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애틋한 목소리의 시
『혼자 가는 먼 집』(1992. 통쇄 32쇄)은 세간의 비참과 내면의 허기를 노래해온 허수경의 시집이다. 일말의 포즈 없이 진정성을 향한 열망으로 씌어진 시편들은 하나같이 버림받다, 아프다, 무너지다 같은 절망적 어사들로 짜여 있으나 동시에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불취불귀不醉不歸」) 살아가려는 의지 또한 드러낸다. 그것은 “아린 손가락 끝으로 개나리가 피”(「쉬고 있는 사람」)어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울고 있는 가수」)는 애처로운 다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은 일은 삶의 지속이 곧 상처의 증식임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수용하며 나아가는 시적 고행을 조심스레 뒤따라보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한국 시사에 아름답고 처연한 목소리를 아로새긴 허수경의 애잔한 비가에 가만히 귀 기울여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의 사랑」
목차
1.
공터의 사랑 | 불우한 악기 | 불취불귀(不醉不歸) | 울고 있는 가수 | 정든 병 | 흰 꿈 한 꿈
마치 꿈꾸는 것처럼 | 연등 아래 | 상처의 실개천에 저녁해가 빠지고 | 저무는 봄밤
명동, 카바이드불 | 혼자 가는 먼 집 | 저 잣숲
2.
저 나비 | 무심한 구름 | 사랑의 불선 | 바다탄광 | 산수화 | 쉬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유작 노트 중에서 | 골목길 | 서늘한 점심상 | 먹고 싶다… | 씁쓸한 여관방
산수화 | 아직도 나는 졸면서 | 하지만 애처러움이여 | 갈꽃, 여름 | 늙은 가수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 저 산수가
3.
저 누각 | 청년과 함께 이 저녁 | 도시의 등불 | 표정 1 | 가을 벌초 | 표정 2
꽃핀 나무 아래 | 봄날은 간다 | 기차는 간다 | 한 그루와 자전거 | 원당가는 길
4.
저 마을에 익는 눈 | 등불 너머 | 저 문은 어디로 갔을까요 | 나를 당신 것이라 | 거름비
불귀 | 시 | 남해섬엣 여러 날 밤 | 유리걸식 | 세월아 네월아 | 저이는 이제 | 산성 아래
내 속으로 | 백수광부
저자
허수경
출판사리뷰
“전통은 예외와 조우하면서 또 다른 미래로 나아간다.”
우리가 사랑해온 여성 시인들,
이 시대 여성 북디자이너와 텍스트로 만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
1978년에 시작된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2017년에 통권 500호를 돌파한 이래 550권에 이르는 독보적인 한국 현대 시사를 써오고 있다(2020년 12월 12일 현재). 그동안 문지 시인선은 초기 디자인의 판형, 용지, 제본 방식을 포함한 주 골격을 유지하되(오규원 디자인, 이제하 김영태 컷), 100호를 단위로 표지 테두리의 기본 색깔을 달리하고, 내지와 표지에 쓰인 글꼴의 크기와 배치에 미세한 변화를 부여하는 선에서 본래 디자인의 전통성을 지켜왔다. 표지 전면의 액자 프레임과 시인의 독특한 캐리커처로 대표되는 시집의 얼굴은 그 과감한 색면 디자인과 압도적인 은유로 문지 시인선의 정체성을 상징해왔다. 45년 가까이 유지돼온 이 디자인은 시대를 앞서는 사유의 진폭과 언어 미학의 정수를 담아온 문지 시인선의 역사이자, 올해로 창사 45주년을 맞은 문학과지성사 출판사(史)와 동궤의 시간의 무게를 안고 있다.
이제 문학과지성사는 문지 시인선의 열린 미래를 향해 새로운 모색과 도전을 시작한다. 그 첫 기획으로, 시대와 세대를 가로지르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온 여성 시인 최승자, 허수경, 한강, 이제니의 시집과 지금 가장 개성적이고 주목받는 작업을 펼치고 있는 여성 북디자이너 김동신(동신사), 신해옥, 나윤영, 신인아(오늘의풍경)가 만나 문지 시인선의 특별한 얼굴을 선보인다. 이번 시집 디자인 페스티벌에 함께한 북디자이너들은 각각 독창적이고도 흥미로운 디자인적 해석으로 운문 본래의 리듬과 정서를 존중하되, 2020년 새로운 시 텍스트 해석에 신선하고도 도전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디자인의 기초인 타이포그래피와 만져지고 느껴지는 종이의 뚜렷한 물성을 총체적으로 결합해낸 이번 특별 한정판은, 이미 필사와 암송의 텍스트로 애정을 쏟아온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선물이,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강렬하게 작동하는 현대 시사의 정수를 경험하는 값진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전통은 ‘예외’와 조우하면서 다른 미래를 예감하고 또 다른 시작의 첫발을 뗀다. 이번 문지 시인선의 낯선 얼굴들은 ‘디자인 문지’를 위한 모색이자, 문지 시인선의 그다음 ‘500호’를 향한 기꺼운 출발인 셈이다. 시의 언어가 북디자인의 물성(物性)과 부딪치고 서로에게 스며들며 매혹적인 만듦새의 결정체로 거듭나는 이 축제의 자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디자인 노트_신해옥
1992년에 펴낸 『혼자 가는 먼 집』의 해설을 쓴 박해현 기자는 “허수경의 시에는 멈출 곳 없어 헤매는 유랑 가수의 마음이 그려내는 지도가 들어 있다. [……] 그 가수는 그런 의미에서 아프고 정처없이 건들거려야 할 뿐만 아니라 제 목소리와 곡조에 “버리고 떠나온 한 비럭질의 생애”(「원당 가는 길」)를 싣고서 그의 건들거림을 되새김질한다. 그 건들거림의 발자국이 만드는 옴팍한 속에는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늙은 가수」)라는 신산한 세상살이와 막막한 방랑의 운명에서 길어올려진 눈물이 고여 있다”라고 했다. 2020년에 다시 펴내는 『혼자 가는 먼 집』의 리커버 한정판의 새로운 디자인은 분리될 수 없는 몸과 마음처럼, 그 지도 위에 누추하고 쓸쓸하게 남겨진 마음을 따라 시편이 발자국이 되어 그 뒤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