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정은 함부로 깨는 게 아니야, 남세스럽게!”
루쉰, 바진과 함께 중국 3대 문호로 꼽히는 라오서
유머로 중국 현대문학의 영역을 확장한
라오서 자신이 꼽은 최고의 작품
루쉰, 바진과 함께 중국 3대 문호로 불리는 라오서(老舍, 1899~1966)의 장편소설 『이혼』이 [대산세계문학총서] 171권으로 출간되었다. 라오서는 당시에 중국 소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유머를 운용하여 중국 현대문학의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혼』은 라오서의 유머가 가장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1920년대 말 중국은 군벌 시대가 끝나고 국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군벌들은 신분만 바뀐 채 세력을 유지하고 국민들은 전근대적 관습과 인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오서는 ‘이혼’을 소재로 당시 시민들의 삶과 의식 세계를 특유의 유머로 풀어낸다. 중매와 이혼 퇴치를 사명으로 여기는 장다거, 사기꾼 샤오자오, 첩과 태극권에만 관심이 있는 우 선생, 이런 상황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라오리,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로 이루어진 관청의 모습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봉건적 폐습을 청산하지 못하는 중국 사회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적 격변기를 살아간 중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작가는 위선과 가식으로 위장하고 체면만 따지는 용속한 삶을 신랄한 비판이 아닌 연민이 담긴 유머로, 씁쓸한 웃음으로 바라본다.
목차
이혼
옮긴이 해설 _ 라오서의 웃음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저자
라오서 (지은이), 김의진 (옮긴이)
출판사리뷰
세상을 보는 창, 문학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압축 근대를 살아간 20세기 중국
다른 성性, 다른 위치에 선 두 작가의 같고도 다른 시선
루쉰(魯迅, 1881~1936), 바진(巴金, 1904~2005)과 함께 중국 3대 문호로 불리는 라오서(老舍, 1899~1966)와 루쉰이 인정한 천재 작가 샤오훙(蕭紅, 1911~1942)의 작품이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란히 출간되었다.
두 작가는 유사한 시기에 각각 다른 입장에서 서민들의 삶을 담아냈다. 『이혼』은 1933년 발표한 라오서의 장편소설이고. 『가족이 아닌 사람』은 1933년에서 1940년 사이 샤오훙이 발표한 단편 19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두 작가는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문학으로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드러냈다.
라오서는 청말에 몰락한 만주족 집안에서 태어나 의화단 운동 때 황궁 수비병이던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는 우연히 영국 체류의 기회를 얻고, 영국에서 체험한 근대 문화와 문학세계는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다. 샤오훙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딸이라는 이유로 냉대를 받고 결혼을 강요받다가 가부장적인 억압이 심한 집을 뛰쳐나와 작가가 되었다.
라오서는 뒤늦게 문학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나, 격동의 중국 근대사의 비극인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모진 모욕과 구타를 당한 뒤 세상을 떴으며, 샤오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전쟁 중인 나라의 국민으로서 힘들게 작가 생활을 이어가다 서른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비참하게 유명을 달리했다.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스러져간 두 작가는 행보가 다르기에 다른 시각으로 다른 방식으로, 누구는 유머러스하게 누구는 처절하게 세상을 담았으나, 그 둘 모두 당시 상황을 뛰어나게 담아냈다. 우연히 한 시대를 살아간 다른 시선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20세기 전반 중국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무엇보다 두 작가의 뛰어난 문재(文才)로 문학 본연의 즐거움을 주는 모처럼 반가운 중국 현대 소설이다.
밥과 결혼 이 두 가지만 해결된다면
천하가 태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재정소(관청)에 다니는 장다거는 모두의 다거(큰형님)였다. 장다거는 중매와 이혼 퇴치를 사명으로 여기며, 여러 조건의 균형을 맞춰 짝을 지어주고, 결혼 후에까지 어려움을 돌봐 그의 중매는 실패가 없다. 그러하니 혼기를 앞둔 자식이 있는 집에서는 언제나 그를 환영했다. 그런데 같은 과의 라오리가 요즘 이상하다!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며, 시골에 처자식을 두고 베이핑(베이징의 옛 이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라오리. 그가 요 며칠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이는 필시 결혼 문제다. 당장 해결 방법을 찾지 않으면 사달이 날 것이다.
장다거는 적극 나서서 시골에 있는 라오리의 가족들을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어느 집 하나 문제없는 집은 없다. 각종 다른 이유로 라오리의 직장 동료들은 이혼을 꿈꾸는데…… 여기저기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던 장다거에게도 뜻하지 않은 시련이 온다. 자유분방한 아들이 공산당으로 오인 받아 끌려간 것이다. 장다거는 아들을 구하고 다시 예전 다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재정소 식구들은 모두 이혼에 성공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깨끗하게 이혼하시죠!
1930년대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건립하는 등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베이징은 의외로 평온하고 서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베이징은 병들어 있었다. 민주 정권이 들어서고 통일을 선언하지만, 군벌들은 신분만 바뀐 채 그 세력을 온전히 유지하고 베이징에는 봉건 군벌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사회 도처에서 온갖 폭력과 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라오서는 ‘이혼’을 소재로 이러한 사회 문제와 사람들의 낙후된 의식을 묘사한다. 봉건과 반봉건의 대립을 넘어 좌익과 우익 간의 이념 대립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시기, 라오서는 중국 사회가 전근대적 관습과 인식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특히 주목한다. 이 작품을 집필하기 2년 전 중앙정부는 남녀평등, 자유 이혼, 일부일처제 등을 명문화하면서 동시에 첩을 두는 것은 혼인이 아니므로 중혼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중혼은 금지하되 축첩은 합법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논리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라는 봉건적 폐습을 청산하지 못한 중국 사회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중매와 이혼 퇴치를 사명으로 여기고 자유연애를 혐오하는, 가부장적 전통에 젖어 있는 장다거는 중매를 매개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원칙이 아닌 인간관계를 이용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혼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결국 현실과 타협하고, 여러 인물들은 위선과 가식으로 위장하고 체면만 차리려는 천박한 시민의 면모를 보여준다.
라오리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이들의 인식과 행동의 문제, 사회적 병폐 등을 자각한 인물이다. 그에게 현실은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다. 전근대적 관습과 의식이 여전히 견고하며 사람들은 계속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 것이다.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들의 의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근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라오서는 이혼에서 보이는 웃음은 씁쓸하고 눈물을 머금은 미소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대의 풍랑 속에 비극이 된 인민예술가
1937년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벌어지고, 갈등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손을 잡는다. 문인들도 각자의 이념을 불문하고 의기투합하여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이하 문협)를 결성한다. 그리고 좌우 진영의 인사들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은 라오서는 이 단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추대된다. 문협은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쓰는데, 라오서 역시 이 취지에 부응하여 소설 창작을 유보하고 대중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인 화극(話劇, 노래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 경극과 구분하여 대사로만 구성된 희곡)과 민간문예 창작에 주력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국가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고, 이를 인정받아 베이징시로부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하지만 이처럼 왕성한 창작 활동과 작품에서 보여준 당과 인민에 대한 강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라오서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다.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그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당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미국 등에서의 체류 경력 등은 그의 처지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그리고 1966년 당시 『북경문예』의 편집을 담당했던 라오서는 ‘문화대혁명’의 풍랑을 피해가지 못했다. 라오서는 어린 홍위병들의 모진 비판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고 급기야 8월 24일, 그는 북경 교외의 타이핑호太平湖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다. 인민예술가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게 인민에 대한 애정이 강했던 라오서의 불행한 죽음은 극좌적인 정치 환경이 빚은 중국 현대사의 비극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