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이 말을 그녀는 앞으로 자주 듣게 된다
이국에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타인들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욕망
공쿠르상 수상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장편 소설 『타인들의 나라』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79번으로 출간되었다. 2014년 데뷔 이후 단 두 편의 소설만으로 큰 주목을 받아온 레일라 슬리마니는 프랑스어 진흥 대통령 특별 대사로 임명되는 등 완벽하고 매력적인 프랑스어 문장을 인정받은 작가이다. 슬리마니의 세번째 소설 『타인들의 나라』는 주인공 마틸드와 같이 프랑스 출신으로 모로코로 이주한 작가의 조모와 모로코 최초의 여성 전문의인 어머니 등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 대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프랑스 군인으로 입대한 모로코 남성 아민과 프랑스 알자스 출신 여성 마틸드는 전쟁이라는 혼돈 속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프랑스와 모로코, 식민-피식민이라는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도 사랑을 키운 두 사람은 결혼 후 모로코로 이주하고, 모로코에서 마틸드는 자신이 외국인·여성·아내, 타인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남편의 나라에 살게 된 마틸드와 그의 가족, 각기 다른 이유로 이주한 모로코의 외국인들, 바뀌는 시대에도 여전히 억압적인 삶이 요구되는 모로코 여성들의 절망을 강렬하게 그려낸다. 모로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작가 본인의 가족사를 모티프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권 없는 식민지, 남성들의 나라인 타인들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세밀한 묘사와 힘 있는 필치로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저자
레일라 슬리마니 (지은이), 황선진 (옮긴이)
출판사리뷰
오렌지와 레몬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이 합해진 열매, 시트랑주
전쟁 이후 프랑스인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모로코 남성 아민은 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비옥하게 가꾸고자 바삐 움직이며 일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딸을 정원으로 데려와 오렌지나무 줄기에 레몬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것을 보여주며 말한다. “너는 말이야, 이 새로운 종의 나무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렴.”(89쪽) 모로코와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나라의 부모 아래서 태어난 딸에게 오렌지와 레몬이 만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아민은 딸 아이샤의 눈앞에서 두 나무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후 두 나무를 접합시켜 만든 ‘시트랑주’라는 새로운 품종은 아민과 마틸드의 가정을 상징하는 나무가 된다.
하지만 이들의 결합은 오렌지나무에 레몬나무 가지를 끼우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마틸드는 모로코라는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억제하며 살아가야 하고 딸인 아이샤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환경과 외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에두아르 글리상의 제사(혼혈, 이 단어에 내려진 저주를 책장에 큰 활자로 써넣도록 합시다)처럼 혼혈이라는 존재와 그 이질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개인은 사회의 반응을 다시 어떻게 감지하며 때로는 이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작가는 냉정할 정도로 철저하게 서술한다.
남자는 그녀가 저 다혈질의 아랍인과 성행위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결합으로부터 나온 역겨운 열매를 복도에서 목격했던 만큼 그 장면을 상상하기가 훨씬 쉬웠고, 그래서 비위가 상하고 분노가 폭발했다. (167쪽)
아민은 [...] 시트랑주의 열매들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육이 딱딱하고 맛이 써서 눈물이 솟구쳐 오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세계가 식물학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 종種이 다른 종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어느 날 오렌지가 레몬을 이기거나 또는 그 반대가 될 것이며, 그런 후에야 나무는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맺게 될 것이다. (408쪽)
소설은 아민의 의견처럼 오렌지나 레몬 어느 한 쪽이 우위를 차지하는 모습을 그리지는 않는다. 다만 시트랑주로 상징되는 이질적인 존재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 앞의 세계를 인식하며 부딪쳐나가는지를 피하지 않고 생생하고 힘 있게 보여줄 뿐이다.
바로 여성들의 목소리
레일라 슬리마니의 첫 소설 『그녀, 아델』은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직시하며 거침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슬리마니는 이 데뷔작으로 많은 호평을 받으며 라마무니아 문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공쿠르상을 수상한 두번째 소설 『달콤한 노래』는 아이를 살해한 보모의 내면을 그린 작품으로 “나의 영원한 주제는 여성”이라는 작가의 인터뷰처럼, 슬리마니는 소설을 통해 여성들의 욕망과 목소리를 생생하고 섬세하게 드러내왔다.
오랜 전쟁으로 청소년기를 공습의 위험 속에서 보냈던 마틸드에게 군인 아민은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사랑이자 욕망의 대상으로 모든 것에 굶주린 열아홉 소녀와 젊은 군인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몸을 강렬히 원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모로코의 가족과 함께 살며 겪는 여러 부침 속에서도 이 부부가 어떻게 서로의 몸과 욕망을 직시하는지 슬리마니는 마틸드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마틸드가 아민을 처음 만난 나이와 비슷한 나이의 아민의 여동생 셀마에게 모로코는 너무 좁고 시시한 곳이며, 셀마는 자신을 억압하는 오빠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언제나 간절히 원한다. 모든 소년이 사랑하는 매력적인 셀마는 자신을 채워줄 남성을 원하는 동시에 지루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원한다. 작가는 불온한 공기와 위태로운 매력을 함께 가진 셀마를 통해 프랑스에서 모로코로 온 마틸드와 다른 의미로, 그러나 남성 중심의 세상이라는 점에서 셀마와 마틸드 등 모든 여성이 타인들의 나라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첫 소설인 『그녀, 아델』로 프랑스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달콤한 노래』는 공쿠르상을 수상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큰 찬사를 받은 이후 발표한 다음 소설인 『타인들의 나라』는 “예술가로서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야심찬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동하는 모로코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새롭게 나라를 만들어가는 모로코와 그 모로코라는 나라에 도착한 프랑스 여성 마틸드를 중심으로 이민자, 여성, 혼혈, 식민-피식민 관계 등 여러 주제가 강렬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읽는 사람 자신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의식하고 확인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