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저기요, 치킨집에 거위가 말이 돼요?”
출구 없는 슬픔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발랄한 상상력이 뒤덮이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평범한 일상에 한 방울의 상상력을 떨어뜨린다면
어떤 무늬의 이야기가 나타날까?
그에 대한 다채로운 대답이 이 책에 실려 있다.
- 최진영(소설가)
201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위트 있지만 시니컬하게 서술”한다는 평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전예진 작가의 첫 소설집 『어느 날 거위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꾸준하게 순문학과 환상소설의 접점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온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에 고스란히 담겼다. 팬티가 매달린 나무, 숨통을 달고 고래가 된 오빠, 그림이 된 직장 상사, 대홍수 속 잠수부 아르바이트생, 팔다리가 동강 나도 죽지 않는 남편까지…… 슬픔으로 가득 찬 현실은 그의 소설에서 아름답고 이상한 환상 세계로 탈바꿈한다. 특히 작가의 등단작이자 표제작인 「어느 날 거위가」는 사람이 거위로 변해 치킨집에 기거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인상적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작가의 말) 쓰는 작가의 성향은 담담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로 구성된 환상 세계에 우리가 처한 현실을 더욱 명확하게 비춰낸다. 그 속에서 슬픔에 침잠할 뻔했던 인물들은 다시 부표를 발견하고 헤엄쳐 나갈 힘을 얻는다.
『어느 날 거위가』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에 응전하는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슬픔을 예민하게 감지하되 그것을 과장된 감정으로 휘발시키지 않는다. [……] 왜소한 인생들을 억누르고 있는 세계를 직시하면서, 그것이 침범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를 열심히 상상한다. 이것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슬픔과 기쁨일 테고, 전예진식의 삶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 이지은(문학평론가)
목차
팬티
어느 날 거위가
귀경
숨통
파도를 보는 일
점심 같이 먹을래요?
우리 집에 놀러 와
좋아질 거예요
해설 | 이상한 나라의 ‘웃픔’· 이지은
작가의 말
저자
전예진 지음
출판사리뷰
고요한 슬픔을 안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상상력의 바다 유영하기
아파트 담벼락 너머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 사진을 찍는 소리, 이것 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후문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사는 1003동의 살구색 벽이 나타났고 단풍나무와 둥근 화단을 둘러싼 사람들이 보였다. 나무에는 알록달록한 천이 걸려 있었다. 강상미는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그것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무로 다가갔다.
그녀가 나무를 올려다봤다.
확실했다.
그녀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팬티가 분명했다. 「팬티」
『어느 날 거위가』를 펼치자마자 눈길을 끄는 것은 세태를 반영한 ‘상상력’이다. 처음 배치된 소설 「팬티」는 강상미가 사연이 적힌 라벨을 단 채 나무에 걸려 있는 팬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밈(meam)처럼 전국 수천 그루의 나무에 티 팬티, 사각팬티, 망사 팬티를 매달아놓은 사건은 이렇게 정리된다. “이게 외설적인 게 아니고요. [……] 마음속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거예요.” 이 말에 느낀 명랑한 당혹감은 고령임에도 해외여행과 인스타그램 서핑을 즐기는 강상미의 가치관을 뒤흔든다. 미관상 좋지 않은 것이 집 앞 아름다운 나무에 걸려 있다는 불쾌함과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강상미는 옆집 여자와 함께 나무에 걸린 팬티 떼기를 감행한다.
「점심 같이 먹을래요?」에서 신입 사원 김지은이 입사 후 발견한 것은 로비 엘리베이터 옆에 걸린 커다란 그림, 그 속으로 들어가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유 차장이다. 15층 영업팀의 잘나가는 일원이었지만 어느 날 문득 권고사직 통보를 받은 그는 퇴사하지 않고 버티다 1층 로비로 좌천당하고 말았던 것. 결국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그림이 되는 편을 선택한다. 유 차장은 그림 밖으로 나올 때마다, 훈장처럼 몸에 붙은 마른 물감을 털어낸다.
관찰자의 영역에서 숨 막히는 현실을 그려낸 「숨통」의 ‘김수민’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꿈인 중학생이다. 상체가 유난히 발달했고 수영에 재능이 있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학교에서는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의 눈치를 보며 강제로 공부해야 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김수민’은 수중 학습 참가자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해양 기관의 최고 실험체로 선발된 그는 수차례 수술을 통해 몸에 숨통을 달고 인간 고래가 되어 바다로 사라진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지은의 말처럼 『어느 날 거위가』는 “황당하고 발랄한 세계”로 가득하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에 응전하는” 노력과 “삶에 대한 애착”(작품 해설)이 담겨 있다. 작가의 상상력은 갑갑한 또는 부조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어떻게든 잘 살아내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는 있을 법하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사건들이 어떻게 바깥 세계에서 자라고 몸집을 불려 결실을 맺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싣고서요.”
