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길고 긴 비문록의 본격적 서막”
선언을 예감하는 거인의 문장들
언어를 통해 세계의 전복을 시도해온 시인 김언의 두번째 시집 『거인』이 2021년 문학과지성 시인선 R 시리즈 열일곱번째 책으로 복간됐다. 2005년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나온 초판과 2011년 문예중앙 개정판을 거친 세번째 출간이다. 시인의 첫 시집 『숨쉬는 무덤』이 “여전히 불만스럽기 때문에 아직은 할 말이 많은 얼굴”(「뒤표지 글」)의 출현을 예고했다면, 두번째 시집 『거인』은 “장차 김언의 시 세계가 보여줄 길고 긴 비문록의 본격적 서막”(박혜진)으로서 언어와 현실의 경계를 실험한다.
김언은 무적자다. 경계 밖으로 향하려는 여정은 시가 되는 순간 늘 내부로 향하지만, 1998년 등단 이래 20년 넘게 시를 써온 시인에게도 “고향”은 아직 멀기만 하다. 『거인』을 대표하는 감각은 ‘없는 존재’다. ‘거품’ ‘연기’ ‘먼지’ ‘신기루’ ‘유령’처럼 고정된 형체가 없는 이미지, 혹은 ‘사라진 사람’ ‘떨어진 사람’ ‘없는 사람’처럼 존재가 불분명한 대상의 행렬은 돌아갈 고향을 상실한 시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키스/키스 2/거품인간/폭발/신기루/발음/유령-되기/불멸의 기록/다음날/없는 사람과의 이별/장례식 주변/아무도 없는 곳에서/쏜다/사건 현장/새의 윤곽/바람의 실내악/한 사발의 손/돌멩이/돌의 탄생
2부
다리의 얼굴/다리의 얼굴 2/그가 토토였던 사람/드라마/잘못한 사람/서 있는 두 사람/차분하게 고통스럽게/모종의 날씨/돌멩이 2/暗시장/납치/홀/누구세요?/엄마 배고파/드라마 2/판다/가능하다/토요일 또는 예술가
3부
뱀사람/뱀사람 2/유령/즐거운 식사/숨쉬는 로봇/거인/어느 갈비뼈 식물의 보고서/잠입/기원전/사라진 사람/안 보이는 숲의 마을/외투/떨어진 사람/고가 도로 아래/이 동네의 길/표면적인 이유/내가 벌써 아이였을 때/청춘/시집
부록
詩도아닌것들이―문장 생각
詩도아닌것들이―탱크 애벗의 이종격투기
해설 문장의 중력·박혜진
기획의 말
저자
김언 (지은이)
출판사리뷰
“한나절의 공포가 그를 밀고할 것이다”(「거품인간」), “구름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방향을 바꿀 것이다”(「바람의 실내악」), “서 있는 두 사람이 그렇게 단정할 것이다”(「서 있는 두 사람」). 이 시집에는 선언을 연상케 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무언가를 예감하는 이 문장들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모두가 움직인다”는 감각에서 출발해 아직 오지 않은 “한 문장”을 찾기 위한 전조를 감지할 수 있다.
독자를 언어의 탐정으로 만들어 의심하고 취조하고 심문하게 만드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김언은 누구보다 더 혹독한 시인이며 김언이야말로 하나의 언어를 중단시키고 다른 언어를 출발시키는 예외적 존재로서의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_박혜진(문학평론가)
고향을 상실한 유령의 언어
초판을 내고 서른 번도 넘게 비행기를 탔던 것 같다.
많이 탄 것인가, 적게 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번을 탔든 마지막에는 다 돌아오는 비행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다만 고향이 멀었다. 고향만이 멀었다.
