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공허와 부재에서 끌어 올린 김경후의 세계
놓쳐버린 것들에 다가서려는 고독의 언어
2019년 김현문학패를 수상한 시인 김경후가 첫 시집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를 펴냈다. 김경후는 ‘사랑이 살과 뼈를 태우는 연옥(煉獄)이라는 사실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냈고(장석주), “공허로부터 폐쇄적인 세계와 자기 파괴적인 이미지를 불러내는 데 주력해왔다”(이재원)는 평을 받으며, 잃어버린 것들을 좇기 위해 저도 모르게 가장 아프고 절박한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시적 화자에 관한 시편들을 보여왔다.
김경후의 시집 곳곳에는 한때 함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흔적으로 가득하다. 화자의 삶을 채우는 것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남은 “사라진 일”(「라이터 소년」)이며, “죽은 후에 살아남은 것들”(「반지」)이다. 이미 사라진 것, 사라졌기에 ‘그림자’로만 남은 자리를 보살피는 화자의 마음 상태를 이 책의 해설을 쓴 김영임은 ‘고독’이라 부른다. 과거의 ‘거기’였지만 지금은 지나쳐버린 곳, “어떤 사랑이 지구에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는 곳, 하지만 “보이지 않”기에 매번, “여기일까, 뒤돌아”보는 홀로 남은 이의 마음에서 ‘고독’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우리라.
목차
I
뒤 /제라늄 /손 없는 날 /넙치 /저만치 여기 있네 /서예 시간 /재떨이 /원룸 전사 /때 /차렷 /젓가락 행진곡 /사각지대 /라이터 소년
II
반지 /툭 /없는 이별 /기막힌 밤 /오로라 여행 /베개 /항아리 /휴지 /일교차 /단풍 /흰죽 /목각 /소머리국밥
III
수렵시대 /책 벽 /수행 중입니다 /해부학 강의 /벽을 나르는 사람 /돈 신의 극장에서 /절뚝거리는 골목 /긁다 /객실 /말미고개 /봄밤 /십이월
IV
두 번이면 영원 /장미처럼 /곁 /스타일 /원룸 전사 /수조 /쇼윈도 /달팽이 /슈퍼문 /도요 /파양 /헤어질 사람이 없는 사람
해설김영임솔리테르solitaire에서 솔리데르solidaire까지
저자
김경후 (지은이)
출판사리뷰
"서리 덮인 유리창에
오늘은 봄날 하고도 하루 더,라고 씁니다"
그의 시집에 대해 말할 때 시의 바탕으로 꼽혀왔던 ‘상실’ ‘부재’와 같은 단어들은 이번 시집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하며 더욱 깊고도 정제된 쓸쓸함을 자아낸다. 김경후의 시를 장악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외로움은 우리의 곁을 맴돌고 있기도 하기에,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의 고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김경후의 언어로 지어진 시 세계는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리라 감히 짐작해본다”(김영임).
예전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것들
흔적으로 남은 자리를 지키는 화자
거기가 바로 여기네, 이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의 그림자 사진, 핸드폰을 본다, 이번엔 너무 지난 그림, 그는 그늘, 여기는, 신호 없음, 연결 상태를 확인해주세요, 빨간 신호마다 과속으로 지나친 여기, 어디지,
[……]
우주정거장은 밤의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 그는 그늘, 다시, 우주정거장은 돌고, 어떤 사랑이 지구에 있었는지, 보이지 않고,
한밤의 택시, 내린 후, 여기일까, 뒤돌아본다,
―「뒤」 부분
이 시집의 첫 시에는 “거기가 바로 여기네, 이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의 그림자 사진”을 들여다보는 화자가 등장한다. 장소를 지칭하는 ‘거기’라는 단어가 시간 개념을 포함할 수 있다면, ‘거기’는 화자와 ‘이 말을 자주 하던 어떤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장소, 즉 과거의 어딘가를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 둘이 알고 있던 바로 ‘거기’가 화자가 지나가는 ‘여기’인 것일까. 한편 “이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이란 또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은 구체적 형상으로 남겨지지 않고 그림자만 남아 있으며, 나를 떠나 흔적으로만 남은 사람이다. 그 말을 한 사람 역시 그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과거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경후의 시집 곳곳에는 한때 함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흔적으로 가득하다. 화자의 삶을 채우는 것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남은 “사라진 일”(「라이터 소년」)이며, “죽은 후에 살아남은 것들”(「반지」)이다. 이미 사라진 것, 사라졌기에 ‘그림자’로만 남은 자리를 보살피는 화자의 마음 상태를 이 책의 해설을 쓴 김영임은 ‘고독’이라 부른다. 과거의 ‘거기’였지만 지금은 지나쳐버린 곳, “어떤 사랑이 지구에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는 곳, 하지만 “보이지 않”기에 매번, “여기일까, 뒤돌아”보는 홀로 남은 이의 마음에서 ‘고독’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우리라.
홀로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성숙하는 ‘나’
세상과의 끈을 붙드는 작은 사건의 징후들
툭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도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
툭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툭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툭」 부분
외로운 자라고 해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을까. 화자들은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고 “서로 돌아서는” 그 순간에 “툭” 소리와 함께 “그래도 설 수” 있음을, 고독이 닥쳐온 순간은 “스스로 내가 되는” 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로 묶였던 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로 남는다는 건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시간 안에서 “성숙한 자아의 (목)소리로 변화”(김영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숙한 자아 즉, 스스로 내가 된다는 것은 홀로 된 자리에서도 세상과의 소통을 발생시키는 사건의 징후가 목격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는 시구에서 세월과는 별개로 그가 떠난 뒤 남겨진 나의 시간은 멈추었음을 짐작게 하지만, 화자는 “일어나자마자 운 게 아니에요/울려고 일어난 겁니다”라고 말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울려는 마음, 울음이라는 사건을 발생시키려는 화자의 의지 때문에 ‘잠’이라는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울려면 일어나야”(「저만치 여기 있네」) 한다는 의지가 고독을 견디는 자가 스스로 깨어나기를 선택하는 작은 사건의 시작점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당신을 읊는 것이 나였으면 합니다."
2021년 7월
김경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