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양이 좋아하세요?”
한밤에 들려오는 은밀한 고백
삶에 균열을 내는 부드러운 침입자들
정밀한 구성과 세련된 분위기로 문단과 독자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손보미의 두번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 2018)이 출간되었다. 손보미는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수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각 한 권씩 펴냈고, 대산문학상 등 신인으로서는 이례적일 만큼 유수의 문학상들을 수상했다. 9편의 작품들을 묶은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는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산책」, 제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임시교사」도 수록되었다.
“말로 규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환기하는 스타일”(문학평론가 신형철)이라는 평을 받으며 일상의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손보미는 이번 소설집에서 삶이 불가해한 존재의 침입으로 인해 미묘하게 변화되어가는 양상을 묘사한다.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는 인물들이 새로운 자아와 관계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세심하고 정갈한 문체로 담아낸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나영은 손보미의 소설이 “각자의 삶이 자신과 타인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어째서 불가능한가에 관한 집요하고도 예리한 성찰”의 결과물임을 지적하며,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손보미의 소설이 필요한 이유는 타인이라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에 “관심과 관찰”을 멈추지 않으려는 노력이 모두에게 긴요하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그러므로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은 불가해한 타인을, 안온한 삶의 바깥과 그 심연을 담은 이야기를 현재 한국 문단에서 가장 근사한 목소리로 전해 듣는 경험이 될 것이다.
목차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대관람차
산책
임시교사
고귀한 혈통
죽은 사람(들)
상자 사나이
몬순
고양이의 보은
해설 |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_김나영
작가의 말
저자
손보미
출판사리뷰
우연적 상처와 필연적 성찰의 이야기들
손보미의 소설은 주로 어떤 존재나 사건이 일상으로 틈입해오는 순간에 전개된다.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은 헤어진 여자친구의 집에 자꾸 담을 넘어 들어오는 고양이들을 퇴치하러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로, 「산책」은 밤마다 외출을 나가는 아버지의 집에 딸네 부부가 느닷없이 방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상자 사나이」는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은 꼭 배달되는” 상자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고양이의 보은: 눈물의 씨앗」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래서 보통의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게 되는 사건이 계기이다.
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고양이는 언제나 무단 침입하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p. 18)
손보미는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공격으로부터 늘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삶을 면밀히 관찰한다. 별안간의 공격은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일상의 균열은 다소 우연적으로 발생하지만 그로 인한 성찰과 반성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보미의 소설에서 자아의 폐기와 재생의 절차란 과연 무엇을 위해 요청되는 것일까.
상처투성이로 타인과 마주하기
「산책」에서 아버지가 한밤의 산책 중 젊은 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그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은 작가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드러낸다.
언젠가부터 어린 부부는 과자를 먹는 대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 오가는 단어도 전보다 과격해졌다. 그들은 막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들 앞에 나타나서 뭔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인지, 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는 이렇게 무언가를 확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p. 76~77)
완전한 타인,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이를 만나는 순간, 손보미는 “무언가를 확신할 수 없는 처지”를 환기한다. 지금까지의 나, 평생의 습관 혹은 믿음에 대한 의구심이 발생하는 이 순간은 어떤 존재가 갑작스레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침입의 순간과 다르지 않다. 이는 알고는 있지만 늘 실천하기 어려워하는, 미지를 향한 적극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떠올리게 한다.
저 불이 모두 꺼지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P부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하는 곳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믿었었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임시교사」, pp. 115~16)
보모로서 젊은 부부의 아이와 노모를 맡아 그들 가족의 생활이 평안히 지속되도록 노력해온 P부인은 어느 날 그 쓸모를 다하여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그 밤 침대에 누워 P부인은 문득 생각한다. 자신이 그들에게 쏟아부었던 헌신이 어쩌면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이 여태껏 “용기”라고 생각한 마음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과 회의는 곧 삶에 대한 보편적인 긍정성으로 갈음된다. “사는 건 그런 거지.” P부인은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며 “잘못된 일들이 언젠가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통해 한순간에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회복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고유의 낙천성이라기보다 그동안 여러 가정을 돌보았던 경험에서 건져 올린, 말하자면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손보미의 소설은 바로 이 지점, 우리가 타인을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만 가능한 삶의 지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처를 입더라도 타인과 조우하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존의 자아를 허물어뜨리고 다시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 부단히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은 나와 타인이 공존하는 삶을 섬세하고 깊숙이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손보미만의 정교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의 말
첫번째 소설집을 발간한 게 2013년 여름의 일이다. 그해에 나는 여러 가지 다짐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다시 작품집을 내게 된다면 작가의 말은 쓰지 않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2018년 여름에 나는 또다시 이렇게 작가의 말을 쓰고 있다.
거의 의식하지 못했는데, 꽤 오랜만에 작품집을 출간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동안 쓴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는 동안, 나는 각각의 작품을 쓰던 그 장소와 시간 그리고 작품을 쓰는 동안의 내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즐겨 듣던 음악을 다시 접하게 되면, 그 음악이 나를 그 시간과 장소와 마음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꿈처럼. 나는 그 꿈속에서 맥북에어가 올려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때때로 맹렬하게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멍하니 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기도 하다. 즐거울 때도 있고, 곤란함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 곤란함. 나는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아, 이거 너무 곤란하게 됐는걸? 하지만,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주 다른 생각에 빠져들어 있다. 실제로,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틈만 나면 다른 생각?그즈음 본 영화라든지, 연예인의 가십이라든지, 예쁜 구두라든지, 며칠 전 우연히 만난 동창과의 대화라든지?에 빠져들곤 했다. 한동안 나는 이것을 심각하게 걱정해서 내가 주의력 결핍 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동생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녀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자주 그러는걸.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문장을 거의 쓰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날, 해가 지면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아, 어떻게 해? 오늘도 한 글자도 못 썼어, 집에 가고 싶은데 못 가겠어,라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나에게 이렇게 답을 보내주었다.
그것도 소설 쓰는 시간에 포함되는 거야. 내일 다시 쓰면 돼. 그러니까 괜찮아.
돌이켜보면 그 말은 언제나 사실이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면 언젠가 한 작품을 쓰는 시간은 끝이 났다. 작품과 내가 서로에게 만족하는 끝도 있었고, 나는 만족하지만 작품은 만족하지 못한 끝도 있었고, 어쩌면 그 반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시간은 어쨌거나 끝이 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시간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낸다. 적어도 이게 내게는 아주 커다란 행운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어쩌면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저 흩어져버리는 일상을 붙잡아두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게 일기든, 산문이든, 편지든, 소설이든 간에 문장을 쓴다,는 이 물리적이고 소박한 행위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시간을 붙잡아서 미래의 우리에게 전달해줄 것이다. 그리고 너무 큰 욕심이겠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에 씌어진 문장들을 통해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아주 잠시라도?마주하게 되기를 지금의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있다.
2018년 8월
손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