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끝없는 발신 행위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말
여전한 ‘전위의 현재’, 오규원
한국 현대 시사에서 시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의 한 명으로, 시의 언어와 구조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탐구했던 시인 오규원(1941~2007). 10권의 시집과 4권의 시론집, 시 창작이론서를 비롯한 3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언어로써 세계의 구조를 갱신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마와 싸우는 내내 시적 언어가 가 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투명성을 보여주었던 오규원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로 15년이 되었다.
20여 년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몸담으며 유수의 많은 제자 작가, 시인들을 길러낸 훌륭한 선생이기도 했던 그를 지난 15년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해왔다. 그의 언어와 사유에 대한 ‘다시 읽기’ 역시 해를 거듭할수록 새롭고 또 두터워져온바, 그의 15주기를 맞은 올해에는 특별히 오규원의 문학 세계를 둘러싼 동시대 비평가와 연구자들의 새로운 문제 제기와 궁구의 성과를 한데 모아보고자 했다. 비평연구서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은 바로 그 결실에 해당한다.
목차
발간사 | 이광호
서문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언어 | 김언
1부
단 하나의 삶이라는 아이러니-오규원의 초기 시 읽기 | 박동억
틈의 시학, 불일치의 모더니즘-오규원의 초기 시(『분명한 사건』, 『순례』)를 중심으로 | 선우은실
사랑의 방법-오규원의 중기 시 읽기 | 안지영
고장 난 천국에 남는 글쓰기-오규원 중기 시 읽기 | 강보원
투명한 깊이-오규원 후기 시의 사진적 특성 | 박형준
시간, 흐름, 변화 그리고 살아 있음-오규원 휴기 시에 대한 소고 | 이날
2부
텅 비어 가득한 세계와 언어들-오규원 시론을 읽는 하나의 방법 | 최현식
관념에의 탈피와 ‘살아 있는’ 언어-오규원의 시론 전반에 대하여 | 소유정
신체(성) 그리고 현상학-키워드로 읽는 오규원의 시 세계 | 문혜원
사실과 사실 사이-오규원의 시 쓰기/편지 쓰기에 관하여 | 홍성희
오규원은 왜 동시를 썼을까?-오규원의 동시(론)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가정 | 김언
오규원 스쿨-시와 시론, 그리고 시창작 교육 | 세스 챈들러
오규원 연보
참고문헌(학위/학술논문 및 비평 목록)
저자
박동억
출판사리뷰
그치지 않는 질문을 동반하며 더욱 풍부한 가능성으로
살아남는 오규원 문학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의 기획은 2017년 시인의 10주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규원을 그리고 아끼는 동료, 후배 문인들과 제자들로 결성된 〈오규원문학회〉는 시인의 사진과 영상, 육필과 유품이 어우러진 복합 전시, 시인의 사진집과 헌정시집 출판, 『현대시작법』을 경유한 시 강좌와 젊은 시인들의 릴레이 시낭독회 등을 앞서 선보이면서 이후, 오규원 시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심포지엄과 단행본 출간을 예고했다. 오규원의 시 세계가 여전히 현장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이 집중하여 다루는 텍스트 중 하나라는 점, 그만큼 아직도 탐구할 영역이 많이 남아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바로 이 책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는 출발하고 있다.
현재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와 연구자 12명(박동억, 선우은실, 안지영, 강보원, 박형준, 이날, 최현식, 소유정, 문혜원, 홍성희, 김언, 세스 챈들러)이 필자로 참여하여, “간단히 명사 몇 개로 명명되고 규정되는 것을 넘어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사로써(혹은 동사로서) 발견되고 서술되는 과정”(서문)에 놓인 오규원 문학 세계에 결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하고도 충분히 논쟁적인 12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오규원 관련 학위논문과 학술논문 목록의 집계 현황은 “오규원 문학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두께를 더해가면서 문학의 역사를 이뤄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으로 눈길을 끈다. 비교적 신진 비평가와 연구자가 주를 이뤄 오규원 시 세계 전반을 편중 없이 고루 재조명하고 분석한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는 앞서 그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두루 살폈던 『오규원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2002)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동시에 앞으로 씌어질 오규원 문학의 새로운 이해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더욱 깊다.
1부의 첫머리에서 평론가 박동억은 오규원의 생애에서 어머니의 부재로 집약되는 유년의 트라우마와 그의 초기 시집 『분명한 사건』과 『순례』에 담긴 실존적 불안과 절망을 연결해서 살핀다(“요컨대 그는 시 쓰기를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았던 “허상뿐인 아버지”와 세상을 떠난 어머니 대신 자신을 보듬어줄 “나의 자궁”을 찾아 헤매는 여정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부성과 모성의 결핍은 도리어 “나의 자연”을 서술하는 방식, 즉 시인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상을 표현해야 하는 결정적 동기로 설명되고 있다.” “오규원의 시 쓰기가 홀로 서는 방식이라는 것, 즉 부모의 목소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19쪽). 이어 평론가 선우은실은 오규원의 초기 시에서의 언어적 규범과 기호화 작업의 원리를 살피면서, ‘감각의 재분배’ 차원에서 『분명한 사건』과 『순례』 사이에 씌어진 장시 「김씨의 마을」의 현대적 독해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있다(“그의 시적 흐름은 어떤 규정성들을 계속해서 탈각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는데 이는 그야말로 오늘날의 자기 정체화의 감각과 마주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64쪽).
