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끝없는 안간힘으로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으며
세계의 폭력과 불가해에 맞서는 몸의 언어
동시대의 문학과 풍경, 사람과 사건을 견고하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해온 이영광의 다섯번째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이 출간되었다. 몸의 시학에 관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전위적인 실천으로 평가받았으며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수록된 『나무는 간다』(창비, 2013)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이영광은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이래 다수의 시집과 선집을 출간하며 시대와 존재의 고통을 체화한 시들을 선보였다. 시인 신경림이 “이 땅에 사는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섬뜩할 만큼 치열하고 날렵하게 형상화했다”(「제11회 미당문학상 심사평」)라고 호평한 것처럼 이영광은 참혹한 현실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적 언어로 생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부단히 애써왔다.
그런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이 지닌 한계이자 매개인 ‘몸’을 통해 ‘사람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이곳’에서 물러서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의 난폭과 몰이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은 “부서지지 않는 강인함이 아니라 막다른 곳에서 서서히 허물어지면서, 허물어짐으로써, 허물어지기 때문에 버티어내는 자의 강인함”(이장욱)을 연상시킨다. 이영광은 현실의 위협에 맞춰 변화를 꾀하기보다 자신이 지금 감지하는 통증과 몸의 언어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고통과 상처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비로소 사람다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끝없는’ 몸부림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사람’일 수 있다는 숭고한 시적 증명이자 실천의 결과를 이룩해낸다.
목차
시인의 말
Ⅰ
겁/궁리/무인도/덫/방심/외계인이 와야 한다/몸 생각 1/몸 생각 2/몸 생각 3/마음 1/마음 2/사월/기관/단 두 줄/진주 시외버스터미널/평행우주의 그대/비밀
Ⅱ
촛불/사막/요양원/단칸/서울역/칼/파랗게/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무인사/말/여수/무덤들/저승꽃 이승꽃/봄 바다/아픈 돌/무릎/재미/돌아가는 것/연립들 1/연립들 2/바닥/적/절반/올챙이/악수/고운 새/가을/늙음행/간밤/병원/너희가 왜 아직 여기에/폐/1월 1일
Ⅲ
눈길/폭풍이 오면/문제/살아나고 있다/어디에도 죽을 길이 없어서/낚시터 여자/큰 나무/안전/사랑/먼지에 묻은 것들/사실은/박근혜 만세/왕/세븐일레븐/그 시인/곤경
Ⅳ
새로 돋는 풀잎들에 부쳐/쉰/집/요약/눈물 배우기/졸업장/움막/황금빛 누더기/직유들/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물은 모르는 종이/우연히/졸음/불행/벌레/수학여행 다녀올게요
해설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 양경언
저자
이영광
출판사리뷰
참담한 현실을 오롯이 감각하는 시
이영광은 삶에서 일어나는 파문에 정직하게 괴로워하는 시를 써왔다. 이는 “견디면 견뎌지는 어떤 것을 조금씩 견”디며 사는 쥐의 입장을 쓴 시 「덫」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쥐는 “시궁창, 썩은 마음의 양식, 강철의 어둠”을 “달콤히 오독”하며 살아간다. “가도 가도 구멍뿐인 생”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끝내 “견딜 수 없는 덫”에 걸려든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통증이 그를 엄습”하는 순간 놀랍게도 그는 “너무도 큰 쾌락”을 감지한다. 마치 오랜 긴장과 피로 상태가 해제되는 찰나처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던 삶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처럼 죽음이 ‘쾌락’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영광에게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 즉 쥐가 아닌 사람으로서 ‘제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괜찮아, 괜찮을지도 몰라
이 사선은 정말
괜찮을지도 몰라를 안전히
괴로워했지만,
어느 날 의심을 잊고
피 흐르는 안전을 잊고
넘어가버렸다
어딘지 모른다
넘어가버렸던 것 같다
돌아왔다
돌아온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나는 이 환한 곳에
죽어 있고
나는 그 어두운 곳에
살고 있다
―「안전」 부분
이영광은 ‘알 것 같은 어제’(과거)와 ‘알 수 없는 오늘’(현재)이 이루는 부정교합의 층위에서 시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눈에 띄는 점은 그가 성급히 희망을 움켜쥐고 미래로 나아가기보다 앎과 알지 못함의 간극을 골똘히 응시함으로써 마비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에도 “징역 살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함으로써 “이 신기한 지옥”을 쉽사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반복된다(「무인도」). 이영광에게 삶을 제대로 실감하는 일이란, 즉 사람답게 사는 일이란 어떤 확신과 오만도 없이 현실의 괴로움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통증을 앓는 수인
그렇다면 시인이 세계의 고통을 감지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이 지닌 물질적 한계이자 유일하게 외부와 소통 가능한 통로인 ‘몸’이다. 시인은 머리로 ‘생각’만을 질기게 이어가기보다 몸소 움직이는 활동을 통해서, 상황에 투신하여 목격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이 세계를 오롯이 감각하고자 한다. 즉 자신이 놓인 시공간의 참혹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는 방식으로 피 흘리는 것이다.
예전에, 수술받고 거덜 나 무통 주살 맞고 누웠을 적인데
몸이 멍해지고 나자, 아 마음이 아픈 상태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순간이 오더라고, 약이 못 따라오는 곳으로 글썽이며
한참을 더 기어가야 하더라고
마음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 물으면,
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
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
그 눈물을 마음의 통증이라 말하고 싶어
―「마음 1」 부분
시인에게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은 “눈물”이며 “마음의 통증”이다. 이처럼 이영광은 보이지 않는 마음, 우리가 타인에게 꺼내 보여줄 수 없는 의지가 결국에는 처절한 고통을 앓고 난 이후의 몸으로 발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능동적 통증’을 통해서만 사람이 사람이기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해설처럼 이영광은 “통증을 앓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로 한 자”이며 “수인의 숙명”을 타고난 자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온통 뒤집어쓴 채 그 안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시인을 만나는, 끝없는 실천 의식으로 사람 되기를 멈추지 않는 생과 조우하는 놀라운 시적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시인의 말
우울은, 쓰게 한다.
명랑은 그걸 오래 계속하게 하고.
주름 없어 잘 웃지 않는 명랑은 말한다.
네 모멸의 기쁨, 겸손의 쾌락을 내려놓아라……
다 내려놨어, 나는 거짓말하고.
명랑하고.
아야, 내 신세야……
2018년 7월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