전예진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포인트는 ‘단순함’이다. 불필요한 수식이 없는 단문과 복잡한 문제 상황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러하다. 이는 내일로 밀고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오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귀경」은 ‘주영’이 엄마를 차 뒷좌석 아래에 싣고 가는 도로 위에서 시작한다. 가족을 위해 26년간 희생했지만 아빠 ‘박영식’이 그 노고를 인정하기는커녕 모든 부당한 책임을 엄마에게 넘겨온 것에 화가 난 딸이 엄마를 구출하는 방법은 말 그대로 자신의 집으로 납치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 놀러 와」의 배경은 일주일째 내린 비로 6층 베란다 난간까지 물이 찬 아파트다. 고립된 듯한 ‘김율’의 집에서 고층 아파트로 이사했어야 한다고 한탄하는 아빠와는 달리 ‘율’은 베란다에서 하얗고 반짝이는 물고기 찾는 것에 혈안이고, 취업에 실패한 듯 보이는 고모는 산소통을 메고 잠수부로 일한다. 홍수와 침수 관련 보도로 떠들썩한 와중에도 율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놀러 와!”
「파도를 보는 일」에서 ‘지우’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빈소에서 슬픔에 빠지는 대신 초등학생 때 떠난 할머니와의 여행을 떠올린다. 당시 ‘지우’의 부모는 이혼 서류를 앞에 두고 싸우는 바람에 여행에 합류하지 못했지만 할머니와 단둘이 떠난 바닷가에서의 경험이 지우에겐 우울하기보다 유쾌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수록작인 「좋아질 거예요」의 주인공은 남편 ‘호진’과 함께 대학 동창 ‘지운’의 집들이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지운’이 본인 명의로 집을 샀다는 자랑을 들은 ‘호진’은 상에 놓인 마파두부를 불편한 마음으로 마다한다. 집에 돌아온 뒤 ‘호진’은 갑자기 쓰러진다. 이후 다시 깨어나지만 노트북을 들다 오른 손목이 꺾이고 왼쪽 무릎이 스쿼트 기구에 걸려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약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날 마파두부 대가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아서임을 깨닫고 레시피를 구하러 나서는데, 오히려 ‘호진’은 좀비 유튜버로 전향할 결심을 한다.
매일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두고 전예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가고는 싶은데 이유 없이 동네를 걷는 게 머쓱해 또 비슷한 하루를 지낸다. 낮 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글을 쓴”다고. 작가는 이 고독의 시간을 거쳐 부조리한 현실을 통찰하고 극복할 수 있는 상상력을 빚어냈다. 복잡하고 울적한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해서 말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소설”(작가의 말)이 된다.
호진은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고 나는 출근 시간이 들이닥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집을 나왔다. 호진이 유튜브 스타가 되면 그 돈으로 회사를 차려서 사장이 되고, 아니 그건 좀 부푼 꿈일지라도, 일단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핏빛이다. 장밋빛보다 붉은 핏빛! 「좋아질 거예요」
■ 작가의 말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거실에서 운동하고 밥을 먹고 일하다가 방에 들어가 잠이 든다. 나가고는 싶은데 이유 없이 동네를 걷는 게 머쓱해 또 비슷한 하루를 지낸다. 낮 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누구와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글을 쓴다. 어쩌다 밖에 나가면 이상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한파 경보가 내린 날씨에 나무에 걸린 사각팬티를 보거나 폭우가 내리는 지하철역에서 바다 냄새를 맡는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보면 팬티가 맺힌 나무나 물에 잠긴 베란다, 그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그래도 행복하거나 즐거운 감정 앞에서 너무 겁먹지 말자고 다짐한다. 살면서 그럴 순간이 많지 않으니까.
다정하고 세심하게 글을 들여다봐주신 이주이 편집자님과 문학과지성사에 감사드린다. 해설을 써주신 이지은 평론가님과 추천사를 써주신 최진영 작가님께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좋아질 거예요」를 읽고 엄마는 나연이 매정하다고 말했다. 상하다 못해 부러지는 배우자를 눈앞에 두고 너무 초연하다고. 그 말을 듣고 나연을 더 다정한 사람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마는 그 후에도 종종 굴러다니는 동그란 것을 볼 때면 호진의 머리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웃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그럴 때 나는 행복하고 소설을 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다.
2022년 여름
전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