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초와 그녀』는 계간지 [쓺]이 처음으로 배출해낸 신예 작가 김효나의 두번째 소설이다. 작가는 첫 책 『2인용 독백』으로 독특한 실험적 기법과 ‘기억’이란 주제 아래 솜씨 있는 서사를 선보이며, “문학적 언어의 고유한 영역과 그 은밀한 힘을 드러내 보여”줬(소설가 이인성)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 소설은 대화체이지만 독백으로 읽히는 서술의 형식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과거에는 함께했으나 지금은 혼자 남은 자들이 기억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 뒤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망각의 늪에 빠져 있던 과거의 기억이 낯선 사물처럼 현재의 삶에 당도했을 때 발생하는 낯선 감정과 체험을 아름다운 문체로 기록한 소설”(문학평론가 강동호)로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혹은 사물들의 서사는 종종 연결되지만 더러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차
Ⅰ가라앉는 대화
Ⅱ초와 그녀
작가의 말
저자
김효나
출판사리뷰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며 [……]
영원히 끝없이 나는 한강일 거야.”
기억에서 시작된 낯선 체험을 다루는 서사 실험
독백과 대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침묵했다 다시 발화하고, 다시 침묵했다 또다시 발화하기를 반복하는 김효나의 소설은 소설집으로도 장편소설로도 분류하기 어려워 이 새로운 형식의 책을 우리는 그저 김효나의 ‘소설’로 부르기로 한다.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이름도 사라지고,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나 역할도 사라지고, 단지 어느 작은 방에 누워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물컹한 덩어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기억의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나는 대답하거나 침묵합니다.
―김효나ㆍ이경진 인터뷰 중
침묵과 발화를 반복하는 화자
독백에 가까운 말로 채워지는 꿈의 대화
어쩐지 나는 네가 내게서 사라짐을 조금씩 연습하고 있음을, 내일은 다른 형태의 사라짐이, 모레는 또 다른 사라짐, 글피는, 또 글피의 글피는…… 조금씩, 자진하여, 위험에 처하는 연습을 하다가 어느 날 완전히 그것을 이행할 것임을, 이미 그 순간 전부 예상했는지 몰라. 그래 정말로,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너를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아. 혹시…… 이게 꿈은 아니지? (p. 37)
수록작 「가라앉는 대화」에서 나는 10년 만에 만나 ‘그’와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시제를 당겨 현재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뚝뚝 끊어지고야 마는 대화를 나눈다. 결말쯤에 이르러서야 “이게 꿈은 아니지?”라는 물음과 “나는 언제나 당신의 꿈을 꾸”(p. 38)었다는 고백 끝에 이 대화가 ‘나’의 꿈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김효나의 글은 그의 첫 책 『2인용 독백』에서 이번 신작에 이르기까지 대화체의 서술 방식을 택함으로써 일관된 형식을 보여주지만, 실은 대화처럼 보이는 독백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둘로 구분된 화자가 등장하는 장면은 연극적인 공간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으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대사는 읊조림에 가깝고 희곡이라기보다는 꿈속의 대화 혹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재연되는 하나의 발화 같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때문에 작가의 글은 누군가의 기억 혹은 꿈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계속해서 단절되는 장면들을 더듬어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김효나의 화자와 만나기 위해서 독자들은 우선 작가가 준비해놓은 꿈의 대화, 둘이지만 하나로 보이는 이 가상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기억의 형체
그 안에 가라앉아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이들
이제 그만해.
……
할 만큼 했으니 제발 그만해. 그 때문에 너의 모든 게 엉망이 되지 않았니. 너는 직업도 없어. 집도 없어. 직업과 집을 구하려는 마음도 없어. 오직 그 마음만 있어. 그것이 너를 망치고 있어. 병들게 하고 있어. 병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어. 고집부리고 있어. 집착하고 있어. 여전히 그곳에 있어. 거기가 어디인 줄도 모르면서 언제나 그 거대하고 막막한 곳에서 아직, 아직이라 중얼대고 있어. 가라앉는 거야.
(pp. 126~27)
김효나는 망각된 기억을 다시 주워 올린 뒤 그 기억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에 초점을 둔 채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 그 무게는 한층 더 무거워져, 작가는 소설을 읽는 이들을 기억이라는 거대한 물덩이 안으로 밀어넣고 기억을 응시하도록 한다.
작가에게 ‘기억’은 아마도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그를 사랑해?”라는 질문에 화자는 끝도 없이 계속해서, 언제까지라도 그럴 거라 답한다.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라는 말에 “그만하라는 너의 그 말을” 거부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기를 택한다. 소설에서는 사랑했던 그가 떠난 뒤에도 “아직도 그대로인 마음”(p. 128)으로 그를 사랑하거나, 인간에게 버려진 작은 개들의 악몽까지 끌어 안아주기도 하고, 오래전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현수막을 새로 거는 남자의 검은 손을 바라보는 등, 누군가를 잃어버린 뒤 남겨진 이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주하며 등장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때 함께였던 이들을 기억하는 자리는 사라질 줄 모르고, 김효나는 이 기억이라는 무형의 것을 물덩이, 돌덩이 등의 ‘덩이’라는 물체로 치환하면서 그것이 가지는 무게와 크기를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예상할 수 있듯이 오래전의 기억일수록 그 덩이는 커진다. 거대한 기억의 덩어리는 때로는 ‘한강’의 모습으로 “아득한 바다에 침몰하는 것과 같”(p. 21)이 무거운 침묵을 불러오기도 하며, 때로는 초에 맺힌 촛농의 모습으로 녹아내리고 가라앉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이 무거워지고 녹아내리는 공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화자는 때때로 침묵하며 띄엄띄엄 힘겹게 발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형태가 무엇이든, 그 거대한 웅덩이 아래 웅크려 앉아 나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가 잊어버린 것들을 홀로 끌어안고 오래도록 계속해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