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실,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했어”
전쟁의 야만성을 환상 없이 그려낸 20세기 프랑스의 오디세이아!
우리가 간과한 본질적 가치 훼손에 대한 뼈아픈 고백
2011년 공쿠르상 수상작
2011년 공쿠르상 수상작 알렉시 제니의 장편소설 『프랑스식 전쟁술』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알렉시 제니는 사십대 후반에 이 작품을 출간하기 전까지 리옹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문학적 이력이 없던 신인작가가 1903년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며,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드레 말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스칼 키냐르 등이 수상한 권위 있는 공쿠르상을 거머쥔 것이다. 모두가 놀란 이변이었지만, 치밀하게 잘 짜인 완성도 높은 구조와 글을 다루는 원숙한 기량은 이 작품의 공쿠르상 수상이 행운 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가 현대사에서 수행했던 전쟁의 부당함을 묘사하고, 식민주의 전쟁에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담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40년대부터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 현재의 화자 ‘나’가 바라보는 걸프전과 2005년 리옹 폭동까지 다루고 있어, 1940년대부터 오늘까지의 프랑스를 그려낸 ‘거대한 벽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로 다른 세대, 다른 역사를 체험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차별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하는 프랑스를, 우리 세계를 성찰하게 한다.
명백히 ‘손자병법The Art of War’을 연상시키는 책 제목 ‘프랑스식 전쟁술The French Art of War’은 거대한 환멸과 패배로 귀착한 ‘프랑스식 병법’을 냉소하는 제목이다.
목차
주석1
걸프로 출발하는 발랑스 출신 기병들
소설 1
쥐들의 일생
주석2
좋았던 시절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들을 흘려보냈다
소설2
4월에 관목지대에 오르다
주석3
야간 약국에서 진통제 처방
소설3
알제리 보병 행렬의 시의적절한 도착
주석4
이곳과 그곳
소설4
최초의 경험들, 그로 인한 결과
주석5
눈의 허약한 질서
소설5
핏빛 정원에서의 전쟁
주석 6
오래전부터 그녀를 보았네, 하지만 결코 감히 그녀에게 말할 수 없을 거라네
소설 6
세 개로 분열된, 육각형의, 십이면체의 전쟁 - 자기를 먹는 괴물
주석 7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파세오를 보았네
옮긴이의 말
저자
알렉시 제니
출판사리뷰
“빅토리앵 살라뇽은 내게 그림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보답으로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매사에 무기력하고, 그냥저냥 다니던 회사에서마저 해고당한 뒤 광고지를 돌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는 매일 드나들던 동네 비스트로에서 늘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신문을 보는 괴팍한 노인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예술가들의 장터에서 ‘나’는 그가 파는 그림에 넋을 잃는다. 푼돈에 팔겠다고 내놓은 수많은 수묵화는 전쟁 장면, 전사들의 면모, 각기 다른 시기와 나라의 풍물, 분위기, 삶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 놀라운 그림을 그린 이는 바로 그 모든 전쟁 (1942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과의 전쟁부터 1962년 알제리에서 막을 내린 프랑스 식민전쟁까지 20년간의 전쟁들)에 참전했던 이 노인, 살라뇽이었다.
영광과 치욕이 한데 얽힌 살라뇽의 과거는 곧 프랑스의 현대사로, 그의 이야기는 프랑스가 현대사에서 수행했던 전쟁의 부당함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신랄한 내부 고발이다.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의 야만성에서 구원할 예술의 힘을 믿고 스스로 도움받았던 살라뇽은 화자인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나’는 살라뇽의 추억이 담긴 노트를 토대로 그의 일생을 글로 정리한다.
이 작품은 두 주인공의 시간을 오가며 교차되는데, ‘소설’에서는 전쟁과 모험으로 가득한 살라뇽의 삶이 그려지고, ‘주석’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화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러한 역동적인 구조는 화자와 독자가 거리를 두고 질문을 던져 더 깊은 성찰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
‘빅토리앵 살라뇽’ (소설roman) - 수묵화를 그리는 퇴역 군인
살라뇽은 열일곱 살에 항독 무장단체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이후에는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다. 집을 떠나 긴 전쟁을 겪고 귀향한 그는 오디세우스의 모습과 닮았고 그 여정은 프랑스의 현대사를 담고 있다.
살라뇽이 만난 여러 나라의 병사들, 프랑스의 전쟁 방식, 강철 장비로 무장한 독일의 전쟁 방식, 첨단 기술이 도입된 미국의 전쟁 방식, 어느 날 전쟁터에 던져져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앳된 젊은이들, 그들이 겪은 참담한 부조리, 처절한 생존을 위해 음식만큼이나 필요했던 성찰과 철학적 언어들…… 살라뇽은 20년간 다양한 전쟁을 보면서, 또 병사로 싸우면서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었고 순간순간을 화폭에 실었다. 전쟁 중 손쉽게 지닐 수 있던 도구 먹과 붓으로.
