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밀림에서 펼쳐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기묘한 환상
오라시오 키로가를 통해 만나는 중남미 환상문학의 진수
20세기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이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9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키로가는 「목 잘린 닭」 「깃털 베개」 등의 단편을 통해 인간의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비극적 순간을 기묘한 환상이라는 토대 위에서 펼쳐 보이며 중남미 환상문학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키로가의 작품 대부분은 단편소설이며, 평생에 걸쳐 2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부록으로 실린 「완벽한 단편 작가를 위한 십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단편소설에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들은 그를 세계문학사에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로 남게 했다. 로베르토 볼라뇨가 단편소설 창작을 위해서는 “오라시오 키로가를 읽어라”라고 조언할 만큼 키로가의 작품은 단편소설 특유의 매력과 진수를 보여준다.
키로가는 그간 볼라뇨뿐만 아니라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 스페인어권 거장들의 찬사를 받아왔으나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번에 출간되는『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은 「목 잘린 닭」 「깃털 베개」 등 키로가의 대표작들과 「아나콘다의 귀환」「유배자들」「일꾼」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을 한데 모은 단편집이다.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은 주로 키로가가 매혹되었던 미시오네스 지방의 밀림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생생한 생명력을 가진 밀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통해 키로가 문학의 한 축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목 잘린 닭 | 깃털 베개 | 표류 | 일사병 | 달품팔이 | 야과이 | 따귀 한 대 | 아나콘다 | 사막 | 일꾼 | 아나콘다의 귀환 | 유배자들 | 타콰라 대나무 저택 | 죽은 남자 | 인시엔소 나무 지붕 |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 파리 떼 | 아들
부록 - 완벽한 단편 작가를 위한 십계명
옮긴이 해설 - 죽음을 통해서 삶을 그리는 작가
작가 연보
저자
오라시오 키로가 (지은이), 임도울 (옮긴이)
출판사리뷰
죽음을 통해서 삶을 그리는 작가
키로가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죽음이 빈번히 등장한다는 것이다. 작품 속 죽음은 등장인물의 특별한 운명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에 대한 형벌이나 삶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표류」나 「죽은 남자」의 주인공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지만 어느 순간 죽음이 찾아오고 여기에는 어떠한 교훈도 없다. 대부분의 다른 작품 속 인물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키로가는 이들의 ‘죽음’에 어떠한 인과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냉정한 필치로 그려낸다. 단지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인간에게 죽음은 삶처럼 주어진 것이며 이는 실로 자명하여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1878년 우루과이 살토에서 태어난 키로가는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었을 즈음 오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양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지만,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양아버지는 그가 열일곱이 되었을 때 발가락으로 엽총을 쏘아 자살한다. 이후 친구와 총기를 손질하던 중 벌어진 오발 사고로 친구가 즉사하고, 그는 조사를 받고 무죄가 입증되었으나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에도 첫번째 부인의 자살 등 키로가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는 결국 그 자신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데까지 드리워진다. 작품과 작가의 삶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키로가 개인의 삶에 ‘죽음’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는 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필연적인 죽음을 보여준다. 키로가의 소설 속 많은 등장인물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실 그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나 종결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혹은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 죽는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에 삶이 의미 있는 것이다.
밀림에서의 삶과 떠도는 존재들
키로가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제는 미시오네스 지방에서의 삶이다. 1903년 예수회 유적 탐방대 동행을 계기로 미시오네스의 산이그나시오를 방문한 키로가는 이 지역 밀림에서 살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그 후 1910년 드디어 아내와 함께 미시오네스 지방의 밀림으로 이주한다. 작품 곳곳에 그가 살았던 방갈로와 주변 환경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가 밀림에서 만났던 사람들 또한 소설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특히 「아나콘다」 「아나콘다의 귀환」 등 밀림의 동물을 중심으로 한 소설에서는 그 묘사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뜨거운 태양과 황홀한 여름밤, 가뭄 끝에 마침내 도착한 기다리던 비 등에 대한 묘사는 밀림에 가본 적 없는 독자들의 눈앞에도 밀림이 펼쳐지게 만든다.
미시오네스 지방의 이야기를 채우는 존재는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 유배된 달품팔이들, 어느 시기 흘러들어온 손쓸 수 없는 주정뱅이들…… 그야말로 「유배자들」의 첫 문장처럼 “모든 국경 지방이 그런 것처럼, 그림처럼 아름다운 인물이 넘쳐”난다. 열대 밀림과 그 속에 잠재된 죽음, 그리고 유배자들의 삶이 교차하며 화수분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변두리이자 국경 지방, 작가 자신도 유배되어 살았던 키로가 문학의 토양인 미시오네스 지방이다.
변경에 선 작가 키로가, 그의 삶과 문학
미시오네스 지방을 배경으로 한 키로가의 소설들에는 여러 언어와 문화가 혼합된 ‘국경 지방’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미시오네스는 브라질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으로 서로 다른 나라의 경계가 되는 동시에 과라니 원주민 문화와 예수회 시절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흘러들어가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만나고 헤어지며 죽음을 맞이한다. 키로가는 국경 지역이라는 ‘변경’을 배경으로 떠도는 사람들, 흘러들어온 사람들을 세심하게 그려냈다. 비평가 레오노르 플레밍은 키로가 작품의 특성을 ‘변경邊境’으로 규정하며, 키로가의 작품이 중심을 벗어나 경계에서의 불안정하고 격렬한 삶으로 독자를 이끈다고 평하였다.
키로가 역시 우루과이 살토에서 태어났으나 학업을 위해 수도인 몬테비데오로 떠났고 이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파리 등을 오갔으며 결혼 후에는 밀림으로 이주하여 ‘변경’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여정에서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200여 편의 단편을 썼다. 이 책의 부록 「완벽한 단편 작가를 위한 십계명」의 8번 항목을 보면 그가 소설 창작에 대해 가진 원칙과 확신을 확인할 수 있다.
8. 너의 인물들의 손을 잡고 굳은 마음으로 결말까지 데려가라. 당신이 설계한 길 밖의 다른 건 쳐다보지도 말아라. 그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게 더 없는지 그 인물들이 놓치고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이 뭔지 보느라고 정신 팔지 말아라. 독자들을 남용하지 말아라. 단편소설이란 찌꺼기를 다 걸러 정제된 소설이다. 설사 아니라고 해도 그냥 이것을 하나의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여라. (p. 343)
변경의 삶을 살며 그것을 자양분으로 소설을 쓴 작가 키로가. 소설 속 사람들은 낯선 곳에서, 고난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고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다시 못 볼 아름다운 광경과 만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시공간을 넘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가슴 속 열망에 휘둘리고 끝없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그 시도들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은 그렇게 지속되는 것임을 키로가는 소설을 통해 생생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