이 파티
기벽
헝거
시냅스
에콜로지 디스터번스
녹색 산책
밤콩
기계적 풍경의 디스토피아
거장의 유작
리뉴
해설
흰동가리 구하기·홍성희
저자
조시현 (지은이)
출판사리뷰
너는 미래의 시간을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보고 싶어, 엘리노어
이렇게 조용한 지구를 상상해본 적 있어?
인쇄된 글자처럼 쓸쓸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내게 너무 늦게 전해지는 건지도 몰라
ㅡ「아이들 타임」 부분
화자가 별다른 추신을 덧붙이지 않고 “보고 싶”다고 말하는 엘리노어는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이름이자 끝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의 수신인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지구 인간은 마치 오래 헤어지는 연애를 하는 기분으로 “혼자 아는 멍 자국”(「해변」)의 개수를 늘려가고, “밤새 가짜 같은 꿈”(「틸페츌라」)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대답 없는 이에게 편지를 쓴다. 표제작 「아이들 타임」은 “보고 싶어”라는 혼잣말로 시작해 “정말로 보고 있어?” “아직 보고 있어?”라는 구체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별은 애써 쌓아온 관계를 망치기도 하지만, 모든 그리움은 그저 잠시 멈춰 있을 뿐인 걸까. 화자의 보고 싶다는 말은 마치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별자리처럼 여러 번 힘주어 말할수록 더 환한 빛을 밝힌다. 이는 시인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상대를 할퀴고 상처 내면서 서로 알아가는 게 아닌 가만히 옆에 앉아 저마다의 무늬를 그려 넣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야기를 새기는 방식 중 하나인 ‘각주’는 서간문 형식을 취한 「아이들 타임」에서 두드러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움을 말하는 시가 각주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2500년대에 씌어진 일기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조시현의 시에서는 2444년에 고장 난 태양이 거대한 기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고,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장이 388년 후에 발견되기도 한다. 이때 화자는 무수한 밤 속에서 자신을 구원했던 것은 언제나 ‘이야기’뿐이었다고 말하면서 다시금 시를 쓴다.
우리만이 우리를 구하는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언니는 알을 품고 있다 오래도록 부화하지 않은
사는 법에 골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쳤다는 뜻이다 자매들은 알을 낳았다 굴렸다 깨진 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함구했다 우리가 버려진 거냐고 묻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매들은 저마다의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모인다 각자가 모아 온 가지를 지핀다 마른 팔뚝 같은 가지들이 오그라든다
[......]
왜
깨지지 않지 마음은, 새어 나가지 않지
언니의 알은 단단하고 미동도 없고 알의 형상은 부서진다 언니 나는 마음이 없어, 언니가 마음대로 미칠 동안 나는 이렇게,
ㅡ「섬」 부분
조시현 시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고 각각의 이야기는 마치 “부화하지 않은” 알처럼 그 속에서 꿈틀댄다. 시의 화자는 아무렇게나 타는 나뭇가지처럼 불우함에 전염된 상태로 무럭무럭 자란다. 언니가 오래도록 품고 있는 알은 그 매끈한 표면이 깨지지도 새어 나가지도 않은 채로 언니가 “마음대로 미칠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알을 낳는 자매들은 각자 낮을 보내고 다시 둥글게 모여 앉아 불을 지피는데, 간헐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화자는 “언니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섬에 사는 자매들이 버려진 게 아닌, 살고 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조시현 시 깊숙이 내재한 외로움은 우울함이 되지 않은 채로 “다시 시작되는 날개짓”(「캐러멜라이즈」)과 함께 “여전히 어디선가 태어나면서”(「녹시울」)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지난한 시간 동안 환자는 눈썹 한 올을 더 뽑고, 구석에서는 곰팡이가 자라난다. 시인은 이상이 아닌 암흑의 세계에서 “안아줘(「리와인드」)” “보고 싶어(「B613」)” “사랑해(「캐러멜라이즈」)”라는 말을 툭툭 내뱉고 이런 말들은 흩어지지 않고 언니가 품고 있는 알이 만들어나갈 신화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삶이 비록 기대와 달리 흘러갈지라도 시인은 더 잘 싸우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런 그가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이 희망차기만 한 유토피아가 아닌, 언제든 다시 알을 깨고 나갈 수 있는 디스토피아이다. 하루에도 해가 세 번 뜰 수 있는 곳에서는 지구도 조작된 것이고 태양도 기계에 불과하다. 고장 나지 않은 건 각자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이다. “슬픔에는 구간이 없”(「시인의 말」)다는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도망치기 바쁜 이들에게 눈앞에 닥친 슬픔에서 아주 멀리 멀어진 후에 제대로 마주하라는 말로 들린다. 외로움은 우리의 세계를 갉아먹지 않고 그 속에서 도망쳐 틈새로 비집고 숨어들었을 때만이 괴로워질 뿐이다. 조시현의 첫 시집 『아이들 타임』은 독자들의 작동 가능한 마음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도 잠시 멈춘 상태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 넣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이야기를 묵묵하게 펼쳐나가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원인 모를 외로움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일상을 확장해 더 먼 곳으로 가닿는 여정이 될 것이다.
■ 시인의 말
슬픔에는 구간이 없는데
어떻게 악보를 옮겨 적지요?
2023년 2월
조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