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견고한 현실을 무너뜨리는 상상력의 시공간
황홀함을 부르는 나직한 읊조림
강성은의 세번째 시집 『Lo-fi』(문학과지성사, 2018)가 출간되었다. 강성은은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동화적 상상력을 낯선 방식으로 풀어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와 무의식적 주체를 통해 잠재된 감각을 탐구한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Lo-fi』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시인 함성호)는 말처럼 이제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은 이편의 세계에서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안락하게 누려오던 현실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선사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리스 블랑쇼가 정의한 문학처럼 읽는 존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도록 이끌어 우리가 새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세계에 대한 확신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한 삶으로 순식간에 독자의 위치를 옮겨다 놓는 것이다. 그 위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거나 영면 이후의 시공간이기도 하고, 현실도 꿈도 아닌 지점이거나 환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면과 현실 세계, 그리고 시인이 고유하게 구축한 ‘어떤 세계’까지 한순간에 감각하는 경험은 강성은의 시를 따라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시적 경험일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섣달그믐/밝은 미래/Ghost/그곳은 평화롭겠지/사운드/카프카의 잠/저녁의 저편/채광/사랑의 방/악령/환상의 빛/안식일의 유령들/Ghost/비닐하우스/미아의 겨울/계면界面
2부
말을 때리는 사람들/동물원/부고訃告/낙관주의자/밤의 광장/안티고네/Ghost/Ghost/저지대/환상의 빛/여름 일기/여름 주간/0℃/거울을 통해 어렴풋이/유령선/나의 나 된 것
3부
Ghost/거울/합창/환상의 빛/공원/병원/까마귀들/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야간 비행/Ghost/생각하는 냉장고/알랭 레네의 마음/죽음에 이르는 병/야옹뚱뚱/단편 같은 장편/죄와 벌
해설
결렬 · 장은정
저자
강성은
출판사리뷰
‘지금-여기’라는 알 수 없는 시공간에서
『Lo-fi』를 여는 첫 시는 음력의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섣달그믐」이다. 이는 두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을 열었던 첫 시가 삶의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기일忌日」이었던 것과 겹쳐진다. 이처럼 강성은은 끝나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죽어야만 새롭게 살아볼 수 시적 상황을 펼쳐 보이곤 한다.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는데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다고 말하거나(「섣달그믐」), “삶을 포기하고 나면/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카프카의 잠」)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러한 언술은 독자를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시간적 틈새로, 현실과 꿈의 접점이라는 공간적 틈새로 유도한다. 시를 따라 읽던 독자가 어느 순간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현실도 꿈도 아닌 불가해한 지점에 당도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알아버렸지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밝은 미래」 부분
어느 겨울밤, 한 남자는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듣고 눈 속에서 파묻힌 개를 찾아낸다. 그런데 이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화자는 별안간 깨닫는다.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그 순간 독자는 이 목소리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들려오는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시적 상황에서 비롯한 불가해함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목소리를 따라 읽던 독자의 것으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다. 강성은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가 익숙하게 확신해온 ‘지금-여기’라는 감각이야말로 가장 믿기 어려운 감각이 아닌지를 묻는다.
생각이라는 새로운 삶의 징조
그렇다면 시인이 펼쳐 보이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읽고 난 후,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시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의 이면을 겪고 난 뒤,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남는가.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죄와 벌」 전문
이 시에서 ‘나’에게는 이렇다 할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각한다”라는 구절이 세 번 반복될 때,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인 ‘죄와 벌’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나’는 응당 내게 있을 어떤 ‘죄와 벌’을, 아무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죄와 벌’을 상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가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임을 감안할 때, 시인이 “좋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독자인 우리를 징벌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해설처럼 “좋은 사람”을 “좋은 시”로 바꿔 읽는 순간 납득이 가능하다. 좋은 시들이 몰려와서 자꾸 우리를 먼 곳에 옮겨 놓으면, 우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숟가락을 들고 잠자리에 눕는 등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쉽게 잊히지 않는 “좋은 시들”에 관한 생각일 것이다. 강성은은 이 ‘생각’들을 통해 시적 경험이 우리의 현실, 각각의 삶에 현현하도록 이끈다. 불가해한 경험을 끊임없이 상기함으로써만 우리의 경직된 일상이 미약하나마 변화의 징조를 품은 삶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Lo-fi』는 시집을 덮는 순간 황홀한 시적 경험을 통과해온 우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