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편지, 가장 뜨거운 선언이 되다
버지니아 울프의 가부장제와 파시즘, 전쟁 비판
『3기니』는 1938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로, 흔히 울프의 에세이 대표작 『혼자 쓰는 방A Room of One’s Own』(1929)과 함께 읽히거나 그 후속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혼자 쓰는 방』이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여성의 현실을 살펴보았다면, 『3기니』는 여기서 더 확장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에세이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남성 법조인에게 여성 작가가 보내는 한 통의 긴 편지다. 편지의 저자는 ‘고학력 남성의 딸들과 누이들’의 희생과 원조로 지탱된 남성 엘리트 교육의 실패를 통렬히 지적하고 남성 중심의 국가주의가 벌이는 전쟁에 반대한다. 이 편지는 특정 계급과 성을 소외시키는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한, 전쟁을 부르짖든 반대하든 모두 공허한 대의명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반전론을 주장하는 아웃사이더로 남겠다는 선언으로 끝맺는다.
울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두 차례의 큰 전쟁과 파시즘의 발흥, 문학·예술사적 대전환, 여성의 정치 참여와 교육·취업의 권리를 위한 투쟁 등의 시대적 격변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며 이에 대한 울프의 예리한 시선이 작품 전체에 잘 드러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울프는 방대한 문헌과 통계 자료, 정교한 논리와 사회 곳곳을 향한 거침없는 비판, 풍자와 아이러니를 통해 가정·사회의 위계질서와 파시즘의 유사성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당시의 보수적 애국주의와 전쟁 열기에 정면으로 맞선다.
목차
하나
둘
셋
미주
옮긴이의 말
버지니아 울프 연보
저자
버지니아 울프
출판사리뷰
가장 실험적인 울프의 에세이 『3기니』
『3기니』는 편지와 주석의 교차 편집이라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에세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고학력 전문직 남성’의 한 전형이지만 허구의 인물이다. 울프는 이 긴 편지에 수많은 주석을 달았는데, 간략한 서지 정보에서부터 소논문에 가까운 긴 글까지 다양한 분량과 형태와 성격을 지닌다. 에세이의 형성 과정 또한 특이하다. 울프는 1934년에 2만 단어, 900페이지에 이르는 액자소설 형식의 대작 『파지터가 사람들The Pargiter Family』의 초고를 끝냈다. 이 작품의 ‘소설’ 부분은 울프 생전의 마지막 소설인 『세월The Years』로 완성되었고 ‘강연’ 부분은 『3기니』의 바탕이 되었다.
울프는 『3기니』의 집필을 위해 오랫동안 스크랩북(신문 기사, 전기와 역사의 인용문, 울프 자신의 논평 등의 자료 모음)을 만들었다. 이를 재료로 남녀의 격차를 지표로 보여주고 국내외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제시하는가 하면 당시 유력 인사들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실명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이 에세이는 현실에 밀착해 있지만 곧바로 프로파간다로 직진하지 않고 중층적인 서술과 구성을 통해 천천히 에둘러, 그러나 집요하게 결론으로 향한다. 편지와 편지의 바깥 그리고 편지 속 편지, 픽션과 논픽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건조한 리포트와 통렬한 풍자와 조롱, 차가운 논평 등을 오가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글쓰기 형식을 취한다. 탁월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울프는 평생 수많은 에세이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에세이 형식을 성찰했고, 작가 울프는 그런 성찰을 바탕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에세이들을 썼으며 『3기니』는 울프의 에세이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이다.
이 실험적인 에세이의 맥락을 밝히고 행간을 메우는 옮긴이의 노력 역시 주목할 만하다.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옮긴이 또한 문헌적 정확성과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는 꼼꼼한 주석을 추가했다. 상호 참조하여 읽어야 하는 부분이나 문학(사)적 전거에서 유래한 내용도 주석으로 짚었다. 강연에서 출발한 글인 만큼 그 문체적 특징을 최대한 부각하여 마치 광장에서, 토론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단호하고 생생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옮겨냈다.
치열한 ‘전투’와 3기니의 행방, 울프의 새로운 반전론
전쟁을 막기 위한 단체 가입과 지원을 요청하는 남성 법조인에게 보내는 여성 작가의 편지라는 중심 설정을 취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응답은 지연된 채 여자 대학 개축 지원 단체와 여성 취업을 돕는 단체 각각에 보내는 편지 속 편지가 등장한다. 이들 편지를 써나가는 과정에서 영국 사회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전투’가 회고된다. 여성 참정권 운동(‘웨스트민스터 궁의 전투’), 여자 대학 출신자들의 학위 인정(임용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을 둘러싼 논쟁(‘대학교들의 학위 전투’), 공무직 고용 및 임금의 남녀 격차(‘화이트홀의 전투’), 여성의 의과대학, 예술 학교 입학 저지(각각 ‘할리 스트리트의 전투,’ ‘왕립예술원의 전투’) 등이다. 이를 통해 조망되는 영국 사회는 지난한 투쟁으로 여성의 교육과 경제 활동, 정치 참여 등에서 약간의 성취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여성이라는 성과 계급이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을 받는 사회다. 이 여성 작가가 남성 법조인의 질문과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를 책 전체 분량에 걸쳐 상세하게 서술한 이유도 당시 사회와 파시즘 체제의 유사성을 외면하는 남성들의 기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 활동 외에는 그 어떤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에 직간접적인 협력을 거부하겠다는 다짐, 현재의 위계질서를 지탱시키는 그 어떤 상징이나 지위, 심성도 갖지 않겠다는 각오, 현 체제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는 그 어떤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겠다는 결심, 즉 ‘아웃사이더’로 남겠다는 선언으로 편지는 끝을 맺는다. 이 선언과 함께 위의 세 단체에 각각 1기니씩 기부하기로 하면서 말이다.
‘고학력 남성의 누이이자 딸’이라는 울프 자신이 속한 계급 여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때로는 치열한 자기반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유한계급 지식인이자 정신 질환과 자살이라는 전기적 요소가 만들어낸 울프에 대한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부순다. 울프 당대의 당면하고도 현실적인 문제를 역사적이고 급진적이며 실험적인 방식으로 써낸 이 작품은 차가운 통찰이자 뜨거운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