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생존-놀이의 세계를 관통하는 시선
무용한 반복에서 비롯한 지속의 발자취
일상의 틈에 감추어진 의미를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해온 류인서의 네번째 시집 『놀이터』(문학과지성사, 2019)가 출간되었다. 견자(見者)로서 시인의 미덕을 충실하게 이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이후 6년 만의 신작이다.
류인서는 200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여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청마문학상 신인상, 지리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생의 전체성을 내파하고 균형과 조화를 배반하는 날카로운 시적 감각을 선보여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반성과 사유의 힘을 잃은 세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투명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리고 너와 나,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삶의 현장을 ‘놀이터’라고 이름 붙인다. 의미 없는 반복으로 인해 시스템만이 갑이며 우리 모두가 을이 되어버린 시대 상황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과 알레고리로 묘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류인서는 반복, 그 자체에서 생의 유지와 전진의 가능성 또한 발견한다. “언젠가 꾼 적 있는 꿈을 다시”(「동사서독」) 꾸고, “시간의 홀대를 참아내며/일몰이 비껴가는 창에서 하루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달」)을 좇아 걸음을 옮긴다. 그러므로 『놀이터』는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곳이기보다 어른들의 물질적 타산과 만족을 위해 장식적인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이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길 포기하지 않는, 서로를 위무하며 살아가길 멈추지 않는 시인의 소망을 오롯이 보여준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감정선/빵 굽는 편의점/여의도/소경/싱크홀/놀이터/늙은 쿠마리/도상圖像/희생/정객/열 시 십 분들/별/묵독 파티/우편함 속의 꽃씨/DMZ
2부
주걱/달/광장/개종/혁명의 그림자/시계/모서리의 세계/언니들은 불란서 망사를 불망이라 부른다/장미/오늘의 뉴스/컨테이너 박스/11월/동사서독/공상은행/소금 우체국/비밀
3부
타임스위치/두 개의 탈/서명하는 손들이/‘우리’라는 말의 우리/동작/거미줄2/커피 술/방언/궤도/책/수레국화/해동/모자 화분/봄날의 가면 장수/붕어빵/함정
4부
로프/눈사람/폭설 터미널/자선의 밤, 얼음새/축제주의보/타임테이블/산책 일기/후쿠시마/일식/연애담
해설
‘너’의 뒤를 계속 따라가기ㆍ김수이
저자
류인서
출판사리뷰
“이쪽 기울 때 너는 떠올랐니”
살기 위해 서로를 버리는 저울의 세계
『놀이터』에서 류인서가 빚어내는 풍경들은 ‘나’의 목소리로 구현된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이곳에 살고 있지만 온전히 이곳에 속해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제도권의 언어와 낯선 이방인의 언어(시어)를 섞어서 구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계와 일상에 골몰하는 생활인인 동시에 이미 멸망한 듯한 시의 나라에서 온 난민이자 이름 없는 종교의 신도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분열은 혼란과 절망을 자아내지만 한편으로는 시인에게 이 세계와 자신을 좀더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거리감을 선사한다.
여기서 만났을 거다 우리
미끄럼틀과 시소, 혼자 흔들리는 그네, 생울타리에 기댄 작은 청소 수레가 속한
모래의 세계
이쪽 기울 때 너는 떠올랐니
우리는 평균대가 아니어서
균형점을 앞에 두고 나뉘어 앉는 세계
시소는 약속이 아니어서
잽싸게 무게를 버리며 달아날 수 있다
떠 있는 빈자리와 쏟아지는 이의 우스꽝스러운 엉덩방아,
이것은 갑에게서 가볍게 을이 생략되는
저울 놀이
―「놀이터」 부분
류인서는 공존과 화해가 불가해 보이는 이 세계를 ‘놀이터’로 묘사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평균대가 아니어서/균형점을 앞에 두고 나뉘어 앉”아야만 한다. 선택과 소유, 승패의 이분법은 우리를 정확히 둘로 양분한다. 심지어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은 약속조차 아니어서 누가 먼저 “잽싸게 무게를 버리며 달아날” 수도 있다. 나와 너는 홀로 남겨져 “우스꽝스러운 엉덩방아”를 찧지 않기 위해 상대를 감시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적대적으로 해체되고, 우리의 만남은 연대가 아닌 누군가의 추락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류인서는 살아남고자 누군가를 내팽개쳐야 하는 생존의 놀이터를 극적으로 그려낸다.
“걷는 일이 남아 있었다”
반복이라는 이름의 계속
그렇지만 시인은 참담한 이 세계에서, 시소 놀이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꿈꾸고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다.
넝쿨 같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는 이, 모르는 이, 걷고 있는 사람 누구도
이 길로 가면 정말 장미인 거냐고는 서로 묻지 않았다
―「혁명의 그림자」 부분
류인서는 이 길의 끝에 정말로 ‘장미’가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돌아올 대답이 무엇이든 시인으로서는 현재의 걸음을, 이 행위의 반복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은 ‘계속’의 다른 이름이다. “정체된 길 위의/난민”(「시계」)에게 반복의 계속과 계속의 반복은 그 자체로써 살아가는 동력이며 희망을 직조하는 작업에 가깝다. 난민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헛된 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이며, 낯설고 불온한 땅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류인서는 최소한의 생존과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어딘가를 모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위태로운 축복의 땅을 향해 끊임없이 발을 내딛는 것, 류인서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시의 남은 운명이며 역할이라고 믿는 듯하다.
잠이 꿈을 지키는 동안
나는 마음의 육체성을 따라가보려 한다.
―「소경」 부분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과 이웃한 화원을 기웃거리는 중입니다. 고무 화분에 장미목 장미과의 사과나무가 살고 있습니다. 가시를 버리지 않은 야생의 근친들도 보입니다. 이 행성에 발 딛고 있는 장미의 오늘을 듣습니다. 장미는 사과의 덜 닫힌 기억 같기도, 시큼한 얼룩 같기도 합니다. 그림자를 버려야겠다고 사과와 장미의 접경지로 순례인지 도망인지를 간 친구가 있습니다. 사과를 먹습니다. 꽃받침이 자라서 된 헛열매를 먹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수정한 다른 장미의 기록을 사과라고 쓰겠습니다. - 뒤표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