‘나’ (주석commentaires) - 20세기 잉여 인간
회사도 결근하고 여자 친구 집에서 빈둥대며 텔레비전으로 프랑스군의 걸프전 출정식(1991년)을 보는 ‘나’.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회사에서도 해고된 ‘나’는 무작정 리옹으로 가 전단지를 돌리고 술집을 들르는 것으로 소일하며 지낸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살라뇽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살라뇽에게 그림을 배우며 프랑스의 과거와 오늘을 고찰한다. 오늘날 ‘나’는 살라뇽이 들려준 전쟁터의 폭력을 일상에서 접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담긴 폭동은 리옹 변두리의 일상적 모습이 되었다. 진압하는 경찰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게릴라전에 투입된 전사들의 모습이다. ‘나’가 보는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은 살라뇽이 겪은 과거의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모습은 프랑스만의 모습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이
죽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폭력과 인간성 상실
이 책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전쟁에서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묘사하며 전쟁의 본질과 야만성을 환상 없이 그린다. 생명의 가치와 개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쟁의 논리로 돌아가는 전시의 모습, 고독, 공포,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 감춰진 적의 등이 신랄하고 예리하게, 심오한 통찰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성찰과 반성은 본질적인 가치의 훼손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전쟁터의 참상만이 아니다. 전쟁은 당대의 파괴를 넘어, 개인과 사회의 영혼에 남긴 상흔으로 사람들을 옥죄며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전쟁에서 차별과 폭력이라는 부패한 정신에 감염된 사람들은 다른 폭력을 재생산한다. 휴전 상태일 뿐만 아니라, ‘전쟁 트라우마’가 깊숙이 스며들어 사회 여러 부분에서 작동하고 정치적으로도 이용되는 우리의 현실은 작가의 통찰이 현재 진행 중임을 증명하는 좋은 표본이다.
또한 작가는 전쟁과 같은 거대한 야만과 폭력뿐 아니라, 일상에서 평범한 우리가 행하는 폭력에도 경종을 울린다. 가장 조악하고 위험한 폭력으로서 ‘인종주의’를 예로 들며, 집단적 동질성을 강조하고 차이를 격화시키는 것의 기저에는 식민주의를 만든 야만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질서와 안전의 가치를 왜곡된 형태로 내면화한다. 그러나 질서 유지나 사회적 안정성을 강조하며 ‘다른’ 것들을 인정하고 않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나치즘, 파시즘, 폭력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살라뇽이 지키고 싶었던 인간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평화의 실현, 폭력에 대한 거부이다. 작가는 폭력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줄여가는 노력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제시한다. 살라뇽의 삶을 통해 우리는 폭력과 차별은 ‘함께 존재하는’ 기쁨을 망가뜨리며, 외모와 혈통 등, ‘다름’을 본질적인 차이로 만들어 싸우는 일의 부조리함과 무의미를 깨닫는다.
예술과 사랑-전쟁터 같은 삶에서 우리를 구원할 가치들
산전수전 다 겪으며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살라뇽의 마지막 선택은 ‘그림을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었다.
제목 ‘프랑스식 전쟁술L’Art francais de la guerre’의 ‘art’는 전쟁술에서는 책략에 불과하지만, ‘예술art’의 세계는 살라뇽을 구원했다. 전쟁터에서 죽음 곁을 서성이던 살라뇽은 그림을 그리며 견디고 살아남았다. 그는 모두의 영혼이 상처입고 소멸되는 전쟁터에서 그림이 자신을 “숨겨주었”고, 그림이 갈기갈기 찢긴 것들을 “꿰매”주었다고 말한다. 그림(예술)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라뇽을 회복시켜준 구원의 가치이며, 사물의 진실한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였다.
살라뇽이 수묵화를 그리는 것은 도구 휴대의 용이함 때문이겠지만, 수묵화라는 그림의 특성에서도 작가의 함의가 짐작된다. 전쟁이 소유와 욕망, 그로 인한 충돌과 힘의 논리가 야만으로 치달은 결과라면, 수묵화는 그 대척점에서 관조와 여백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살라뇽은 수묵화를 그림으로써 ‘비어 있음이 가득 찬 것보다 더 좋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며 깊은 사유를 통해 평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터라는 상황에서도 살라뇽에게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것은 한 여인이었다. 전쟁터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랑 에우리디케. 살라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계에 내려간 오르페우스처럼, 알제리 전쟁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에우리디케를 구출한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치욕과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그녀 곁에서 충만하고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작가는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우리를 구원할 가치들은 ‘예술’과 ‘사랑’임을 재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