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한 분은
하루빨리 자수하여 광명 찾기를 권합니다”
나에 대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내 자전소설을 쓴 이는 누구인가
나의 안팎에서 ‘나’를 섬세하게 뜯어보는 김경욱의 새로운 시선!
진화하는 ‘소설기계’에서 고민하는 ‘배트맨’이 되어 돌아온 김경욱!
올해로 데뷔 29년째를 맞은 30년 차 소설가 김경욱의 열여덟번째 책이자 아홉번째 소설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등 데뷔 이후 출간한 일련의 소설집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신세대’ 작가로 불리며 당대 젊은 세대의 모습을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과 함께 절묘하게 포착해냈다. 하드보일드한 문체는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독보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영화처럼 슬퍼하고, 음악처럼 외로워한다. 그래서 영화나 음악은 인용이 아니라 체험이 된다. 김경욱은 그것들을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산다”는 문학평론가 김미현의 말처럼, 일찍이 독자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김경욱 월드가 있었다. 작품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그는 늘 ‘젊은 작가’였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이기에 그 작품성에 대한 신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1~2년에 한 권꼴로 소설집이나 장편을 출간하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김경욱’이라는 브랜드를 ‘믿고 읽게 만드는’ 강력한 힘 아닐까. ‘필력’이라는 말로도 다 채울 수 없는 작가 김경욱의 힘 말이다.
하여 그에게는 많은 별명이 있다. 가장 유명한 별명은 다섯번째 소설집 『위험한 독서』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서영채가 언급한 ‘진화하는 소설기계’. 오직 쓰고 또 쓰는 것으로 자신만의 독창성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그 별명은 일곱번째 소설집 『소년은 늙지 않는다』에 와서 또 다른 옷을 입는다. 어떤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늘 새로운 소설과 ‘잘 연애하는 바람둥이’(문학평론가 백지은)가 그것.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뒤마의 장편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옛 번역 제목인 ‘암굴왕’일 텐데, 자신의 암굴에서 소설을 쓰는 평소 생활과 맞닿은 별명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허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 김경욱을 들여다본다.
“당대,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질문”이 소설이라 생각하는 김경욱은 “암굴(작업실)에서 자기 외부를 샅샅이 살펴”보는 사람이고, 이때 그가 보유한 집요한 관찰력, 예리한 통찰력, 꾸준한 실행력이 진가를 발휘하는데, 마찬가지로 이러한 능력을 겸비한 영화계 인사가 ‘브루스 웨인-배트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기계’가 진화를 거듭하여 ‘바람둥이’에서 ‘암굴왕’을 거쳐 ‘배트맨’이 되어 돌아왔다. 집요한 관찰력, 예리한 통찰력, 꾸준한 실행력의 결과물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로!
목차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돼지가 하는 일
그분이 오신다
타인의 삶
튜브
하늘의 융단
가브리엘의 속삭임
윗집 남자
이것은 내가 쓴 소설이 아니다
해설 | 이것은 당신이 쓴 소설이다 · 허희
작가의 말
저자
김경욱 (지은이)
출판사리뷰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나는 내가 되는가’
김경욱이 던지는 지금-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
그간 김경욱의 소설에서 그의 독특한 상상력은 “타자에게 집중하는”(백지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한데 이번 소설집은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라는 제목에서부터 그 시선이 ‘나’로 향해 있다. 게다가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던 ‘소설가 소설’에 이어,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소설이 자신이 쓴 소설이 아니라는 소설까지 실려 있다. 이렇게 김경욱의 소설 세계가 또 한번 낯설어진다. 김경욱이 변했다고?
어쩌면 그는 일관되게 타자에게 집중하는 경로를 영유하여 자기를 탐색해오지 않았을까. 고담시가 사실상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확장된 자아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집단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고유한 ‘나’의 목소리를 강조한 90학번 신세대 작가의 기수로 꼽히면서도 자기 외부 세계에 몰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하나를 위한 모두(All for one)’라는 집단주의를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라는 공동체주의로 전유한다. ‘세상이 어떻든 나는 나로서 오롯이 존재한다’라는 요즘 세대의 의식과는 대별되는 방식으로, 그는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나는 내가 되는가’를 물어왔다. (해설 「이것은 당신이 쓴 소설이다」, pp.283~84)
표제작이자 소설집 가장 처음에 놓인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는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 ‘김중근’의 이야기이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말할 때면” “통째로 삼켜지”고 “옴짝달싹할 수 없이 숨통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는 김중근. 그는 스스로를 삼인칭 ‘김중근’으로 지칭하며 ‘바라보는 나’와 ‘활동하는 나’를 분리하는데, 모두가 바이러스와 거리를 두어야 하듯 스스로와 거리를 두는 이 진술은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고백하는 방법이 된다. 독을 품어 포식자의 접근을 막는 ‘코스타리카 블루진’처럼 눈에 띄는 외모에서부터 원활하지 못한 소통 방식까지, 타인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무장된 그의 격리된 삶을 독자들 역시 ‘사회적 거리’를 둔 채 따라 읽을 수 있다.
