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원과 궁극의 지점을 향한 쉼 없는 질문 끝에 도달한 열망의 발화
끝내 닿을 수 없는 또 다른 ‘나’인 ‘너’에게
누구보다 먼저 아프고 오래 앓으며 마지막까지 질문하는 시인,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치열하게 시의 길을 묻는 곽효환의 네번째 시집 『너는』이 출간되었다. 4년마다 한 권씩 새 시집을 출간하는 동안 곽효환은, 까마득하게 먼 곳, 아득한 시절에서부터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두텁게 쌓인 삶의 장소를 거치며 “무수히 많은 나와 또 다른 나”(「시베리아 횡단열차1」, 『슬픔의 뼈대』)를 만나왔다. 총 4부 71편의 시들로 구성된 『너는』에서도 시인은 사회역사적인 상상력에 뿌리를 둔 깊은 사유가 담긴 섬세한 언어들로 서사적 서정성을 길어 올린다. 자신과 세계, 자신과 시대와의 불화를 직접 맞닥뜨린 다음 오래 감내한 뒤 소통을 도출해내며 시원과 궁극의 지점을 찾는 방식으로 축적되고 심화되어온 곽효환의 시적 언어는 지난 시집들에서의 기나긴 물음을 거쳐 마침내 스스로 변화한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좀더 “새롭고 선명”하게(‘시인의 글’).
길이 끊어진 곳에서 더 들어가기, ‘북방’에 대한 공감의 정서, 시원이나 시작 혹은 궁극에 대한 열망이라는 곽효환 시의 특징들은 이 시집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또 새롭게 발화된다. 되풀이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축적일 때, 축적은 축적으로 끝나지 않고 심화를 동반하기도 하며 어느 임계점을 넘는 순간에는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이 변화가 빚어낸 새로운 양상이 ‘사랑 이후’를 주제로 한 연시(戀詩)이다. ‘예술의 본령이 사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문학평론가 정과리)라면 곽효환의 새 시집은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함을, ‘사랑 이후’의 묘사를 통해 암시한다._성민엽(문학평론가)
목차
Ⅰ
돌의 뼈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곡선의 힘
마당을 건너다
마당 약전略傳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루나무가 된 소녀
여름 숲에서 그을린 삶을 보다
첫
숲의 정거장
환인桓仁 가는 길
홀승골성에 오르다 1
홀승골성에 오르다 2
발해 고궁지에서
그들이 온다
압록강은 흐른다
나무들의 동거
백두산 야생화
II
나는 고려 사람이다
우슈토베역에서
바스토베 언덕에서 듣다
사막에서 백두산 호랑이를 찾다
타슈켄트에서 조명희를 만나다
카레이스키 드리밍
직선 위에 사라진 것들
가만있으라 제발
재두루미와 울다
나 또한 괜찮아질 것이다
그 노래가 불편하다
피아노맨
카페 DMZ
잠들어선 안 될 잠에 든 아이들
우리의 선장이 된 사람
2014 여름, 광화문광장에서
남은 사랑을 끝내야 할 때
그늘의 끝과 시작
III
암전
너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에서
선암사에서
그 사람
봄, 철원평야
종려나무 그늘
오월의 그늘
나는 너무 오래 서 있었다
겨울 강
해바라기
폐사지에서
사랑 이후
강의 기원
황하 黃河
성숙해星宿海
잠들지 못하는 사람
IV
해 질 무렵
맨발의 탁발
횡보가 돌아왔다
벽화 마을
미래의 책
모래 광장
사막의 등대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성자
개심사 가는 길
소문난 추어탕집 우거지해장국
감자탕을 먹는 시간
비움과 틈새의 시간
꽃을 만드는 손 낯선 모국으로의 여행
자두
삼합
새 만다라
달의 남쪽
해설 사랑 이후의 열기와 닫기ㆍ성민엽
저자
곽효환
출판사리뷰
닿을 수 없는 ‘너’를 만나려 씌어진 시
곽효환에게 ‘너’란 무엇일까. ‘시인의 말’을 빌리면 너는 “타자이면서 우리”이고 “시원이면서 궁극”이며 “끝내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타자”이다. 풀어 말하자면 ‘너’는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나에게 소중했던 존재이며(“피는 일도 지는 일도 한순간/[……]/후드득 멀어져간 그 사람 흉터로 남네”, 「그 사람」), “내가 받았고 다시 내 아이에게 건네”주려 하지만 이제는 숨어버린 소박한 전통이기도 하고(「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옛적 거친 땅 북방을 떠돌던 “지도에는 사라진/고단한 빈손들”(「여름 숲에서 그을린 삶을 보다」)이기도 하다. 곽효환이 시로 되살려내는 장면에는 항상 누군가의 삶과 저마다의 사연이 그려져 있다.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닿을 수도 없지만 시인은 시로써 내가 아닌 것들, 그 모든 ‘너’가 되어보려 한다. “나 오늘 그때의 당신 그 마음 되어/지우지 못한 아니 지워지지 않은 것들을/아프게 어루만지고 오랫동안 되새깁니다”(「해바라기」). 그러므로 ‘너’는 어쩌면 시작(詩作) 생활 내내 시인이 영영 가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찾아 헤맸던 존재들인 것이다.
