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학의 기둥을 묵묵히 밀고 나가며
비평의 본질적 역할을 탐구하는 조강석의 새 비평집
문학평론가 조강석(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의 새 비평집 『틀뢴의 기둥』(문학과지성사, 2021)이 출간됐다. 저자는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문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바탕으로 ‘지금-여기’에 유효한 문제들을 제기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여왔다. 수록 글 「다시 문학의 실효성에 관하여」는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틀뢴’은 잘 알려졌다시피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 가상 세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현실 세계의 물리적?도덕적 법칙에 기초해 축조된 것이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독자적 운영 체계를 지니고 있”는 “독립적이고 정합적인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틀뢴’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물들의 집합이 아닌 “현실과 비스듬히 서 있는 또 하나의 실재”이다. 문학이 가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라고 말할 때 저자는 문학이라는 가상, 즉 틀뢴의 기둥을 묵묵히 밀고 나감으로써 비평적 역할을 수행 중인 것은 아닐까. ‘문학의 실효성’ ‘이미지 사유’ ‘모티폴로지motiphology’로 간추릴 수 있는 조강석 비평 세계의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저자는 다시 한번 문학을 붙들고 그의 비평 세계를 축조해낸다.
목차
책머리에
1부헤라클레스의 기둥과 ‘예술 의지’
동시대 시문학의 세 가지 ‘예술 의지’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두 개의 환원
‘현재에 대한 열정’의 결여와 평온한 상대주의
우리는 결코 미래인이었던 적이 없다
시적 디테일과 두 개의 내밀성
2부문학의 실효성에 대하여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정치적·윤리적 올바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단상
다시 문학의 실효성에 관하여-김숨 연작소설, 『한 명』 『흐르는 편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읽기
치유로서의 문학, 증상으로서의 문학
존재 3부작과 이미지?서사
접힘과 펼침의 장소로서의 ‘이미지?사건’
‘정동’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
3부21세기 몰리뉴 사고실험
감은 눈과 세계의 이본
십일월의 이야기 -듣는 눈과 말하는 귀
음계(音界)의 안복(眼福)
무수히 문들인 시적 ‘틀뢴’
세계라는 기관과 생물(학)적 우울
언어와 실재의 신약(新約)
4부이미지?사유의 별자리들
반묵시록적 이미지?사유
사물의 자취와 정동적 언어
스푸마토게이트
발란사의 춤
불안의 우화
고요와 불안의 구도
구석으로부터의 타전
5부모티폴로지 2020
토템과 화석, 그리고 낭만적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세 개의 죄의식
파국 이후 상상의 구조
저자
조강석
출판사리뷰
문학의 기둥을 묵묵히 밀고 나가며
비평의 본질적 역할을 탐구하는 조강석의 새 비평집
문학평론가 조강석(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의 새 비평집 『틀뢴의 기둥』(문학과지성사, 2021)이 출간됐다. 저자는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문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바탕으로 ‘지금-여기’에 유효한 문제들을 제기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여왔다. 수록 글 「다시 문학의 실효성에 관하여」는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틀뢴’은 잘 알려졌다시피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 가상 세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현실 세계의 물리적·도덕적 법칙에 기초해 축조된 것이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독자적 운영 체계를 지니고 있”는 “독립적이고 정합적인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틀뢴’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물들의 집합이 아닌 “현실과 비스듬히 서 있는 또 하나의 실재”이다. 문학이 가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라고 말할 때 저자는 문학이라는 가상, 즉 틀뢴의 기둥을 묵묵히 밀고 나감으로써 비평적 역할을 수행 중인 것은 아닐까. ‘문학의 실효성’ ‘이미지 사유’ ‘모티폴로지motiphology’로 간추릴 수 있는 조강석 비평 세계의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저자는 다시 한번 문학을 붙들고 그의 비평 세계를 축조해낸다.
「1부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예술 의지’」에서는 2000년대 중후반 이후의 일정한 시적 흐름을 지시하는 용어로 시단에 돌풍을 일으켰던 소위 ‘미래파’에 관한 소론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시를 황병승, 조연호, 이준규, 진은영 등의 시를 중점적으로 인용하며 그 흐름을 짚어낸다. 특히 조강석은 그토록 뜨거웠던 ‘미래파’ 논쟁이 한국 현대 시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며, 치열했던 논쟁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은 무엇이었는지를 파헤치는 작업에 몰두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호명되어야 했던 시인 개개인들이 어떻게 ‘미래파’ 논쟁을 뚫고 나가며 스스로 시적 몸을 만들었는지에 주목해본다.
「2부 문학의 실효성에 대하여」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올바름이 문단 안팎에서 재점화되는 상황 인식과 더불어 그러한 사회 변화가 문학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짚어낸다. 조강석은 한국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정동적 동요’가 충분히 시의적절하며, 그러한 요구에 한국 문학이 응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 테제에 부응하는 것이 소설의 실효성의 전부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문학의 실효성’을 충실히 드러낸 작품으로 김숨의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한 명』 『흐르는 편지』 등을 예로 들어 논지를 풀어낸다.
