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70년을 기다렸다!
전 세계 독자가 선택한 현대의 고전
한국 최초 그리스어 원전 번역
“조르바는 내게 삶을 사랑하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1957)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사용 인구가 1천만 명 정도인 언어로 쓰인 작품이 이렇게 전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얻은 경우는 흔치 않다. 카잔자키스는 깊은 고찰에서 나온 심오한 사상과 예민한 감각에서 나온 섬세한 감수성, 반복되는 탈고로 다듬어진 아름다운 문장으로 독보적인 캐릭터 ‘조르바’를 창조하여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번역되었으며, 자유로운 인간의 원형 조르바는 많은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미 한국어로 여러 종이 번역되었으나, 그리스어에서 한국어로 직접 번역한 것은 이번 문학과지성사 판(版)이 처음이다. 그동안 출간된 책들은 영어판을 중역한 것이거나,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를 거친 삼중 번역판이었다. 1946년 『그리스인 조르바』가 세상의 빛을 본 지 70여 년, 1975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지 40여 년 만에 최초로 중역이 아닌 그리스어-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번역자 개개인의 역량을 떠나, 번역에서 한 언어를 거칠수록 의미의 누락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번역이란 곧 문화를 옮기는 것으로, 해당 언어권과 문화를 모르고서 정확히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번역자 유재원은 그리스학에 정통한 전문가로, 그리스 아테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그리스 협회 회장이다. 오랫동안 카잔자키스의 전 작품을 연구하고, 실제로 카잔자키스와 조르바의 행적을 짚어 작품 속 공간까지 살펴온 번역자는, 평생 동안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숨결과 문화까지 담아 번역했다.
목차
프롤로그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소개
작품의 배경
조르바와 카잔자키스, 니체
옮긴이 후기
저자
니코스 카잔자키스
출판사리뷰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직접 만나지 못한 현대의 고전
작가의 숨소리마저 담은 원전 그대로의 조르바를 만난다!
내가 새삼 이 작품을 새로이 번역하려는 것은 평생 그리스학을 전공한 언어학자로서 이 명작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다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_유재원(한국-그리스 협회 회장)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본은 영어 중역인 데다, 심지어 번역 저본인 영어판조차 불어 중역판이었다. 영어권에서도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번역하여 출간한 것은 2014년에 와서다. 그 전까지 한국인들은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삼중의 번역으로 ‘조르바’를 만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알아왔던 번역본을 그리스어 원본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에 놀랄 것이다. 누락과 오역을 넘어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2014년 새로이 번역된 영어판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들이 출간되었으나, 이 역시 여전히 그리스어-영어-한국어 중역이다. 이전 판본과 비교하여 2014년 영어판이 훨씬 원전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나, 이를 저본으로 중역할 경우 그리스어 원전과 다른 영어 번역자의 임의적인 문단 나누기와 자의적인 변형 및 외국어 사용 등을 따라갈 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번역자 개개인의 역량을 떠나, 중역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번역자 유재원은 이 명작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었기에 여러 한국어 번역본이 있음에도 새로이 번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카잔자키스의 어휘력은 놀라워서 크레타 방언은 물론 터키의 동북부 흑해 지방의 폰토스 방언까지, 사전에서도 찾기 힘든 단어들이 즐비했다. 번역자 유재원은 그리스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그리스를 연구해온 학자로서 평생의 역량을 담아, 또 원어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번역에서 생기는 손실과 오류를 최소화했다.
또한 모든 카잔자키스의 작품이 그렇듯이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그리스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스 토착문화와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 없이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화적, 사회 정치적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조르바의 철학을, 사고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클레프테스 풍의 민요나, 아만 송 등의 지역 음악, 『베르토둘로스』 등 시대를 나타내는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토속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오류가 나기 쉽다. 또한 그리스 문화에 핵심적인 정교회 성당과 예법에 대한 묘사는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면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번역자가 그리스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오랜 정교회 신자라는 점은 정교회 문화가 지배적인 그리스 문화를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이점이 되어주었다.