미세먼지 가득한 연무에 싸인 겨울 도심 공원
걸음마다 마른 잎새가 바스락거리며 내려앉았다
멀리 왔다고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조금은 쓸쓸한 것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너는, 나는
많이 싸웠어야 했다
불확실한 위험과 시련에서
등 돌리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그 차오르는 말들을
그 세세한 기억들을
그 기적 같은 감정을 지키기 위해
한때 가까웠던 우리는
더 많이 더 열렬하게 싸웠어야 했다
아무 데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는
너라는 깊고 큰 구멍
―「너는」 부분
삶 이후의 삶, 사랑 너머의 사랑시
시인이 오래도록 몸담은 직장은 광화문에 있다. 고층 건물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광화문은 어느 날엔 “트인 광장”이었다가 어떤 날은 “분리대”였다가 가끔 “고장 난 확성기”가 되는 곳이다. 모두가 ‘나’의 목소리만을 높이는 혐오의 시대에, 그곳에서 시인은 필연적으로 “길을 잃고 서성”이면서 ‘너’라는 근원을 찾아 헤매는 시를 쓴다(「2014 여름, 광화문광장에서」).
이번 시집에는 연시라고 여길 법한 시들이 자주 등장한다. 어떻게 읽을지는 물론 독자의 몫이지만 ‘너’가 단순히 옛 연인이 아니라는 데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의 범주가 머나먼 시공간 그 자체, 무명의 누군가, 나아가 카레이스키(「바스토베 언덕에서 듣다」 「카레이스키 드리밍」), 터전을 잃고 떠도는 난민(「피아노맨」), 우리 곁의 이웃(「잠들어선 안 될 잠에 든 사람」 등), 돌고 돌아 내 안의 타자에게까지 확장될 때, ‘사랑’도 이별 뒤의 그리움에서부터 소중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가 되어보는 행위에 이르는 더 커다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곽효환의 사랑시는 단순한 연시가 아니라 더 깊은 무엇으로 읽히게 된다.
나에게서 시작한 시는 그렇게 그 모든 ‘너’를 거쳐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나를 비워낸 자리에 너의 마음을 담아 ‘너’가 되어보려 하지만 결국 온전히 ‘너’를 이해해낼 순 없다. 지난 시집에서 대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유효한지 물었던 시인은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너’에 가 닿고자 하는 부단한 시도를 끝내 멈추지 않는다.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처럼 시집 속 주된 심상을 전면에 내세운 그간 시집의 제목들과는 달리, 이번 시집의 제목인 “너는”은 정의하기보다 열어둔다. 그 모든 ‘너’들이 시 안에 보존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로써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이 ‘열림’은 장차 곽효환의 시적 행보를 짐작하는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한때는 단단했으나 조금씩 녹아
어느새 부유하는 유빙의 위태로운 미련을
뙤약볕 아래 홀로 남아 끝내 시들고 만
풀 한 포기, 그 불모의 고요를
잠 못 드는 밤
격랑이 일고 폭풍이 지난 뒤의 폐허를
그 후에 밀려오는 것들을
낮과 밤의 길이를 몸으로 느낄 때 마침내
꽃을 피우는 식물들의 광주성光週性처럼
빛과 그늘의 길이를
그 분계를
아슬아슬하게 혹은 아프게
넘나들어본 사람만이 안다
사랑은 빛의 길이에 따라
오고 또 가는 것임을
―「사랑 이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