「3부 21세기 몰리뉴 사고실험」에서는 눈앞에 놓여 있다 해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여러 측면을 이미 스스로의 몸 안에 담아둔 예술의 특질에 주목하며, 이민하, 김상혁, 정재학, 안미린 등의 시 세계를 다룬다. 눈 감은 자의 눈을 뜨게 해주는 어둠이 이민하의 시집 『세상의 모든 비밀』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김상혁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 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존 서정시의 문법을 내파하고, 우리를 새로운 시 세계로 이끄는지에 관해 보여준다. 또한 세계의 소리를 언어로 실현하는 데에 도전한 정재학의 시집 『모음들이 쏟아진다』, 열리고 닫히는 무수히 많은 문들을 주요 이미지로 활용하면서 기존의 세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는 안미린의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등을 다룬 저자의 지지와 애정으로 가득한 비평이 수록되었다.
「4부 이미지-사유의 별자리들」은 이범근, 정끝별, 이설빈, 주영중, 김선재 등의 시편에 관한 비평문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연쇄 작용이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촉발 과정에 주목한다. 희미한 이미지의 연쇄가 평면적 의미의 세계에서 입체적인 공간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열었음을 보여주는 이범근의 시집 『반을 지운다』, 이리저리 휩쓸리고 멀어지는 삶의 중심을 계속해서 모으고 당기려는 언어들로 가득한 정끝별의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우화의 형식을 차용하여 깊이 있는 환영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이설빈의 시집 『울타리의 노래』 등에 관한 작품론으로 채워졌다.
「5부 모티폴로지 2020」에서는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그로 말미암아 그해 계간지에 발표된 시/소설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주제 혹은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본다. 조강석은 압도적인 현실을 눈앞에 둔 채 계간지에 실린 글을 읽고 또 평을 써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면서도 충실히 비평의 역할에 집중하며 작품을 읽어내려간다.
책머리에
문학이 가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입장이 아니라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다. 중요한 것은 저 가상의 영역의 기둥을 묵묵히 밀고 가는 것이다. 움직이는 변경이 문학의 역설적인 경계이기 때문이다. 현실 밖이 아니라 안에, 아래에, 기저에, 구조 속에 존재하되 가시적 영역의 질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비가시적 실재, 그것의 미래에 대한 시간착오적 향수가 문학이다. 그것은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의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충동’을 보유함으로써 세계를 기울인다. 오늘의 세계를 구성하는 바로 그 질료들로 저본(底本)이면서 동시에 이본(異本)인 세계를 내밀어놓는 것이 문학이다.
평론집 원고를 묶고 두세 번의 교정지가 오가는 동안, 이본을 축조하며 변경의 기둥을 옮겨가는 문학의 자취를 헤는 세 가지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의 실효성, 이미지 사유, 모티폴로지motiphology가 이 운동을 요약하는 말들일 것이다. 본문에서 거듭 확인되는 이 푯말들의 의미를 새삼 여기서 다시 풀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공히 저 ‘유토피아적 충동’에 연루된 것임은 일러두고 싶다. 때로는 주머니 속에서 굴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별자리(술자리?)에 던져보기도 하던 저 돌들이 결국 아직은 없는 세계의 지도를 마름하는 기둥들로 자라날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문학을 읽어왔다.
7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문학을 붙들고 있다는 말의 함의가 극적으로 몸을 뒤집는 동안 나는 전신하는 바로 그 몸 안에 살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것에 이끌리는 머리, 구조를 지어주고 싶은 입맛, 감탄을 기다리는 눈, 그 모든 것과 더불어 분주한 손이 두루 여기에 관여되어 있을 터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청년 빌헬름은 예술을 향수하는 이들을, 눈앞에 무언가 벌어지기만 해도 즐거워하는 사람, 가슴으로 예술을 느끼는 감상자, 작품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 되새길 줄 아는 분석가로 구분한 바 있다. 감상자와 분석가의 비교 우위에 대한 오랜 논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비평의 위상이 사뭇 달라진 지금 평론집 서문을 쓰면서 이 대목이 문득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패러프레이즈와 어깨 겯기가 비평가의 소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부로부터 외부로의 전개develop from within’를 비평의 주요 업무라고 믿고 방법을 구하고자 노력한 경과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과가 고스란히 공과가 된대도 조금 더 가보는 수밖에 없다. 문가에 오래 새겨진 키높이 눈금을 뒤로 하고 훈이와 진이는 이제 청년의 사업에 골몰하고 나는 여전히 ‘그분’의 응시 안에 기꺼이 있다.
2021년 벽두에 열을 재는 외솔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