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온 것 같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탐정, 판타지, SF, 괴담, 범죄, 호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을 다진 에도가와 란포의 걸작
서양 추리소설의 수동적 수용에서 벗어나 일본인에 의한 독자적인 추리소설 창작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을 다진 거장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걸작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パノラマ島綺譚/人間椅子)』(대산세계문학총서 151)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란포의 걸작으로 이견의 여지가 없는 1927년 작 「파노라마섬 기담」과 발표 후 독자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1925년 작 「인간 의자」를 엮은 것이다. 가난한 무명작가 히로스케는 신이 만든 대자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지상 낙원으로서 미(美)의 나라를 만들려는 극단적인 몽상가이다. 또한 모두가 외면하는 추한 의자 직공은 외로움과 허무함에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뜻하지 않은 기회가 온다. 그러나 그걸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스스로를 죽인 남자.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쾌락을 좇아 소라게처럼 의자 속에 자신을 숨긴 남자.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의 중단편 「파노라마섬 기담」 「인간 의자」의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욕망이 억눌린 사람들이다. 이들의 욕망은 결국 기이하게 표출되는데, 날것 그대로의 원시적 욕망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스럽다. 란포의 장기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묘사와 에로티시즘, 기발한 트릭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짜인 이 작품들은 엄청난 흡인력으로 단숨에 결말까지 내달리게 만든다.
목차
파노라마섬 기담 7
인간 의자 129
옮긴이 해설·이 세상은 꿈, 밤에 꾸는 꿈이야말로 진실 151
작가 연보 159
기획의 말 161
저자
에도가와 란포
출판사리뷰
“뭐가 무섭냐고요? 이 섬이, 그걸 생각해낸 당신이 무서워요.”
- 일상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동경한 란포, 그의 오랜 열망을 형상화한 걸작 「파노라마섬 기담」
마치 귀마개를 끼면 귀가 먹먹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범죄에 대한 공포가 어느 수준을 넘으면 양심은 먹통이 되나 봅니다. 그 대신 악에 관한 이성이나 지혜가 벼려진 면도날처럼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워져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정밀한 기계 장치처럼 미세한 부분 하나 놓치는 법 없이 잔잔한 물처럼 냉정하고 침착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_본문에서
어느 무명 ‘소설가의 자살’. 히토미 히로스케의 죽음 뒤에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무서운 계획이 있었다. 값싼 번역 일을 하청받아 하거나 성인소설을 쓰며 살아가던 히로스케는 마치 음악가가 악기로, 화가가 물감으로, 시인이 문자로 예술을 창조하듯이 생동하는 자연을 재료 삼아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몽상에 빠져 있었다. 무기력 속에 실현 불가능한 상상만 하던 어느 날, 그는 급기야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현실화할 기회를 잡는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에도가와 란포가 1926~27년에 걸쳐 문예지 『신세이넨(新靑年)』에 연재한 초기 작품으로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맥을 잇는 동시에 작가만의 독창성을 가미하여 고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던 무렵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무인도 ‘먼바다섬’에 몽상가 히토미 히로스케가 자신의 이상대로 파노라마를 건설하는 내용인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파노라마관을 연상시킨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현실 세계와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 그곳을 지나면 펼쳐지는 불가사의한 세계. 관람객이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는 동안 생각을 멈추고 현실과 단절된 뒤 다른 세계인 파노라마를 마주하는 것과 같이, 독자는 히로스케의 범죄 구성의 통로를 따라가 황홀하고 충격적인 파노라마섬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파노라마섬에 대한 묘사는 어려서부터 이어온 란포의 환상과 주인공의 미적 탐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주인공이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은 너무도 기괴하여 독자들에게 낯선 충격을 안긴다. 란포의 장기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묘사, 에로티시즘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란포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대표작 중 하나로 남았다.
“저는 지금 당신 앞에 제가 지어온 참으로 불가사의한 죄악을 고백하려 합니다.”
- 일본 문예지 『구라쿠(苦樂)』의 독자 인기투표 1위 「인간 의자」
처음에는 그저 제 진심을 담은 아름다운 의자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은, 그래서 가능하면 그 의자를 어디까지든 따라가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꿈틀꿈틀 망상의 날개를 펼치더니 어느 틈엔가 평소 제 머릿속에서 무르익어 있던 어떤 무서운 생각과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저란 사람은 얼마나 미치광이인지요.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실제로 행해보자고 마음먹은 겁니다._본문에서
아름다운 작가 요시코에게 갑자기 날아온 편지. 그날그날 생계를 꾸려가야 했던 가난한 가구 직공은 왜 의자로 들어갔는가? 다짜고짜 ‘부인’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를 고백하겠다는 편지를 읽어갈수록 요시코와 독자는 무서운 예감에 긴장하게 되고, 첫번째 편지를 다 읽었을 때 도착한 두번째 편지는 또 한 번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
「인간 의자」는 에도가와 란포가 1925년 문예지 『구라쿠(苦樂)』에 발표한 작품으로, 논리적인 해결보다는 사건이나 장면이 주는 오싹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변격소설로, 현실 세계에서는 그 누구의 관심과 환대도 받지 못하는 추한 외모의 의자 직공이 기괴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짧은 작품은 일단 펼치면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 있는 전개와 긴장감, 극적인 반전 등, 단편소설로서 그리고 추리소설로서 갖춰야 할 필수적인 미덕이 두드러지는 걸작으로 추리소설의 필독서이자 고전이 되었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이자 현재진행형, 에도가와 란포
어려서부터 추리 소설을 좋아했던 에도가와 란포는 대학교 2학년 때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짜인 단편소설의 묘미를 처음 맛보고 이지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착안해 자신의 필명을 에도가와 란포로 지을 만큼, 포와의 만남은 그에게 운명적이었으며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서양 추리소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본격탐정소설을 주로 집필했으나, 나중에는 사건 해결보다는 오싹한 분위기, 모험, 범죄, SF 등 주변적 요소를 강조하는 추리소설인 변격탐정소설을 많이 썼다. 「인간의자」 역시 사건보다 서스펜스로 독자를 장악하는 작품이며, 「파노라마섬 기담」도 범인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범죄 환상소설로 란포의 작풍 변화를 예고한 작품이다. 1927년 자신의 작품세계와 독자들의 요구 사이의 간극으로 창작에 한계를 느끼고 잠시 휴필한 후 1928년에 복귀한 뒤에는 「음울한 짐승」 『거미남』 등 ‘선정성,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잔혹성’을 내세운 작품을 발표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란포는 탐정, 판타지, SF, 괴담, 범죄, 호러 등 일본 추리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개척했으며, 『괴도 20면상』 등 ‘소년탐정단 시리즈’를 써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란포는 집필뿐 아니라 추리소설의 발전과 보급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평론가로도 활약하고 추리소설 잡지의 편집과 경영에 참여했으며, 일본탐정작가클럽(현 일본추리작가협회)의 창립을 주도하며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 협회에서 주관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은 히가시노 게이고 등 수많은 인기 작가를 배출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그 이름 자체로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가 된 란포의 수많은 작품은 만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으로 재탄생되며 현재까지도 대중문화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