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소설은 1990년 당시 “백말띠 여자가 드세다”라는 속설로 인해 여아 선별 임신중지가 이루어졌던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삼는다. 이야기는 1990년생 여성들이 모두 태어난 가상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엉망이 되면서 시작된다. 주변 여성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지는 상황 속에서 평행세계를 오가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 채진리의 분투기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1990년생, 삼십대에 들어선, 살아남아 태어났으나 여전히 선명한 임금 격차와 고용 불안, 여성혐오와 각종 성범죄의 범람 속에서 팍팍한 하루를 보내는, 그러나 평범하고 용감한 당신들을 향한다. 여자 형제 대신 살아남았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에 눌려 지냈을 사려 깊은 당신들에게도, 더하여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고민하고 고통받았던 당신들에게도 나아간다. 이 모든 억압을 몇 해 늦게 혹은 이르게 겪어냈을,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이 소설이 작은 용기와 위로를 전할 수 있길 소망해본다.
목차
1부 1990년생 채진리
1990년, 엄마와 나의 특별한 해
새로운 기억
나빠지는 변화
두 세계
두번째 기회
집단 실종
해라
지워진 존재
사라질 몸
침탈
2부 다시 만난 세계
딸의 이름 123505 505 505 505……
우리라는 이름
모든 순간
이스트엑스
사라졌으나 소멸하지 않는 것
여아 불호 사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그리웠던 풍경
두 사람
에필로그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저자
황모과 (지은이)
출판사리뷰
“이제는 아무도 잊히지 말자. 우리가 끝낼 때까지”
역대 최악의 성비를 기록한 1990년 ‘백말띠’
평행우주와 과거-미래를 가로지르는 모험으로
끝내 기억하고 복원해낼 사라진 여성들의 세계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에 「모멘트 아케이드」로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던 황모과의 첫번째 SF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문학과지성사, 2022)가 출간되었다. 황모과는 첫 소설집 『밤의 얼굴들』을 선보이며 “‘만약에’의 이야기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소설”(『씨네21』 기자 이다혜)이라는 평을 받았다. 단편 「증강 콩깍지」는 MBC 시네마틱 드라마 〈SF8〉으로 제작되어 유망한 신예 작가로서 SF 독자들의 큰 기대를 모았다. 이 소설은 1990년 당시 “백말띠 여자가 드세다”라는 속설로 인해 여아 선별 임신중지가 이루어졌던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삼는다. 이야기는 1990년생 여성들이 모두 태어난 가상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엉망이 되면서 시작된다. 주변 여성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지는 상황 속에서 평행세계를 오가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 채진리의 분투기다. 하지만 속 시원한 영웅담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결국 이 소설이 되돌릴 수 없고 기억되지 않는 사라진 여성들의 세계, 바로 지금-여기를 되비추며 반성을 촉구하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이후의 강력한 백래시를 경험한 뒤, 2022년 대선 의제에 여성은 또다시 지워졌다. 소설은 질문한다. 어제도 오늘도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여성의 자리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이 책을 펼칠 독자들이 평행세계와 과거-미래를 내달리는 진리와 친구들의 용기 있는 걸음을 따라가며 다채로운 영감을 얻길 바란다.
“이곳은 사라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2007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의 시작, 모든 것이 뒤섞였다
개학 날 아침 지각으로 허둥대던 진리는 등굣길에 무릎이 꺾일 만큼 강한 진동을 느꼈다. 아무런 징후 없이 시작된 별안간의 변화. 새로 들어선 교실에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들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설문으로 남녀공학이던 학교를 남학교로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중 한 명이 자신의 남자친구 훈우라는 사실에 진리는 더욱 충격받는다. 속 깊고 다정하던 훈우는 이미 성격도 눈빛도 180도 달라진 상황. 진리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누구야?”(p. 35).
근데 얘들아,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모른다고, 갑자기 잊었다고 외치면 끝이야? 우릴 부정하면 너희들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건데? 괜찮은 거야? 그냥 우리를 부정하면, 너희가 지내온 곳은 아무렇지 않게 대체되는 거야? 빠진 곳 없이 다 잘 채워지는 거야? 그게 가능한 거야? 훈우에게, 아이들에게, 선생님에게,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pp. 38~39)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를 겪고 귀가하려는데 아빠는 새집이라며 낯선 주소를 알려준다. 한때 노벨상을 꿈꾸던 과학자였지만 이후 제빵사가 되어 ‘진리베이커리’를 운영해온 아빠 채필림은 어느새 제약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어 있었다. 진리는 이러한 격변 속에서 과거에 진리를 낳다가 사망했던 엄마 최이영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기대를 품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점차 더욱 나빠져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상하게도 그들과의 기억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손바닥에 친구들의 이름을 눌러 적으며 기억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진리. 과연 이 망가진 세계를 누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승부도 승패도 의미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적이 되었다”
문제는 임신중지가 아니다, 가부장제다
“낙태 자체를 문제 삼아선 안 된다고 봐. 낙태가 불법인 바람에 폐해가 더 크다고.”
내 말에 진희가 논점을 정리했다.
“낙태는 연간 수십만 건 이상으로 추정돼. 제대로 집계되지도 않는다지만. 낙태를 말하는 게 아니야. 지금 우린 출생자 수를 얘기하는 거야.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특정 성별의 출산을 회피했던 사건을 얘기하는 거라고.”
[……]
“경구용 낙태약 때문에 우리 때 애들이 7만 명쯤 태어나지 못했다고 쳐. 근데 그게 이제 와 애들이 갑자기 사라진 거랑 무슨 관계지?”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pp. 175~76)
1990~2000년대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로 가족 구성원에 관해 질문할 때 종종 이런 말이 이어지곤 했다. “우리 엄마는 셋째가 낳고 싶었을 뿐인데 우연히 남동생이 생긴 거래요.” 아들 딸 구별 없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에도 아랑곳없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고집되다 못해 중산층을 중심으로 여아 감별 임신중지가 성행하던 시절. 남아선호사상은 결국 여아불호사상과 같은 말이었고, 성비 불균형은 1990년에 최정점에 이르러 여성 100명당 남성 116.5명을 기록했다. 교실마다 남학생이 서너 명씩 많았던 시절은 결코 짧지 않았으며, 이 사태마저도 “아이 낳을 여자가 없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만 여겼다. 황모과의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임신중지를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성과 이로 인해 사라진 여성들을 복원하는 이야기다. 누구나 알지만 마치 과거의 미신적 해프닝처럼만 기억되던 사건을 두 갈래의 평행세계로 불러와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지금-여기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 세계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지에 관하여.
이 책은 분명 당신을 향해 있다
1990년생, 삼십대에 들어선, 살아남아 태어났으나 여전히 선명한 임금 격차와 고용 불안, 여성혐오와 각종 성범죄의 범람 속에서 팍팍한 하루를 보내는, 그러나 평범하고 용감한 당신들을 향한다. 여자 형제 대신 살아남았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에 눌려 지냈을 사려 깊은 당신들에게도, 더하여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고민하고 고통받았던 당신들에게도 나아간다. 이 모든 억압을 몇 해 늦게 혹은 이르게 겪어냈을,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이 소설이 작은 용기와 위로를 전할 수 있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