―「시인의 말」 부분
김언은 무적자다. 경계 밖으로 향하려는 여정은 시가 되는 순간 늘 내부로 향하지만, 1998년 등단 이래 20년 넘게 시를 써온 시인에게도 “고향”은 아직 멀기만 하다. 『거인』을 대표하는 감각은 ‘없는 존재’다. ‘거품’ ‘연기’ ‘먼지’ ‘신기루’ ‘유령’처럼 고정된 형체가 없는 이미지, 혹은 ‘사라진 사람’ ‘떨어진 사람’ ‘없는 사람’처럼 존재가 불분명한 대상의 행렬은 돌아갈 고향을 상실한 시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시인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고향이 시라면, “작곡하듯이”(「시집」) 혹은 “전혀 시적이지 않은 소설”(「소설을 쓰자」, 『소설을 쓰자』)을 쓰듯이 시를 대하겠다는 의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음악이나 소설을 닮은 시를 쓰겠다는 말이기보다는 ‘시 밖의 시’, 즉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시를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시를 무술에 비유할 수 있다면 김언은 “사각의 링이든 팔각의 철조망 안이든”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 “스트리트 파이터”다(「詩도아닌것들이―탱크 애벗의 이종격투기」). 이번 R시리즈를 복간하며 새롭게 추가한 작품 「유령」은 『거인』을 다시 읽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적절해 보인다.
미안하지만 유령은 짜 맞춘 듯이 찾아온다.
온몸이 각본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다.
그가 어디를 가든 예정에 없던
장소가 나타난다. 어디서 보았더라?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이는 실오라기
하나를 주워서 후, 불었다.
발자국이 멀리 걸어서 갔다.
마치 냄새가 퍼지듯이
내 몸에 꼭 맞는 연기를 따라서 갔다.
엉킨 털실이 옷을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주인을 기다리는 장소에
이제 그가 들어간다.
―「유령」 전문
유령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죽어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닌 “각본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나에게 소통이 불가능한(사실은 어려운) 시는 있어도 모두에게 소통이 불가능한 시는 있을 수 없다. [……] 그 차이를 절대적인 차이로 부각할 때, 나 아닌 다른 누구와도 소통이 안 되는 것처럼 과장할 때, 소통 불능이라는 그 시를 읽고 공감했던 사람은 그럼 뭐가 되는가. 유령인가?”(『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유령을 이루는 각본은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 한 사람만 읽을 수 있는 비문”이라고 이름 붙이며 김언의 물음에 응답한다. 있는 장소에 방문하는 것이 현실의 이치라면, 김언(言)이라는 언어로 축조한 세계는 “모두를 향해 열려 있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는 없”다. 의심의 말들로 씌어진 56편의 시는 이 비문의 세계를 모험하며 기꺼이 걸려 넘어지기를 자처하는 자(「청춘」)에게 주인이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태어난 진화의 방향
조그만 공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구 밖으로 튀어나와 이게 내 손이라고 자기 얼굴을 가리던 그 손으로 가장 높은 산맥과 봉우리까지 움켜쥐던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을 편의상 거인이라고 부르자.
[……]
개중엔 낯익은 이름도 섞여 있다. 부를 때마다 달라지는 이름, 이를테면 사람.
―「거인」 부분
거인이 ‘유령’이나 ‘먼지’와 달리 중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존재임을 고려할 때, 부재하는 이미지로 가득한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 「거인」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어쩌면 가장 많이 등장한 시어지만 지나치게 “낯익은 이름”이라 눈에 띄지 않고 “부를 때마다 달라”져서 스쳐 지나갔을 거인은 “여러 사람이 모여” 이룬 “한 사람”이다. 그는 “기록하는 사람”이자 “소멸하는” 사람인 동시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 “손을 쳐다보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몸집을 키워온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며 김언과 거인의 이름이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인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보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 즉 “진화의 방향”(「거인」)에 주목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을 말하시오. 아니면 거짓을 말할 테니”(「서 있는 두 사람」), “살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버려라”(「납치」).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믿어온 모든 언어를 버리고 씌어진 문장들은, 역으로 가장 태초의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을 되비추며 김언 시의 궤적을 가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