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여성, 사랑, 결혼이라는 문제를 탐구한 전방위적 지식인 드니 디드로의
한 편의 에세이와 세 편의 콩트
우리에게 『백과전서』의 책임 편집자로 잘 알려진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의 작품집 『여성에 대하여?그리고 성, 사랑, 결혼에 관한 3부작』(주미사 옮김)이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사상가이면서 예술 이론가, 소설가, 극작가, 자연철학자였던 드니 디드로는 당대 학문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전방위적인 지식인이었다. 이 책은 이렇듯 다방면에 걸쳐 있는 그의 학문적 관심사 가운데 여성과 사랑, 결혼의 주제를 다룬 한 편의 에세이(「여성에 대하여」)와 세 편의 콩트(「이것은 콩트가 아니다」 「드라카를리에르 부인」 『부갱빌 여행기 부록 혹은 A와 B의 대화』)를 묶은 것으로, 특히 이 세 편의 콩트는 ‘성, 사랑, 결혼에 관한 3부작’을 이루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그는 20세기 들어 뒤늦게 주목을 받았다. 이는 디드로 생전에 출간되지 않다가 사후에 수고본이 발견되는 등의 우여곡절 탓이기도 했지만, 장르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특이한 글쓰기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에 수록된 ‘성, 사랑, 결혼에 관한 3부작’을 비롯해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 등의 소설에서 디드로는 두 인물이 등장해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대화체 글쓰기를 선보인다. 두 인물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서로 탈선과 끼어들기를 반복해 흐름을 방해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소설은 ‘18세기의 누보로망’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이런 글쓰기 방식은 하나만을 진리라 주장하면서 삶의 다양한 결을 무시하지 않고, 단순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자신의 딜레마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목차
여성에 대하여
이것은 콩트가 아니다
드라카를리에르 부인-특정 행위에 대한 여론의 비일관성에 대하여
부갱빌 여행기 부록 혹은 A와 B의 대화-도덕관념을 포함하지 않는 육체 행위들에 도덕관념을 적용하는 일의 부적절함에 대하여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저자
드니 디드로
출판사리뷰
욕망과 이성, 자유와 도덕의 사이에서
자신의 딜레마를 끝까지 대면한 사상가의 글쓰기
디드로는 성과 사랑, 욕망과 변심 등을 주요 주제로 삼아 수많은 글을 써 내려갔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도 그의 글쓰기는 철학과 행동윤리가 부딪히는 딜레마를 그 자체로 드러낸다. 모든 것을 빛 앞에 내보이길 원했던 계몽의 시대, 성과 사랑은 인간 행동의 근원에 자리한 자연적 행동으로 조명받는다. 따라서 이를 구속하고 정절과 지조를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성도덕은 디드로에게 반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구체적인 삶에 기반한 도덕을 찾고, 공동체의 행복과 미덕의 증진을 추구하는 계몽사상가이기도 했다. 즉 문명사회의 성도덕이 지닌 허구성을 논박하지만, 사랑의 변심이나 가없는 성적 자유를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디드로는 문명사회의 성도덕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많은 여성이 사회적 평판과 여론, 정절과 지조의 이데올로기 등에 억압당하는 현실을 보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왜 사회 속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성적 억압이 더욱 행사되는가? 디드로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불리하게 만든 원인으로 여성의 신체적 조건을 검토하면서도, 당대 유럽의 교육과 관습이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더욱 강화해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가 원시사회를 이상향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이 제 능력을 계발하는 데 문명사회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파한다.
문명사회는 여성에게 구원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 「여성에 대하여」는 뒤이어 나오는 ‘성, 사랑, 결혼에 관한 3부작’의 시론이라 할 만한 작품으로, 디드로의 여성관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여성이 처한 운명과 삶에 대해 연민과 격정이 담긴 어조로 쓰인 이 글은 당대의 생물학과 의학 지식을 동원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관찰한다. 또한 사랑에 대한 여성의 몰입과 헌신, 평판에 대한 두려움, 수치심과 질투 등을 묘사하면서 이것이 생리학적 특징과 더불어 사회적 제약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힌다.
「이것은 콩트가 아니다」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랑의 비극적인 결말을 다룬 두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뛰어난 재능으로 헌신했지만 결국 이용만 당한 채 버려진 여자,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가 죽고 만 남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연민 섞인 어조로 쓰였지만, 문명사회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곤 하는 정절과 지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변심과 배반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만물에서 변함없는 사랑이 과연 가능할지를 회의하는 것이다.
「드라카를리에르 부인」 역시 마찬가지로 사랑의 서약과 배신, 그로 인해 치닫는 파국을 따른다. 이 작품은 배타적인 사랑의 약속이나 헌신이 인간의 자연적 본능에 위배되기에, 상대방의 변심이나 일탈을 방지하는 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냉정히 분석한다. 한발 더 나아가 변치 않는 사랑과 정절에 대한 맹세가 사유재산 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즉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을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데서 벌어진 오해가 비극을 낳았다는 생각을 펼쳐 보인다. 또한 ‘특정 행위에 대한 여론의 비일관성에 대하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의 사적 영역을 사회규범의 틀 아래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타인의 평판과 시선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문제가 지적된다.
『부갱빌 여행기 부록 혹은 A와 B의 대화』는 수학자 부갱빌이 세계 일주를 다녀와 쓴 여행기 『세계 일주』에 대한 서평이자 가상의 부록으로 쓰인 작품이다. 타히티 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부갱빌의 여행기를 두 인물 A와 B가 함께 읽으며, 타히티 노인의 연설, 타히티 원주민 오루와 프랑스인 사제의 대화 등을 액자 구성으로 들려준다. 이 중 큰 분량을 차지하는 오루와 사제의 대화에서 둘은 타히티 사회의 성 풍속을 이야기하는 한편, 가톨릭 사제의 독신 규율이나 문명사회의 결혼 제도 등 당대 유럽의 인위적인 성 풍속을 문제 삼는다.
그렇지만 이 여행기를 읽는 A와 B가 문명사회의 대립항으로 등장하는 타히티 사회를 이상화하지는 않는다. 이 콩트의 말미에 A와 B가 자연과 문명에 관해 나누는 토론은 성의 파라다이스로 보였던 타히티 성 풍속이 약자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명사회의 속박이 오히려 약자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독자로 하여금 자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