‘나’에 대한 고백은 「돼지가 하는 일」에서도 이어진다. 연평도 포격 사건 나흘 뒤, 이를 취재하러 온 외국인 저널리스트 산체스를 태우고 임진각으로 향하던 택시기사 ‘조원배’는 언어도 다르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이 외국인에게 한국전쟁 때 “지뢰를 대신 밟아준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의 한 사발까지 내어준 대길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이 혼자만 간직하던 이야기를 꺼내놓은 그는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만취 상태로 소변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쪽 다리가 들려”라고 엉뚱한 말이 나와버린 상황에서 목젖이 튀어나오도록 웃는 산체스를 보며 “내 6·25든, 내 대길이든, 내 인생이든, 그 무엇이든” 존중받는 느낌을 갖는다. 오히려 같은 나라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기까지 하면서 소통이 불가능했던 조원배는 산체스와 연평도까지 가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마치 허리에서 끊긴 속담의 뒤를 끝내 알 길이 없어 궁금해하듯 산체스를 궁금해한다.
「그분이 오신다」는 김경욱의 작품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소설가 소설’이다. 단 한 줄, 단 한 단어도 써지지 않는 시간을 보내던 ‘나’는 이사를 위해 계약한 집에서 바로 전에 흉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불안해하는 아내와 달리 소설 쓰기의 물꼬를 튼다. 그것이 말을 전한 다른 부동산의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소설을 다시 쓸 수 있게 한 ‘흉사’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결국 그 단서를 찾기에 이르고, 아직 이사를 하지 않은 그 빈집에서 다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린다.
2021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타인의 삶」은 아버지의 임종 뒤에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그 속에서 아들인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밤새 아버지의 간병을 하고 돌아온 지 두 시간 만에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다시 돌아간 병원에서 “형은, 내 형은?”이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그가 장남이었기 때문. ‘나’는 과거에 집에 잠시 머물렀던 형에 대한 기억을 불러들이고, 다른 가족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지만 진실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막상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아버지가 자신이 알던 대로 비밀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일까 봐 차마 확인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돼지가 하는 일」과 함께 노인의 삶과 존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 「튜브」는 혼자 크루즈 여행을 떠난 ‘주영광’의 혼란을 담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적혔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선내 분실물 튜브의 진짜 주인을 찾는 과정은 자연스레 ‘주영광’의 아들을 찾는 일로 바뀐다. 그의 아들을 보았다는 크루즈 승선객들과 아들이 집에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주영광’의 진실 공방은 마침내 그의 아들이 선박 침몰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가짜 현실 속에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차마 자신을 고백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하늘의 융단」의 ‘곽춘근’이다. 스스로 지어준 이름 ‘곽도연’으로 살고 싶었던 그의 삶은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갔다. 임업 교사에서 영어 교사로, 사랑하는 딸과는 연락이 끊어진 채로. 그런데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아 교단을 내려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는 스스로 불순한 의도는 물론 피해 학생이 말하는 신체 접촉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증명하고 해명하기 위해 자신을 고백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은 진상조사위원회가 아닌 자신의 딸에게 먼저라는 것을 깨닫는다.
「가브리엘의 속삭임」은 성경 학교에서 일어난 성추행 논란의 진실을 그날 같은 자리에 있었던 여러 인물의 진술을 통해 밝혀가는 이야기이다. 귓속말로 성경 구절을 옮기면서 왜곡되고 변형되는 ‘가브리엘의 속삭임’이라는 게임처럼 이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 진술의 내용이 달라지면서, 사건은 진위를 가리고 그에 합당한 조취를 취하는 해결의 방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고백 뒤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말이 다시 어떤 방식의 공격이 될 수 있는가를, 혹은 그 반대의 경우로서 고백이 진실한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에서 그 누군가가 ‘자신’의 경우라면, 그것은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백은 각각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의 김중근은 ‘바라보는 나’와 ‘행동하는 나’로 자신을 분리하고, 「하늘의 융단」에서는 고백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보는 ‘곽춘근’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윗집 남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의외의 상황에서 발견하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에서 숨겨진 얼굴에 대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진짜 ‘나’의 얼굴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육아휴직 중인 ‘수영’의 생활은 전적으로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하루 중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누리는 때는 아이가 잠든 사이 나갔다 오는 잠깐의 외출이 전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외출에서 그는 우연히 어떤 여자와 동선이 겹치게 되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상대의 기색을 느끼자 “정체 모를 비릿한 열기에” 휩싸여 뒤를 쫓는다. 상대에게 위협과 폭력이 될 것이 분명한 그 추격은 “생명의 경이. 그 신비로운 조화 속 주인공”이던 그를 순식간에 괴물로 바꿔버린다.