평론가 안지영의 글은 불행한 세계에 대해 불완전한 언어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움직이는 사랑의 언어로 돌파하고자 한 오규원 시의 의의를 중기 시를 중심으로 되짚고 있다(“오규원에서 사랑이란 ‘함께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 있기 위해서는 현실을 깨어 있는 눈으로 봐야 한다고 보았다.” “시인은 단 하나의 언어로 존재의 본질을 못박아두기보다 사물이 다른 이미지로 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존재”/ 66쪽, 77쪽). 한편, 시인이자 평론가인 강보원 역시 오규원의 중기 시를 살피되 이 시기를 굵직하게 특징짓는 아이러니의 의미를 재음미하면서 결과적으로 동어반복의 불모성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언어를 진단한다(“오규원이 수많은 시편들을 통해 끈질기게 다루었던 자유의 문제는 바로 언어의 바깥 없음, 의미 없음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오규원은 아이러니가 무의미 속에서 자유를 찾는 형식이라는 것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었다.”/ “오규원은 무엇보다 시가 생을 걸러내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언어의 무의미라는 수렁에 빠진 후에도 끝내 그곳에 머무르고자 했던 이유는 그곳에 근사하지 않은 생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96쪽, 99쪽).
제자이자 시인인 박형준은 오규원 후기 시의 핵심을 이루는 ‘날이미지’에 대해 “날이미지로 쓴 짧은 시”와 다름없다 평한 사진 산문집 『무릉의 저녁』(눈빛, 2017)을 참고하면서 오규원이 다다른 극점과 함께 ‘해방의 이미지’로 재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날은 날이미지시에서 ‘사실적 환상’을 통해 ‘시간 이미지’가 구현되는 방식을 살피면서 ‘시간성’이 나타나는 방식을 불교적 관점에서 조명한다(“오규원의 날이미시는 ‘시간성’을 통해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른 사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우주 만물은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기에 한 모양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제행무상의 사유를 드러낸다.”/140쪽).
2부의 첫머리에 실린 평론가 최현식의 글은 오규원 사후에 출간된 사진집을 포함한 시론집 5권(『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가슴이 붉은 딱새』, 『날이미지와 시』, 『무릉의 저녁』)에 담긴 각각의 핵심을 짚어가면서 시인의 시 정신의 궁극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우리의 영혼은 전적으로 절대적인 통제에 갇히거나 또는 그런 세계로 인간을 몰고 가려는 의식이나 의지와는 다른 부드럽고 열린 존재여서 균열이 나고 상처가 생기지만, 그 균열과 상처가 세계와 어울려 새로운 조화를 이룩한다”/ 168쪽)를 사유하고 있다. 평론가 소유정의 글은 오규원 시론의 변모 과정이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시에 대한 첨예한 사유의 진화 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논증한다(“단지 언어 체계 안에서의 고착화된 의미에 대한 사유뿐만 아니라 시인이 시를 쓰던 당대의 이념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183쪽).
평론가 문혜원은 ‘신체(성)’을 오규원의 초기 시를 조명하는 키워드로 삼아(“수사학적 도구”로서의 신체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의 ‘신체화’와 다중감각”까지) “주체와 대상의 동등한 지위의 근거”(199쪽)로서 현상학적 사유와 연결되는 후기 시로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어 평론가 홍성희는 ‘편지 (쓰기)’를 키워드로 삼아 초기 시를 자신만의 주소, 즉 실존의 근거 찾기에 대입하고, 중기 시를 타진된 발신으로 이편과 저편을 연결하고픈 기다림(사랑)의 방법론으로 읽는가 하면, “빈약한 상상력”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장면에서 후기 시 ‘투명한 언어’의 세계를 끌어내기에 이른다(213쪽). 문학을 끝없는 발신 행위로 남겨두고자 했던 오규원의 시 세계가 발신을 발신이지 못하게 하는 겹겹의 부재들과 마주하면서(224쪽) 긴장된 진동을 일으켜왔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시인 김언의 글은 오규원의 시력에서 예외적인 지점에 놓이면서 그의 시적 지향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시 창작에 관심을 둔 이유와 근거를 살피고 있다(“‘소박함’을 기준으로 동시를 시와 별개의 장르로 두는 인식과, 시와 동시 양자 모두를 관통하는 ‘투명성’의 추구가 시와 양립할 수 있는 오규원 동시의 창작과 성립 근거를 제공한다.”/ 243쪽). 문학과 학술 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세스 챈들러는 ‘날이미지’로 집약되는 오규원의 후기 시론과 그의 시 창작 교육론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구체적인 논거를 들며 증명한다(“이러한 창작 교육의 시기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는 중기 시론과 접맥되어 학교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오규원의 고민이 드러난 때이다. 다른 한편으로 창작 교육에 대한 모색은 후기의 날이미지시·시론의 형식적 방법론을 안겨주었고, 그 인식적·정동적 기반을 깔아놓았다. 그 양극 사이에서 시와 시인의 본질, 시적 언어의 특징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중견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의 산물이 바로 지금도 시 창작 강의의 교재로 널리 쓰이는 『현대시작법』이다.”/ 250쪽).
“오규원에게서 시간의 일점 일점은 한 존재와 한 사물이 바로 그 존재-되기와 사물-되기로 자신을 초월하는 장소였다. 토마토는 붉다고 말할 때 토마토는 토마토이면서 토마토가 아니었다. 존재가 존재 그대로 있음으로써, 사물이 사물 그대로 있음으로써, 초월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한다는 것,
그것은 오규원에게서만 가능한 일이었다.”(평론가 황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