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망한 사회, 잃어버린 이상, 어정쩡한 세대……
가식 없이 가차 없이 세계를 파고드는 루머
(문학적) 세대론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나는 당분간 망설이지 않는 작품(사람)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빠른 전향도, 과거에의 고착도, 신이 죽었으니 이제 아무거나 할 수 있다고 착각한 망나니 실존주의자처럼 반쯤 고의적인 망각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다. 특히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을 판관이라고 여기는 확신에 찬 ‘선의 담지자’들이다.
(정한아 산문, 「Sent by Post」,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가을호, p. 43)
1975년생, 94학번, 철학과 문학을 10년 넘게 공부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 2006년 『현대시』로 등단하고 두번째 시집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 2018)를 발간한 시인 정한아의 간단한 이력이다. 한때 ‘신세대’ ‘X세대’로 불렸고 지금은 ‘포스트386’이라 지칭되며, 문학적으로는 ‘포스트 미래파’로 묶이곤 하지만 어떤 것도 딱 들어맞는 명명이라기엔 좀 어긋나고 어정쩡한 세대명이다. 광장 대신 공원이 제공되는 기만적인 평화의 세계에서 그 얄팍함을 냉소하며, 동시에 선명한 색깔과 확실한 전망만을 부르짖는 공허함을 경계하는 망한 세계의 언니. 이 ‘멋짐’이야말로 시인 정한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일 것이다. 가식 없이 솔직하게, 가차 없이 소탈하게 보고 느낀 세계를 직접 치고 들어가는 언술들. 독자들은 이 시집의 호쾌함에 정신없이 빨려들다가도 마지막엔 땅콩사탕을 먹다가 입천장이 홀랑 까져버리듯 어딘가 욱신거리는 마음 한구석을 경험하고야 말 것이다.
목차
수국水菊/생일/겨울 달/봄, 태업/나는 왜 당신을 선택했는가/어제의 광장과 오늘의 공원 사이/프랜차이즈의 예외적 효과에 관하여/축일祝日/표적/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단독) ‘울프 노트’의 잃어버린 페이지/독감유감 2/우리가 우리를/둘의 진화/샬롬/대장장이/대장장이의 아내/샬롬 2/(단독) 추문에 대하여/계명啓明/자기가 병조림이라 믿은 남자/첫사랑/개밥바라기/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영도零度/성찬/사육제/꿀과 달/물거미/후식/허밍/무연고無緣故/노老시인의 이사/이즈음의 신경증/폭염/크루소 씨의 가정생활/입동立冬/만화방창萬化方暢/이팝나무 꽃/유행流行/인수공통전염병 냉가슴 발생 첫날 병조림인간의 기록/창백한 죄인/미모사와 창백한 죄인/어떤 봉인/랄라와 개와 친구와 20년 전의 엽서/간밤, 안개 구간을 지날 때/다음날/돌림노래/PMS/꽃들의 달리기, 또는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니까/흰수염고래와 그의 노래/(단독) 아마도, 울프 씨?/스물하나/고양이의 교양/하느님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해설 부정성의 시학 조재룡
저자
정한아
출판사리뷰
자명한 폐허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부서진 것들을 모으는 손길
쓰는 일을, 읽는 일을
게을리해도 아무도 벌하지 않고
생각을 중단해도 누구 하나 위협하지 않는
더러운 책상 앞
불빛은 떨어지고 밤이면 길에서
조용히 죽어갈 어린 고양이들의
가냘픈 울음소리
[……]
도무지 장난칠 맛이 안 나는 날
밥 먹는 일을 등한히 하여도 누구 하나
엄포를 놓지 않는
임투도 등투도 없는
더러운 책상 앞
손 없는 새들이 깃털로 창공을 어루만질 때
죄 없이 부푸는 잎맥의 감탄과 탄식 사이에서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 「봄, 태업」 부분
여의도광장은 보라매광장은
공원이 된 지 오래
우리에겐 공원이 필요했지
그늘이 사생활이 손톱 밑의 가시와 섬세함과
머큐로크롬, 놀란 가슴과 위안의 손길이
도서관 앞에 회관 앞에
나무들이 무성하고 뿌리는 얕다 평화는
숙성 기간이 필요하답니다 오랜 고요가
심오한 의미를 담는 법이죠 하지만
[……]
차마 말할 수도 노래할 수도 없는
그, 뭐냐, 거시기가
산책하듯 엷은 평온으로 덮이었을 때
그, 뭐냐, 거시기를
실종된 우리들의 理想이라 불러본다면;
- 「어제의 광장과 오늘의 공원 사이」 부분
