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삶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단함을 섬세하게 살피며
존재의 상실과 방황을 그려낸 작가의 첫 책
『여수의 사랑』
작가의 첫 책이자 첫번째 소설집. 1995년에 출간된 『여수의 사랑』은 삶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단함을 섬세하게 살피며 존재의 상실과 방황을 그려낸다. 이번 출간을 통해 소설 배치를 바꾸고 몇몇 표현을 다듬었다.
여수발 기차에 실려와 서울역에 버려진 자흔과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자신과 동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정선(「여수의 사랑」),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인규(「질주」), 식물인간이 된 쌍둥이 동생의 삶까지 살아내야 하는 동걸(「야간열차」), 백치 같은 여동생을 버리고 고향에서 도망친 정환(「진달래 능선」) 그리고 집과 고향을 버리고 고아처럼 떠돌며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영진과 인숙(「어둠의 사육제」). 여수는 어딘가 상처 입고 병든 이들이 마침내 다다를 서러운 마음의 이름이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시선이 녹아 있는 일곱 편의 단편들에서 고독하고 고립된 등장인물들은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한다. 죽음 가까이에서 존재의 살아 있음을 일깨우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는 존재들이 차갑고도 뜨거운 여운을 남긴다.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_강계숙(문학평론가)
목차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해설
`되삶`의 고통과 우울의 내적 형식
_강계숙
작가의 말
저자
한강
출판사리뷰
점 세 개를 이어 그린 깊은 선 하나
오늘의 한강을 있게 한 어제의 한강을 읽는다. 1993년 등단 이후 단단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줄곧 삶의 근원에 자리한 고독과 아픔을 살펴온 작가 한강, 그가 현재까지 출간한 소설집 전권(총 세 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재출간’이라는 무색무취한 단어보다, 빛깔도 판형도 하나하나 다른 소설집 세 권을 조심스레 이어 하나의 선 위에 두는 작업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스물서너 살 때의 작가가 1년 동안 휘몰아치듯 썼던 단편을 모은 것이 1995년 한강의 첫 소설집이자 통틀어 첫 책인 『여수의 사랑』이다. 5년 만에 출간된 두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에서 한강은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만난 듯하다가, 이내 다시 묻는다. “이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작가의 말」) 그리고 12년이 지나 세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을 펴냈다. 그 사이사이에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이 씌어졌다.
단편은 성냥 불꽃 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작가의 말」(2012), 『노랑무늬영원』
돌아보아야 궤적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집 세 권이 출간되는 동안 한강 단편소설에서 변화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갈망을 간절하게 드러내며,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는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들은 『내 여자의 열매』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과 서로를 서툴게 받아들이려다 어긋나버리고 상처 입는다. 그리고 『노랑무늬영원』에 이르러 재생의 의지와 절망 속에서 생명력은 더 강하게 타오른다. 존엄해진 존재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상대를 껴안으려 시도한다. 끝내 돌아가고야 말 어딘가이자, 잎맥을 밀어 올리는 이파리, 회복기에 피어난 꽃, ‘점을 잇는’ 작업 동안 오롯이 담아내고자 했던 자연스러운 변화와 흐름은 표지에 사용된 사진작가 이정진의 작품과 조화를 이룬다.
한편 변함없는 것은 한강의 치열한 물음이 아닐까.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존재, 삶과 죽음, 이 세상에 대해서 스물한 편의 소설 내내 묻지만 필연적으로 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파르스름한 불꽃 같은 그 물음 자체가, 물음에서 파생되는 고독의 열기와 세심한 슬픔이 작품 속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고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변화했으나 변하지 않았으므로, 신중하게 소설들의 배치를 바꾸었고 몇몇 표현들을 손보았지만 두어야 할 것은 그대로 두었다.
앞서 “누구”를 묻던 『내 여자의 열매』 속 작가 자신의 물음에, 『노랑무늬영원』의 새로 씌어진 작가의 말을 이어본다. 그 궤적을 함께 되짚어보길 권한다. 누군가, 스무 해 남짓 홀로 써왔다. 한강은 여전히, 걷고 있다.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십이 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작가의 말」(2018), 『노랑무늬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