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인 최하림의 시와 삶을 기억하는 시인들
장석남 박형준 나희덕 이병률 이원 김민정이 엮어낸 시선
시간과 존재, 언어와 예술의 고민을 치열하게 밀고 나가며 70여 년을 시인으로서 오롯이 살아낸 시인 최하림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10년이 흘렀다. 가르침과 다독임을 아끼지 않았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여전히 ‘시인들의 시인’으로 기억되는 최하림의 10주기를 맞이하여, 여섯 명의 시인과 문학과지성사가 함께 묶어낸 기념 시선집 『나는 나무가 되고 구름 되어』를 출간했다. 5?18의 역사적 기억을 시의 주된 질료로 삼으면서도 동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정교한 언어의 탐구가 빛나는 초기 시에서부터(1부 밤은 시나 쓰며 살아야 할 나라), 자연의 생명력으로 조금씩 치유되어가는 전환기의 시(2부 가을, 그리고 겨울), 역사마저도 시간의 한 경과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후기 시까지(3부 다시 구천동으로), 습작 시와 시집 일곱 권, 근작 시를 아우르는 시인 최하림의 시적 여정을 되짚어 엄선된 시 60편이 수록돼 있다.
이 시선집의 의미가 더욱 각별한 이유는 최하림의 문학 자장 안에 있던 시인, 장석남?박형준?나희덕?이병률?이원?김민정이 시 선정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시를 다시 읽고 돌아보며 시 10편씩을 고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최하림과 후배 시인들이 나누는 따뜻한 문학적 대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거친 진솔한 산문을 여섯 시인이 직접 추린 시들 말미에 덧붙였으니 일독을 권한다. 이렇듯, 『나는 나무가 되고 구름 되어』는 시인과 시인, 시인과 시가 오로지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나는 각별한 장소이다. ‘침묵을 쓴다’는 일의 지난함을 아는 시인 최하림의 문학적 숨결을 동시대 독자들과 다시 나누기 위해 기획된 이 책은 최하림을 기억하고 다시 읽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고요한 공감의 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목차
최하림 10주기 기념 시선집을 펴내며
1부 밤은 시나 쓰며 살아야 할 나라
빈약한 올페의 회상
겨울의 사랑
겨울 우이동시牛耳洞詩
세석평전細石平田에서
이슬방울
시詩
시詩
풍경
어두운 골짜기에서
마음의 그림자
엮은이의 말 장석남
음악실에서
가을의 말 1
마른 가지를 흔들며
비가
강설降雪의 시
밤나라
겨울 정치精緻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부랑자의 노래 2
유리창 앞에서
엮은이의 말 박형준
2부 가을, 그리고 겨울
말
그대는 눈이 밝아
양수리에서
11월에 떨어진 꽃이
말하기 전에, 나는
베드로
내 시는 시詩의 그림자뿐이네
아침 시
오늘은 굼벵이 같은 나도
병상 일기
엮은이의 말 나희덕
너는 가야 한다
가을 인상
가을, 그리고 겨울
아들에게
비원 기억
나무가 자라는 집
독신의 아침
달이 빈방으로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집으로 가는 길
엮은이의 말 이병률
3부 다시 구천동으로
다시 구천동으로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호탄리 시편詩篇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서상書床
구석방
할머니들이 겨울 배추를 다듬는다
어디서 손님이 오고 계신지
신성 노동
소한
엮은이의 말 이원
의자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억새풀들이 그들의 소리로
첫 시집을 보며
바람이 센 듯해서
시월은
기억할 만한 어느 저녁
언뜻언뜻 눈 내리고
가을 편지
목조건물
엮은이의 말 김민정
연보
도서 목록
편자 소개
저자
최하림
출판사리뷰
1부 밤은 시나 쓰며 살아야 할 나라
: [습작 시 1961~63]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나의 시가 말하려 한다면
말을 가질 뿐 산이나 나무를
가지지 못한다 골목도 가지지 못한다
―「시詩」 부분
“선생님을 뵙지 못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자꾸 시간 얘기만 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시도 ‘시간’과 사귀거나 싸우던 세계가 아니었나 평소 생각하던 바입니다. 충북 영동 호탄리의 적막하던 어느 저녁이 그립습니다.” 장석남
이윽고 눈과 함께 설야雪夜가 우리를 찾아오리라
그곳으로 어서 빨리 나는 가야 한다 그 깨끗한 것들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걸음을 울리며 가고 있다
―「강설降雪의 시」 부분
“나는 사는 게 힘들어질 때마다 최하림 선생님을 찾아뵙곤 하였다. 선생님을 뵙고 나면 마음속에 가득한 엉킨 실타래가 풀렸다. 내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삶에서나 시에서나 언제나 스승으로 살아 계시다.” 박형준
2부 가을, 그리고 겨울
: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가파른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허공에서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머릿속에만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절대음처럼, 말들은 사람의 집을 찾아서 아득히, 말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집도 보이지 않는다.
―「말」 부분
“시인은 생각을 멈추고 고요히 풍경의 일부가 된다. 그 평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참 오래도록 뒤척였을 것이다. 내면에 흐르는 수많은 물소리와 함께.” 나희덕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가을, 그리고 겨울」 부분
“최하림 시인이 시 수업 중에 나를 호명하셨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인의 물음은 차가워서 베일 것만 같았다. 더듬거리다, 머뭇거리다가 나는 “시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했다. 스승을 떠올릴 때마다 스승을 처음 만난 3월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은 그날 이후 내 대답의 방향이 늘 엇갈림 없이 스승을 향하고 있어서다.” 이병률
3부 다시 구천동으로
: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근작 시 2005~08]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라고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 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 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구석방」 부분
“선생님의 시는 자연을 닮아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구부리거나 자른 흔적이 없었다. 이 미지근함이 시가 갈 수 있는 한 절정이었음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흔히 사소한 일상이라고 부르는 곳, 선생님은 내내 그걸 보셨구나, 그걸 쓰셨구나, 나는 오늘에서야 안다.” 이원
나의 시집이여…… 켜켜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집이여…… 황혼이 내리는 시간에도 자고 눈 내리는 날에도 자고 또 내리는 날에도 자거라 생각지 말고, 뒤척이지 말고……, 네가 자면 어느 날 나도 고요 속으로 내려가 자게 되리니
―「첫 시집을 보며」 부분
“선생의 참도 끝 간 데 없는 절망은 어쩜 이리도 가뿐한 쓰르라미의 뒷발인 것인지 기운 가벼움의 공기 아니고 겹으로 얼비친 고요는 어쩜 이리도 투명한 십일월의 눈발인 것인지.” 김민정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최하림, 『최하림 시전집』, 「시인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