끝으로 「이것은 내가 쓴 소설이 아니다」는 김경욱 작가 본인이 앞서 썼던 ‘소설가 소설’ 「그분이 오신다」를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또 하나의 ‘소설가 소설’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분이 오신다」는 ‘소설가 소설’을 넘어 자전소설로 분류되지만 정작 작가는 자신의 SNS에 공개 수배를 내릴 만큼 자신이 쓰지 않은 소설이라 확신한다. 이 소설이 소설가 A씨의 작품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다시, ‘사람들이 소설가 A씨에 대해 하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을 쓴 이는 누구인가, 라는 원래의 질문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소설가 A씨에 대해 한 말만 남게 된다. 그것은 정말 소설가 A씨일까?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에는 ‘나’에 대해 말하는 다양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소설 속 화자이기도 하고, 화자가 우연히 만난 타인이기도 하고, 부재함으로써 그 존재를 절감하게 하는 가족이거나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말을 옮기는 누군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 혹은 실제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익명의 존재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경유해 결국 ‘나’에 대해 말하고, ‘나’를 안팎에서 입체적으로 뜯어보는 이는 결국 ‘나’이다. 이렇게 김경욱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나는 내가 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
지구 반대편에서 열흘간 격리된 채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마지막 주의 사항은 불길한 매혹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열리는 국제 도서전. 함께 출국하는 작가들 중 현지 확진으로 귀국 명단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내가 유력했다. 불운에 당첨될 확률이라면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똑같이 우물물을 마신 동네 사람들 중에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은 나뿐이었고, 가족들과 나란히 잠든 방에 연탄가스가 새어들었을 때도 병원 신세를 진 사람은 나 혼자였다. 목적지가 『백년의 고독』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3년 만의 국제선 탑승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노트북 대신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캐리어에 챙겨 넣고 있었다. 최고의 뮤즈는 완전한 고립이다. 억울한 감옥살이에서 탄생한 『돈키호테』, 불시착한 사막에서 물 한 방울 없이 견딘 닷새가 낳은 『어린 왕자』. 근대문학의 효시 『데카메론』은 아예 페스트에 포위된 사람들이 돌아가며 들려주는 이야기 아닌가. 내게도 일생일대의 뮤즈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백년 같은 열흘의 절대 고독 속에서 창작 혼을 불사르게 된다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써야만 할 것 같았다.
귀국 날 아침 PCR 검사 결과 ‘음성’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실망했던가. 실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감사 기도를 드릴 뻔했다. 입국 심사관이 쏟아내는 스페인어 앞에서 머릿속이 새하얘진 순간부터 작가로서의 각오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백두산에 버금가는 고지대라 비말은 더 멀리 날아갔고, 낮밤이 뒤바뀌어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들이켜도 하품은 그칠 줄 몰랐다. 더구나 그곳은 불면증도 전염되는 ‘마콘도’의 땅, 마술적 리얼리즘의 심장부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작가적 본분을 망각한 채 한국에서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더 철저했고, 다시 못 올 절대 고독으로부터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콜롬비아산 커피를 마시며 빈 문서창을 멍하니 바라볼 때마다 탄식처럼 자문하곤 한다. 그날 아침의 결과가 ‘양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날짜변경선 너머에 두고 온 열흘 속에 머물 수 있었다면. 겁에 질려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스프링 노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갈 수 있었다면. 커피의 뒷맛처럼 달콤 쌉싸름한 공상은 번번이 지구 반대편 어느 골방에 갇혀 인생 작품을 완성하는 유니버스 입구에서 막힌다. 가정법의 결론이 궁금하다면 열여덟번째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이 유니버스에서도 계속 작가로 남아야 한다. 마술같이 차원의 문이 열려 제목조차 모르는 육필 원고를 가져올 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2022년 8월
김경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