그리스 연구자로서의 옮긴이의 신념은 작가 이름 표기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 유재원에 따르면 그리스어에 가까운 작가 이름 표기법은 ‘카잔자키스’이다. 번역자는 ‘카잔차키스’라는 표기가 이미 널리 알려져 고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잔자키스에 관련된 여러 오해를 분명히 밝히고자 신념을 밀고나갔다.
전혀 다른 두 인간의 성장과 우정
“방금 한 그 말, 다시 한 번 해줘요, 대장. 내게 용기를 주니까요.
[……] 이제 우리 둘이서 폭탄에 불을 붙입시다.” _본문에서
작가 자신의 화신인 ‘나’는 35세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육체의 쾌락을 경멸해 음식도 조금씩 몰래 먹듯 하는 책벌레 구도자이다. ‘나’는 갈탄광이 잘되면 모두 형제처럼 함께 일하고, 모든 것을 나누며, 함께 똑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는 공동체를 조직해보겠다는 이상적인 꿈도 꿨다. 이성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먹물이자 세상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보다는 글을 통해 세상을 보는 책벌레 ‘나’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에게서 미처 탯줄을 자르지 못한 듯한, 길들여지지 않은 위대한 영혼 조르바를 만나고 큰 변화를 겪는다. 관념은 던져버리고 직접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원시 사냥꾼 같은 직감과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창의성, 망설이고 고뇌하기보다는 내면의 소리에 따라 주저 없이 행동하고, 죽음과 불행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조르바의 모습에서 나는 영적 스승의 영혼을 느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절대 일방적이지 않다. 조르바는 자신을 믿어주는 ‘나’에게 영적 아버지를 대하듯 솔직하고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한다. 그래서 조르바는 둘의 이별 후에도 계속 ‘나’를 생각하고, 최후의 순간 그의 소중한 산투리를 ‘나’에게 남겨 자신을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동안 조르바의 강렬함 때문에 ‘나’는 ‘조연’과 같이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조르바로 인한 ‘나’의 성장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조르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번역자는 이 책에서 ‘나’와 ‘조르바’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나’의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 조르바의 철학을 내면화하며 변화하는 부분의 번역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조르바를 통한 ‘나’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나’로 인해 조르바가 얻은 마음의 평안과 사랑은 ‘나’가 선물한 것이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다투며 성장해가는 모습은 성향과 연령대가 많이 차이나는 두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브로맨스를 보여준다.
조르바의 자유
“이건 분명히 아쇼.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오?”
“보쇼, 자유인이란 거요.”_본문에서
카잔자키스는 니체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니체 철학에 경도되었다. 그런 그가 학교에 가본 적도 없는, 평생을 육체노동으로 먹고살아온 예순 다섯의 노동자에게서 니체의 ‘빼어난 인간’(Ubermensch, 보통 ‘초인’으로 번역됨)을 본다.
얼핏 보기에 조르바의 삶은 내키는 대로 사는 방종한 모습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조르바의 지향은 분명했다. 관습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낙타처럼 수동적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사자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판단 아래 치열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빼어난 인간’과 같이 산 것이다. 그에게는 ‘니체’나 ‘빼어난 인간’과 같은 사상도, 단어도 필요 없다. 그저 그에게 ‘인간’이란 그런 존재, 곧 ‘자유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방금 고용한 사장에게도 일은 노예처럼 하겠으나, 산투리는 자신이 원할 때만 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런 그에게는 하느님도 악마도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이 모두는 조르바의 험난했던 삶과 그를 통한 고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의 시대는 크레타의 독립 전쟁과 발칸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조르바는 한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웠지만 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애국적인 행동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보고 깊은 회의에 빠진다. 그럴듯한 이념을 내세워 저지르는 온갖 비인간적인 범죄와 추악한 행위를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조르바는 결국 사람들을 옥죄고 편 가르는 이념, 제도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오히려 ‘일곱 층의 하늘도, 일곱 층의 땅도 하느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좁으나 인간의 가슴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절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이웃 터키인의 말을 더 가슴에 새긴다. 자유와 일탈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조르바의 삶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고뇌와 간절함이 담긴 실존적인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