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는 파괴적인 음향신호이다”
소설, 혹은 정교하게 디자인된 소리, 악보, 기억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신종원의 첫 소설집 『전자 시대의 아리아』가 출간되었다. “소설 속의 공간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과정이 대단히 정교”할 뿐 아니라, 이렇게 “단단하게 쌓아 올린 세계를 허투루 다루는 장면이 거의 없을 정도”라는 평을 받았던 당선작 「전자 시대의 아리아」가 표제작으로 실렸다.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모인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안에 담긴 다성적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신종원의 주된 관심사가 ‘음악’에서부터 점차 ‘음향신호’와 ‘소리’ 자체로 확장되어왔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기억을 형성하고 역사를 구축하는 소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음악적 질서. 작가는 이를 기민하게 포착하여 세밀하게 기획된 서사 안에 녹여내고 스스로 강력한 지휘자가 되어 정돈된 리듬으로 풀어낸다. 다르고 다변하는 낯선 목소리들, 소설로서 생동하는 사운드 텍스트 텍스처가 이제 당신의 눈을 사로잡을 차례이다.
목차
밴시의 푸가
전자 시대의 아리아
멜로디 웹 텍스처
옵티컬 볼레로
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
비밀 사보 노트
보이스 디펜스
작은 코다
작품별 주석 및 참고자료
해설 | 전자 시대의 교향곡 ㆍ 이소
작가의 말
저자
신종원
출판사리뷰
목소리를 위해 설계된 소설
가장 음악적이면서도 가장 회화적이고 또한 가장 언어적인 텍스트 (문학평론가 우찬제)
확고하고 집요한 고집의 가능성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화자를, 스피커를 믿어주세요. 이들이 자신의 말하기로 음악적 질서를 소진시킬 수 있도록. 그래서 종장에 이르러 세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괜찮으시다면 함께 지켜봐주세요.
- 신종원 『소설 보다: 가을 2020』 인터뷰에서 미래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처음에는 아무런 표지 없이 공백뿐이던 선들 사이에 점점이 검은 표식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낮에 들은 음악의 그림자가 분명하며, 달빛 아래 성실하게 받아쓰는 자동기계가 하나 있어, 너는 마침내 한 가지 악보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 들리거나 말거나. 동거인에게 속삭인다. 네가 듣는 음악. 나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어. 입술을 우물거린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_「멜로디 웹 텍스처」
늘 같은 조합의 책으로 서가를 어지럽히는 도서관 유령(「밴시의 푸가」), 일제강점기 고문 시설이던 적산가옥에 울려 퍼지는 음성 기록(「전자 시대의 아리아」), 베란다에서 음악으로 실을 잣는 거대한 거미(「멜로디 웹 텍스처」)…… 이런 설정들로 인해 독자는 기괴한 첫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읽다 보면 암호, 음향 혹은 패턴들로 세공된 서사와 그 안에 쌓여가는 목소리들 가득한 소설 세계를 만나게 될 뿐 아니라, 소설의 결말부에 이르러 고요하고도 드라마틱한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언뜻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문학과 인문서를 즐기는 기본 체력만 있다면 앞서 인용된 인터뷰의 제안처럼 화자를 믿고 끝까지 따라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든 종장에 이르러 그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독서의 쾌감은 작지 않을 거라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전기the biography of the object”, 감각으로 기록된 기억
옵츄라는 하나의 시선이고, 사람들은 이 과묵한 눈동자가 언제 처음 기록을 시작했는지 모를 것이다. 아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옵츄라는 고생대 말기, 판게아 내륙의 하트랜드 사막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미래의 종족들에 의해 아프리카라고 이름 붙여질, 메마른 황무지 한복판에서. 오늘날 지하 깊숙이 매장된 일부 퇴적암들은 저마다 미세한 연삭 자국을 간직하고 있다.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깎이거나 다듬어진 흔적들. 지금 잠시 접사 렌즈를 빌려다 쓸 수 있다면. 당신은 광물 표면에 새겨진 3밀리미터 깊이의 스크래치들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_「옵티컬 볼레로」
신종원의 관심은 문제적 개인의 ‘개별적 삶’에 있지 않고, 오히려 사물이 통과해온 역사의 연속에 있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소는 신종원의 이러한 남다른 접근법을 “사물의 전기”라 칭하고, 여기에서의 ‘사물’ 개념은 “공간이나 텍스트나 이미지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고생대 말기 광물로 제작된 캐논 카메라의 시선(「옵티컬 볼레로」)이나 스트라디바리에 의해 제작된 뒤 여러 연주자를 거쳐 박물관에 이른 바이올린의 침묵(「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으로 제시되는 이 사물들의 역사는 각종 변형과 흉터를 통해 전해지고 아카이빙된다. “소설적 뮤지올로지”라고도 불릴 만한 이 전략은, “우리 역시 역사적 잔해의 일종이고 사람이 아닌 매체가 기억의 주체임을 절감한다면, 이 사물의 전기에 우리를 기입할 방법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점에서 또한 읽는 이를 매료시킨다.
새로운 시작을 예고할 작은 코다coda
음악으로 따진다면 종결부. 이른바 코다에 이르는 과정이다. 반주도, 화음도 없는 무조음 칸타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죽지 않고 남은 세이렌들은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인간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려고 육지로 나온 거예요. 그게 현전하는 모든 작자 미상 민요들의 기원이에요. 소리꾼이 물을 수도 있다. 가령, 그럼 「후리소리」도 그들이 만들었다는 겁니까? 종연은 이것을 모호하게 부인해도 좋다. 그냥 가설이에요. 어차피 나중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_「작은 코다」
음향 기기로 인해 음치가 된 세이렌 종연이 우리 민요 「다대포 후리소리」를 배우는 과정을 다룬 「작은 코다」로 이 소설집은 끝을 맺는다. ‘코다’가 음악의 종결을 의미하는 동시에, 돌림노래의 새 시작을 여는 터닝포인트이듯, 완독에 이른 당신은 이 패기 넘치는 신인의 ‘다음next’ 또한 엿볼 수 있다. 데뷔 당시 당선 소감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많은 예술가를 호명한 뒤 “이들이 나를 앞서가는 성부들이라면, 나는 다만 뒤를 따라가는 음향신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적었던 신종원. 고전classic의 매혹 속에서 자신만의 실험을 추진해가는 그는 감각하고 기록하여 기억하는 음향-텍스트의 공인(工人)으로서 매일 한 자, 한 줄의 공백과 더께를 밀어내가며 누구보다 새로운 감각을 갱신해나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