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탈한 자의 귀환,
김중식 25년 만의 새 시집
「황금빛 모서리」 「이탈한 자가 문득」 등으로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아온 김중식의 두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문학과지성사, 2018)가 출간되었다. 그는 다소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회자된 시집 『황금빛 모서리』(문학과지성사, 1993)로 독자에게 여전히 익숙한 시인이다. 첫 시집을 탈고하고 1995년 언론사에 입사했던 김중식은, 2007년부터 국정홍보처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 비서관실에서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 감각으로 연설문 작성을 맡기도 했던 그는, 이후 2012년부터 약 3년 반 동안 주 이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문화홍보관으로도 재직하였다. 시집 『울지도 못했다』는 이전 김중식의 시 세계가 집중한 암담한 현실 인식 위에 그간의 다양한 생활 경험에서 비롯한 낙관성이 더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악다구니의 고난 속에서 ‘울지도 못하고’ 또 한 발자국 내딛어보는 이번 시집의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990년대 당시 시집 『황금빛 모서리』는 한국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시집으로 손꼽힌다. 그의 시는 매우 실험적인 듯하면서도 시의 전통을 버리지 않았고, 시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자유로웠다. 다소 자학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시들이 담겼지만, 그때부터 생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남달라 “따뜻한 비관주의자”(문학평론가 강상희)라고 명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단의 호평과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 괴리로 인한 내적 갈등과 생계의 무게로 인해 절필했던 그는, 이란에 머무는 시간 동안 혁명과 역사,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해 사유하며 시를 다시 쓰는 계기를 맞았다. 시인은 뒤표지 글에서 “첫 시집이 고난받는 삶의 형식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인간의 위엄을 기록하는 영혼의 형식이다”라고 밝힌다.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의식을 담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한 김중식,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 땅에 발붙이고 치열하게 써낸 새로운 시 세계가 펼쳐진다.
목차
I
자유종 아래/도요새에 관한 명상/스키드 마크/랜섬웨어 바이러스/지구온난화/보험사/1394 is 주체/시즌 2/철한낸보서에국천/난리도 아닌 고요/금연 포기/아파트 오후 4시/조망권/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비, 스피드, 그리고 대서부열차/늦은 귀가/극장 해체 공사/키다리 풍선 인형/꿈틀대며살아가는물생들이/파자/그대는 오지 않고/어쩌다 종점
II
이 더러운 세상/노아의 방주/바람의 묘비명/바람 물결 위의 텐트/만신전/만년설상가상/사막 시편/편시 막사/사막 건너기/바다 건너기/원년, 안전선/모래시계/땀 흘리는 불/기차/요 ‘ 艸 ’ 모양의 삶/사미인곡/속미인곡/저 세상 안쪽으로/피맛골 빈대떡집/방랑자의 노래/보름달 계수나무/미래 비전
III
경청/휴화산/곤충 같은 사랑/별이 불타는 밤에/관능/꽃/다시 해바라기/꽃에서 사랑까지/영변의 약산 진달래꽃/비냄새/대륙처럼/방사림 아래/신재생 알코올 에너지/태양 에너지/승천/밤바다 천리향/그저 살다/기러기 떼 헛가위질하듯/봄에 취하다/참 시끄럽다/세월이 흐른 뒤/물결무늬 사막
해설 머물러도 떠돌아도 무엇이 있는 게 아니지만ㆍ차창룡
저자
김중식
출판사리뷰
사막처럼 끝없고 지옥처럼 끓어오르는 생,
그러나 “풀잎은 노래한다”
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
뱃가죽에 불붙도록 식솔과 기어온 생
돌아갈 곳 없어도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
안 가본 데는 있어도 못 가본 덴 없었으나
독사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여,
바다는 또 어느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
듣도 보도 못 한 물결이 옛 기슭을 기어오르고
두 눈은 침침해지고 뵈는 건 없는데
온다는 보장 없이 떠나는 건 나의 몫
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풀잎은 노래한다
온몸을 떨었어도 그대 오지 않았듯이
더듬어 돌아올 길이 멀어지는 게 두려울 뿐.
- 「그대는 오지 않고」 부분
김중식의 시 세계에서 ‘사막’은 ‘생의 유비’로서 꾸준히 활용되었다. 첫 시집에서 사막 같은 삶의 고행에서 이탈하여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욕망이 컸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이런 지옥 같은 생을 ‘그래도’ 살아나가보고자 하는 의지가 더 돋보인다. 인용된 시에서 보듯 여전히 날카로운 감각으로 세계를 인지하지만, “독사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에서도 “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떠나고 또 성장해서 돌아올 날을 가늠해본다. “지상에 세운 천국은/팝업 그림책으로 벌떡 일어서는 병풍 지옥도”(「1394 is 주체」)처럼 자유를 억압하고 인위적인 천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힘을 풍자하면서도, “세상이 아니라 사는 게 더러운 것”(「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사막을 횡단하는 고래, 태평양을 건너는 낙타
기적 같은 삶을 위한 미래 비전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진다
우는 이유를 잊을 때까지 우는 여자여
우리는 가끔씩 울어야 한다
우주가 좁도록 세포분열하는 아메바처럼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한가득 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가을 숲 불꽃놀이가 끝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봄에 꽃을 피우는 것
가장 깊은 상처의 도약
가장 뜨거웠던 입의 맞춤
할례당한 사막 고원에 핀 양귀비처럼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에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
- 「물결무늬 사막」 부분
사막과 바다는 가장 대조적인 공간이지만 시인은 오늘도 사막에서 바다의 물결을 본다. 그가 불모의 세계에서 생명의 힘을 보는 이유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서로 떨어져 있어 영원히 만나볼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들도 서로 교감이 가능한 만남,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이들이 화합할 수 있는 대긍정의 세계를 꿈꾸며 좀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시인의 자세가 시편들마다 도드라진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시인 차창룡은 위의 시를 「시인의 말」 말미의 “천국은 하늘에, 지옥은 지하에, 삶과 사랑은 지상에”와 연결해 읽어내며 “쓸데없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지옥은 지하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랑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랑의 왕국은 사실상 우리가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지금 이곳’이기도 하다”는 점을 짚는다. 25년 만에 돌아온 그가 마음 놓고 숨 쉬는 것마저 어려운 오늘의 지옥에 내놓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희망’은 결국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