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름다움 없이, 깨달음 없이, 애착 없이,
아무것도 아닐 지속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설을 사랑하기 위하여
정교한 문장과 독특한 사고실험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양선형의 두번째 소설집 『클로이의 무지개』가 출간되었다. “언어를 실제처럼 오인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소모시키고 고갈시키고 탕진시킨다”(문학평론가 강동호)는 평을 받은 첫 소설집 『감상 소설』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중편 「클로이의 무지개」를 포함하여 그동안 신중히 고치고 다듬은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문학과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는 양선형은 『클로이의 무지개』에서 실체 없는 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한다. 침몰한 보물선과 같은 문학이 언젠가 현실이라는 수면 위로 떠오르리란 기대를 놓아버리지 않고 기꺼이 영원의 심연 속을 헤맨다. 그러한 여정 속에서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은 상호텍스트적으로 얽히면서 놀랍도록 풍부한 서사적 미로를 직조해낸다. 그러므로 『클로이의 무지개』는 언어로만 발생시킬 수 있는 시공간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無)에 가닿는 경험을 선사한다. 공허를 관통해서만 가까스로 체험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환상, 찬란한 무지갯빛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목차
가면의 공방
거위와 인육
클로이의 무지개
프록코트 혹은 꼭두각시 악몽
해설ㆍ뼈와 꿈_강보원
작가의 말
저자
양선형
출판사리뷰
정교한 문장과 독특한 사고실험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양선형의 두번째 소설집 『클로이의 무지개』(문학과지성사, 2022)가 출간되었다. “언어를 실제처럼 오인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소모시키고 고갈시키고 탕진시킨다”(문학평론가 강동호)는 평을 받은 첫 소설집 『감상 소설』(문학과지성사, 2018)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중편 「클로이의 무지개」를 포함하여 그동안 신중히 고치고 다듬은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문학과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작가의 말」)다는 양선형은 『클로이의 무지개』에서 실체 없는 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한다. 침몰한 보물선과 같은 문학이 언젠가 현실이라는 수면 위로 떠오르리란 기대를 놓아버리지 않고 기꺼이 영원의 심연 속을 헤맨다. 그러한 여정 속에서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은 상호텍스트적으로 얽히면서 놀랍도록 풍부한 서사적 미로를 직조해낸다. 그러므로 『클로이의 무지개』는 언어로만 발생시킬 수 있는 시공간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無)에 가닿는 경험을 선사한다. 공허를 관통해서만 가까스로 체험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환상, 찬란한 무지갯빛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선형의 소설은 무겁다. 그리고 가볍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어떤 순연하면서도 난잡한 계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면서도, 현실을 재현하거나 모사하는 대신 번역하는 소설의 역량을 만끽하게 만든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현실을 초과하는데, 그건 상상력이나 언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인간의 편이 아닌 소설의 편에 선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정연(서평가)
문학을 둘러싼 추문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거나, 종언 혹은 죽음이라는 말로 그것에 또 다른 오라를 부여하는 대신, 양선형은 이 파산 이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종언이나 죽음과 달리 파산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을 남겨둔다. 말하자면 그의 시간은 정산의 시간이다. 그는 문학이 구제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 있음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다. 강보원(시인, 문학평론가)
없지만 있는 보물을 찾아서
양선형은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소설의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얼핏 무관해 보이는 서사들을 뒤섞어 나열하고 이들이 서로 중첩되는 순간에 주목한다.
「클로이의 무지개」는 “오징어 한 마리가 광막한 대양 아래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오징어는 추후에 한 더벅머리 청년이 가지고 노는 닌텐도 화면 속 “히든 보스인 크라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러므로 바다 한복판에서 크라켄을 만나 고군분투하는 청키와 팽키의 이야기는 게임 속 이야기일 수도, 혹은 갈라파고스 회장이 침몰한 보물선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양선형은 다층적 서사가 일으키는 착란을 이용하여 단일한 이야기 혹은 관점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자 한다. 어쩌면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문학의 숭고한 가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굴하고자 한다.
갈라파고스 회장은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심해의 현실을 직접 수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영상을 손보는 행위를 통해 그토록 찾기를 희망했던 난파선을 잿빛 심해로부터 차츰 발생시켰으며, 갈라파고스 회장에게 자신이 수선한 현실이란 진짜 현실과 분간되지 않았다. 때문에 갈라파고스 회장이 정말 사기꾼이냐 아니냐의 여부 또한 보물선이 수면을 향해 떠오르기 전까진 보류된 채로 남아 있었다. (「클로이의 무지개」, p. 205)
실패를 향유하는 글쓰기
『클로이의 무지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가 스스로 문학이 환영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선형은 자신이 욕망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한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공허는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문제야. 그것을 인정해야 해. 그는 읊조렸다. 그럼에도 이 공허를 거부하거나 긍정하기 위한 다양한 우회로, 바보 같고 어리석은 시도들, 분기하고 달아나며 폭죽처럼 터지는 착란의 궤적이 흩뿌려져 수놓인 공허의 천체가 이전과 같이 무의미하지는 않아. 나는 그것을 믿어. 그는 가느다랗게 뇌까렸다. 나는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거야. (「거위와 인육」, p. 78)
양선형이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문학을 끊임없이 탐문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작가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무의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인 “공허”를 끌어안고자 한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자신이 그 실패를 진심으로 향유하는 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삶과 문학은 지속되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클로이의 무지개』에는 한 젊은 작가가 문학이라는 “눈먼 일각수”(「클로이의 무지개」)에 바치는 순도 높은 열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글쓰기가 투명한 빛에서 시작되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궤적을 좇는 일에 불과할지라도 끝끝내 소설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으로 가득하다.
일각수는 자신을 인도하는 헝겊의 무지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찬란한 광학적 환각이 소진되고, 공중에서 버둥거리던 다리가 느닷없이 아래로 곤두박질할 때까지. 그러나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고도를 질주하고 있었기에 일각수의 포물선이 내려앉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일각수를 마중하는 낙원의 입구였다. (「클로이의 무지개」, pp. 199~200)
■ 작가의 말
나는 이 소설집 속에 표현된 많은 실패담과 무관하게 나의 글쓰기가 일종의 성공담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더 낙관적으로 말할 기회를 달라. 나는 승리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내가 문학과 세계에 진 빚을 전부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승리는 동그랗고 근사한 영(0)으로서의 승리일 것이다. 무에 관한 책을 다 쓰고 난 뒤 자축할 겸 피자에 맥주를 마시고 잠에서 깬 다음 날, 나의 출근길이 평소와는 달리 아주 행복하리라고 상상하면 기분이 좋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일까?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설빈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인생에 성공했다고 말할 것 같다. 이설빈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
로 나의 착각과 과대망상에 대한 장난스러운 일침을 날리겠지. 정신 좀 차려라. 그런 말이면 좋겠다. 그럼 평소대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제 읽었던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보다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