오로지 책상머리에서 나와의 싸움을 계속하며 “등투도 임투도 없는/더러운 책상 앞”을 노려보는 연구자의 봄날. 광장 대신 공원을 강요받는 고요의 세계에서 한때의 ‘유서’와 ‘시’ ‘노래’를 회상한다. 차마 온전한 글자로는 써보지도 불러보지도 못하는 “이상理想”에 대한 그의 복합 감정을 고려하면 “더러운 책상 앞”의 답답함이 단순한 일상의 반복에서 온 것은 아니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었으나/세상은 언제나 완전했네”(「수국水菊」)라고 씁쓸하게 읊조리듯, ‘폐허’ 위에 자라난 그의 세계관은 다소 강렬하다. 첫 시집에서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에 베이는 나”가 “이 더러운 새벽, 순결한 것은 오직 내일의 폐허 위 간신히 몰래 내리는 피, 피곤한 빗소리”(「타인의 침대」, 『어른스런 입맞춤』, 문학동네, 2011)에 귀 기울였듯, 이번 시집에서도 지옥인 듯 폐허인 듯 온통 망가지고 녹아내리는 세계에서 태어나버린 존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진 것들을 모은다(「꿀과 달」). 망한 세계를 영웅적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끔은 유폐와 소극을 무릅쓰며 남아서 견디고 또 대결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모든 것과 불화하는 외로운 늑대,
루머로 남은 울프 노트에 대한 질문
4년 전에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퇴근을 하고 나오는데 외제 차 한 대가 골프채를 싣고 지나가더군요 그때부터……
그는 훔친 골프채를 하나도 팔지 않았다 카메라는 골프채로 가득 찬 그의 아파트 창문을 비추며 서서히 줌아웃한다 골프채로 이루어진 집 안의 인공 산은 그의
복수의 가시성
억울함의 물리적 변용
그는 새벽이면 골프채 산 아래 좁은 마룻바닥에 몸을 누이고 새우잠을 잤다 그는
나날의 소소한 승리로 점점 좁아지는 (안 그래도 좁은) 아파트에서 자존감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기꺼이 자기의 깡마른 몸을 난해하게 접어가고 있었다 그는
훔친 골프채로 골프를 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아무 데서도
일인 시위를 하지 않았다 청와대 신문고에
호소문을 게시하지 않았다 노동위원회에 부당 노동 행위로 사측을
제소하지 않았다 노조에
가입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자활센터에
등록하지 않았다 사장 집 현관 옆에서
어둠이 오기를 기다려 꿀밤을 때리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중고 외제 골프채를 팔아
중고 외제 차를 사지 않았다 욕을
하지 않았다 메롱을 하지도
않았다 시민단체를
찾지 않았다
불법적 행위에 합법적 대처는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
소리치지도 않았다
왜 안 그러셨습니까?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해내는 거죠?
세상에는 덜 치명적인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은 억울하고
몹시 내성적인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가 울프 씨의 언제 적 모습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 「(단독) 아마도, 울프 씨?」 부분
론 울프lone wolf. 직역하면 외로운 늑대이지만, 단독 범행자 혹은 고립주의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한아 시에서 울프 씨는 세계의 문제를 거창하게 부풀릴 줄 모르고, 또한 불의와 타협할 줄을 몰라서 태생적으로 불화한다. 그의 노트는 루머로서만 존재하며, 종종 거짓과 추문으로 몰리곤 한다. 하지만 부적응과 자기 폐쇄로 사회와 동떨어진 듯 보이는 이 울프 씨야말로 세상의 ‘명쾌’와 ‘간편’의 대척점에 서서 세계를 똑바로 반성하게끔 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정한아는 간파한다. 이 부정성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분투할 울프 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결국 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천박과 악다구니로 가득한 세속의 것들을 질료로 삼아 시를 쓰고 세계를 느끼는 것. 히스테릭할 정도로 반성과 경계를 집요하게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땅에 발붙인 속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시인 정한아. 그가 사랑한 울프 씨의 노트가 이제 열린다.
시인의 말
언니, 배고파?
…… 아니.
졸려?
…… 아니.
그럼 내가 만화책 빌려 올 테니까, 그때까지 자살하지 말고 있어!
띠동갑 동생은 잠옷 바람으로 눈길을 걸어
아직 망하지 않은 만화대여점에 가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빌려 왔다.
우리는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
눈이 아하하하하하 쏟아졌다.
그 후 이십 년, 이 만화는 아직도 연재가 안 끝났다. 그건 그렇고,
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8년 봄
정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