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하나의 뜨거운 예감 (문지문학상 심사평)
소설의 독자가 사라진 시대의 소설의 운명을 점치는 소설 (김준성문학상 심사평)
소설에 새겨진 운명적 DNA, 그 국경이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젊은작가상 심사평)
“히치하이커 중 한 명은 흑인이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라면
당신은 누굴 태우겠어?”
이민자, 홈리스, 유색인…… 배제된 이들의 삶
치밀한 각도로 비춰내는 유럽의 민낯
세계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소설적 실험으로 구현해내는 김솔의 세번째 단편집 『유럽식 독서법』(문학과지성사, 2020)이 출간되었다.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표제작인 「유럽식 독서법」을 비롯해 총 여덟 편의 수록작 제목 앞에는 소설의 배경이 된 국가명이 제시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리스와 알바니아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유럽이 이번 소설집의 주 무대이다. 김솔은 유럽의 전형적 낭만 이미지를 걷어내고 유색인, 이주노동자, 빈민 등의 차별 문제를 다양한 신화나 종교적 소재와 연결하여 여러 갈래의 서사로 구현한다.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유럽을 낯선 방식으로 직시하도록 하지만 결국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부정과 불행을 불쾌하지 않은 유머로 풀어내며 끝내 희망의 자리를 짐작하게 하는 김솔 소설의 힘이, 겨우내 집 안에 갇힌 우리에게 새로운 봄을 상상하게 해주리라 기대한다.
“오랫동안 전 소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작가가 되어 어쭙잖은 글을 쓰게 되면서, 제가 소수보다는 소수를 부당하게 다루는 다수에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의도는 희망의 어두운 부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 희망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밝히고 싶네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목차
영국 |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
벨기에 | 유럽식 독서법
프랑스 | 누군가는 할 수 있어야 하는 사업
스위스 | 브라운 운동
스페인 | 에스메랄다 블랑카
그리스 | 보이지 않는 학교
알바니아 | 이즈티하드 Ijtihad의 문
러시아 | 나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저자
김솔
출판사리뷰
세계화의 그림자, 계속해서 가난해지는 굴레들
고풍스러운 건물과 편리한 시설, 그리고 예의 바른 사람들은 유럽을 향수할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다. 기껏해야 맛없고 비싼 런던의 음식점이나 더러운 파리의 지하철, 소매치기 정도가 여행자들에게 떠오르는 흠결이지만, 막상 그곳을 살아가는 수천수만의 이민자들에게 유럽은 얼마나 가혹한 공간인가. 추천의 말에서 백민석이 지적했듯 “고귀한 유럽 시민이 쾌적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민이나 불법체류자가 파리의 화장실을 청소해주어야” 하는 아이러니. 김솔은 이 모순을 특유의 해학으로 관통해낸다.
바이 부레는 취한 주인들의 발밑에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 아프리카의 역사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설명하면서, 자신이 노예로서 얼마나 유용한 능력을 지녔는지 호소했다. 졸지에 영국의 왕이라도 된 듯 우쭐해진 루 첸과 장 크리스토프 드니는 바이 부레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는데, 주인이 약속해야 할 의무 조항이라곤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였고 노예는 두 명의 주인이 속해 있는 세계를 양쪽 어깨에 각각 하나씩 떠받쳐 들어야 했다.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
건장하지만 어리숙한 흑인 남성 바이 부레는 약쟁이 루와 장을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 맥도날드에서 우연히 만나 끊임없이 서로 속고 속이는 악연을 맺는다. 쌍방의 사기 행각으로 상호 착취를 계속하는 이들은 결국 모두 이민자. 바이 부레는 영국 식민지였던 시에라시온, 루는 타이완, 장은 벨기에 출신이며 서로 뜯어먹어봤자 빈털터리로 귀결되는 인생들이다. 「누군가는 할 수 있어야 하는 사업」의 열다섯 살짜리 불법 이민자 나우팔은 어떠한가. 오를리 공항 근처 주차장에서 발레파킹 일을 하지만 그에게 정말 쏠쏠한 수입은 홈리스들에게 하룻밤 자고 갈 자동차를 열어주고 챙기는 뒷돈이다. 유럽의 세련과 편리를 지탱하는 가난한 자들은 심지어 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더라도 아무도 탈출할 수 없는 빈곤의 궤도 위에 모두 고스란히 서 있음을 김솔은 뼈아프게 보여준다.
솔직하지만 단순하지는 않게, 꿈속에서 진짜 얼굴을 찾는 독서법
이번 수록작들이 유럽에 산재한 사회문제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김솔의 작법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직설적인 세태 풍자 소설과는 다른 스타일을 예상했을 것이다. 소설 화자들은 분리 불가능한 망상과 꿈을, 일상에 침윤한 병증과 공포에 시달리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앓는다, 고전과 신화, 종교의 소재가 복합적으로 병치되고 교차하여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뻗어나간다.
이 소설의 목적지에 이르러, 나는 그 소녀의 목소리나 냄새, 표정이라도 당신에게 말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첫 문장부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독서가 거듭될수록 소녀는 아내에서 아이로, 그다음엔 거미로 변해가더니 나중엔 검고 작은 돌멩이의 모습에 수렴됐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이 어쩐지 나와 닮아 있을 것이라는 몽상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청동거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유럽식 독서법」)
천천히 여러 길을 경유해서 복잡하게 나아가게끔 유도되는 『유럽식 독서법』 읽기. 예술로서 정교한 소설 세계를 펼쳐 보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임과 더불어, 미로 끝에 만난 청동거울처럼 고심한 각도로 비춰내야 할 삶의 진짜 얼굴을 짐작게 한다. 김솔이 설계한 길을 따라 유럽식 독서법에 빠져든다면 그 노력에 값하는 보람 또한 모두에게 주어질 것이라 믿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