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진지한 농담과 이죽대는 진심 사이
세상의 원리를 관통하는 과학도의 소설 실험실
2011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가 이갑수의 첫 소설집 『편협의 완성』(문학과지성사, 2018)이 출간되었다. 등단작 「편협의 완성」으로 “제목의 ‘편협’과 달리 매우 타자 지향적인 소설”이며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준다는 평을 받았던 이갑수가 7년 동안 세심하게 다듬은 7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중편소설을 한데 묶었다.
과학의 방법, 합리적인 체계를 좋아한다. 소설도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어떤 문장을 넣고, 어떤 원리에 따라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 나는 문학을 공부하는 과학도이고 싶다.
- 「징후들」 인터뷰 중 이갑수의 말(『문학과사회』 2012년 여름호)
위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 이갑수의 관심사는 ‘인간 세계의 작동 원리’에 있다. 마치 수산화나트륨과 염산을 일대일로 섞으면 소금물이 되듯이, A의 상황에서 B의 특성을 가진 인물 C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하여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벌이는 크고 작은 소동들, 괴짜들이 고집하는 낯선 선택들은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과 일그러짐의 민낯을 가차 없이 투영해 보여준다. 이갑수가 문학 텍스트로 만들어가는 인간 세계 실험실이 이제 독자에게 공개된다.
목차
편협의 완성
아프라테르
T.O.P
일사부조리
조선의 집시
서점 로봇의 독후감
품사의 하루
우리의 투쟁
해설 임창정과 USB_김신식
작가의 말
저자
이갑수
출판사리뷰
학습에 매진하는 별종들, 오해로 통달하는 세상의 이치
나는 갖고 싶은 것들도 책으로 대신했다. 강아지를 키우는 대신 동물연감을 읽었고, 태권도를 배우는 대신 무협지를 봤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혼자였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책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책을 찾았다. 『새 학기 친구 만들기』라는 책이었다.
1. 상대방의 눈을 본다.
2.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짓는다.
그러나 결과는 별로 안 좋았다.
- 어제 아버지가 탄 배가 침몰했어. 시신을 찾을 수 없대.
개학 첫날, 내 짝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상대방의 눈을 봤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책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홉스를 읽고 인간관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_「편협의 완성」
누나의 손톱: 2.5
이름표 옷핀: 4.5
형의 주먹: 3.5
핸드폰: 4.3
과학교과서: 2.3
책상 모서리: 5.6
……
이름표 옷핀으로 누나의 손톱을 긁으면 손톱에 금이 간다. 형의 주먹으로 책상 모서리를 내리치면 주먹에서 피가 난다. 우리는 이 세계가 관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과 밤, 왼쪽과 오른쪽, 자연과 문명. 가난이 없다면 부유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맨 윗부분은 아랫부분 없이, 삶은 죽음 없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_「우리의 투쟁」
작품 속 많은 인물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 하는 순수한 궁금증들. 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지만 대부분 일반적으로 사회 공유 맥락에서 벗어나 오해와 패배를 거듭한다. 관계도 주식도 하물며 검도도 책으로 배우지만 모든 것에 실패하기만 하는 사람(「편협의 완성」), 3테라바이트의 AV로 섹스를 탐구했으나 끝내 AV배우로 데뷔하지 못한 채 성불구가 되는 형(「아프라테르」), 킬러가 등장하는 영화?드라마?연극?만화?소설 등을 모두 보았지만 결국 킬러가 되고자 하는 친구를 돕지 못한 형용사(「품사의 하루」), 과학 수업으로 힘의 논리를 간파하는 영악함을 갖고 있지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왜곡된 세계관을 갖게 된 아이들(「우리의 투쟁」)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순진한 오해로의 탐구가 거듭될수록 결국 되비춰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만큼 엉망진창인 인간 사회의 본모습이다. 이갑수의 인물들로 구현되는 이 시니컬한 풍자가 가닿는 결론은 결국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세계의 모순에 있다.
우발적 황당함으로 작동되는 이갑수표 소설 실험실
이 해설을 읽기 전 수록작의 전개가 대체로 황당무계하다고 느꼈다면, 황당무계함은 문학적 현실과 문학 바깥의 현실을 일대일의 비율로 측정?실험해가는 가운데 벌어진 일종의 ‘임계 상태critical state’를 시사하는 픽션적 장치다. [……] 『편협의 완성』은 한 작가가 인간과 사물 사이, 문학 밖 현실과 문학적 현실 사이를 민감하게 측정해가며 실험한 우발과 그 패턴을 증명하는 소설집이다.
- 김신식 해설, 「임창정과 USB」
이갑수 소설의 서사는 예상을 끊임없이 비껴나가며 펼쳐진다. 표제작 「편협의 완성」에서는 코카콜라가 달에 광고판을 설치하고, 「T.O.P」에서는 전생에 무림고수였던 사람이 자판기로 태어나 부업으로 유명 연예인의 경호원을 하며, 「서점 로봇의 독후감」에서는 인간과 똑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 화자로 등장해 반지하 서점을 관리하고 심지어 인간들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취미로 읽는다. 무협과 SF, 누아르 등 다양한 요소가 등장하지만, 이갑수는 이것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바탕의 재료로만 다루며, 독특한 상황이 초래하는 소소하고 별스러운 사건들에 집중한다. 마치 텍스트를 질료로 한 무한한 실험실처럼, 작가는 정교하게 배치한 문장과 사건들로 서사를 견인해가며 세계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들, 들여다보지 않았던 진실들을 간파해버린다.
특유의 위트로 꾸준히 자기 세계를 이뤄갈 신인의 예감
7년 만에 묶은 첫 소설집이라고 하면 다소 긴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 하나 빠지는 작품 없이 고르게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준 소설집으로 이갑수는 첫 책의 순조로움을 증명했다. 이제 자기가 써나가고자 하는 주제를 흔들림 없이, 그러나 유연한 자세로 다채롭게 내보일 신인 한 명이 첫 발을 뗀다. “이제 나는 내가 읽고, 쓴 문장의 총량이 나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재능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것도”라고 「작가의 말」에서 패기 넘치게 밝혔듯, 이갑수의 소설은 축적되는 동시에 넓고 또 깊어질 것이다. 제목과는 반대로 ‘편협’한 글쓰기에서 끊임없이 ‘이탈’할 이갑수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쓸 것이다. 편협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떤 한 가지 방식을 고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쓸 생각이다. 그게 삶의 여러 가지 방식 중에 내가 선택한 편협이다. 평생 계속 쓰면 어떤 경지나 원리, 무엇이든 얻거나 완성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은 없다.
- 「징후들」 인터뷰 중 이갑수의 말
작가의 말
첫 소설을 썼을 때, 사부는 내게 맥주를 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넌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어.
어쩌면 나는 그 말 때문에 소설가가 됐는지도 모른다. 흔들릴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방법으로 썼다.
몇 년 전에 사부의 고향에 내려갔다가 그 말의 진의를 알게 됐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음악이 나오는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적당히 취기가 올랐을 때쯤,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사부가 냉장고를 붙잡고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우리는 냉장고의 재능을 전부 마셨다.
서울에 돌아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사부에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삼백 명도 넘었다. 일종의 술버릇이었다. 사부는 술을 마시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든 같은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내가 읽고, 쓴 문장의 총량이 나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재능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것도.
첫 책이다. 오래 걸렸다.
이제 나는 정말로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