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계의 끝에는 내가 찾는 그것이 있고 나는 세계의 끝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축제가 끝난 후에 시작되는 종말의 이야기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 오수완 장편소설
위트와 통찰이 넘치는 언어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작가 오수완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켄』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세계에 ‘허무’가 찾아왔다는 종말론적 설정 아래 축구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 ‘켄’의 여정을 담고 있다. 8년간의 수정과 개작을 거듭한 원고는 1억 원 고료에 달하는 제1회 목포문학상 최종심에 올라 “다채롭고 역동적인 이야기들을 콜라주처럼 엮어낸 솜씨가 어지간하”(문학평론가 우찬제)며, “알레고리를 다루는 방식이나 끊임없이 생산되는 에피소드의 고리에서 끈기와 에너지가 느껴진다”(소설가 은희경)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세부 묘사와 인물 설정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세공을 거쳐 출간된 『켄』은 뜨거웠던 2022 카타르 월드컵이 막을 내린 지금, 꼭 읽어야 할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대한민국의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우승 세리머니를 위해 펼쳐 든 대표팀의 태극기 문구는 전 국민에게 승리의 기쁨보다 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팬데믹의 여파로 오랫동안 어두운 시간을 보낸 한국 사회, 한 해의 끝에서 마주한 이 짧은 정언은 켄이 세계의 끝에서 찾고자 했던 ‘그것’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목차
프롤로그: 마지막 밤
1부
허무가 찾아온 날 /그날들의 처음 /허무 속에서 /처음으로 꾼 꿈 /길을 떠나다
2부
마을에 들어서면 /축구의 부재 /폐차장 /진흙탕 도시 /이반은 숲으로 들어갔다 /멈추지 않는 욕 /포지션의 행복 /죽어가는 사람은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폭력의 카르마는 0에 수렴한다 /악마는 켄을 시험했다 /박사의 진실 /조지 릭스비에게 공이 돌아왔다 /두 바보 이야기 /축구공의 장인 /공간 속으로 /각하와 경찰관 /세계의 끝에서 불빛이 빛났다 /아버지와 악마 /세 번의 기적 /불의 사나이 /긴 바지 자매 /프란츠는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로미에타와 훌리오 /형제 /폭풍 속의 악령
3부
뿌리는 친구들에게 돌아왔다 /들판에서 /축구의 천국 /축구란 무엇인가 /세계의 끝 /그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 집에 돌아왔다
에필로그: 완벽한 저녁
작가의 말
저자
오수완 (지은이)
출판사리뷰
“우리의 이야기도 당신이 세계의 끝에 데려가주면 좋겠어.”
‘허무’를 딛고, 축구를 향해, 세계의 끝으로.
허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텅 빈 모습으로 이 세계를 뒤덮는다. 허무의 세계에는 기쁨도 아름다움도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은 기계적인 일상을 반복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그 공허함에 지쳐 삶을 마감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허무에 굴복해가던 켄은 어느 날 세 차례의 축구 꿈을 꾼 뒤 축구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자 자신이 이 세상에 남은 까닭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축구의 흔적을 찾아 세계의 끝으로 향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떠나고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유로 떠나지만 어떤 사람은 하찮은 이유로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하찮은 것이 유일한 것이 된다.” (p. 34)
이 소설은 작가인 켄이 출판사 편집자에게 긴 여행의 일화를 들려주는 구성을 취한다. 켄은 허무가 처음 찾아온 날 소설의 마지막 장을 쓰고 있었지만, 허무가 찾아온 이후로 그 이야기를 이어 쓰지도,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지도 못한다. 혼자서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던 켄은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그 이야기들을 다시 세상에 전한다. 여행 중에 만난 ‘긴 바지 자매’의 일원은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마음껏 꿈을 펼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켄에게 들려주고, “우리의 이야기도 당신이 세계의 끝에 데려가주면 좋겠어”라고 당부한다. 아마 그 ‘이야기’에는 축구에 대한 추억뿐 아니라, 무언가에 열광했던 시절의 기쁨과 환희, 그 감정을 함께할 때의 우정과 연대가 스며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거나 어딘가에 남겨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들은 사람도 사라지고 나면 그 이야기 역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p. 192)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된다”
폐허의 그라운드에서 시작되는 또 한 번의 시합
아마 당신에게도 당신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꿈이 있을 것이다.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꿈이. 그 꿈이 당신을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오르도록 한다면야. 혹은 그저 지칠 때까지 공을 쫓으며 달리도록 만들 뿐이라면야.
_「작가의 말」에서
켄은 축구를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언젠가 세상에 존재했던 아름다움의 흔적을 이따금 발견한다. ‘축구공의 장인’은 켄이 길을 떠날 때 가져온 낡은 공의 장례식을 치르며 작별을 뜻하는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부른다. 비록 음조가 없는 중얼거림에 가깝게 들리지만, 허무의 창궐 속에 무생물을 애도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노래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또한 켄은 세계의 끝에 다다라 만난 거인의 이상하고 기괴한 몸짓에서 춤의 존재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거인의 춤과 함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긴 여정에서 들은 이야기의 얼굴과 장면을 다시 한번 만난다.
팬데믹 시대에 대한 한 편의 알레고리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인류의 미래가 전염병이나 기후변화, 핵폭탄이 아니라 무언가를 쫓고자 하는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허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에는 ‘그’ ‘그것’ ‘그렇게’ 등의 지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허무가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이름을 빼앗아 갔음을 뜻하는 장치인 동시에, 무엇이든 새롭게 명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허무의 세계는 어쩌면 누구나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소이자 모든 이야기가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아마 그라운드 위의 법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