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무정형의 세계로 진입하는 몸-물랑
매번 처음처럼 새롭게 열리는 시집으로의 초대
신영배의 네번째 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신영배는 지난 세 권의 시집(『기억이동장치』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물속의 피아노』)을 통해 한국 현대 시사에서 ‘여성적 시 쓰기’ 혹은 ‘여성-몸으로 시 쓰기’가 가질 수 있는 지점들을 꾸준히 그려왔다. 물과 그림자를 경유해 흐르고 유동하는 여성으로서의 타자화된 신체를 포착하며, 환상적이고 기이한 무정형의 시 세계를 선보여온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적극 끌어들인다.
물-몸, 그림자-몸으로 이어지는 여성적 신체, 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시인의 고민을 바탕에 두고 이 책에서 시인은 ‘물랑’이라는 (얼핏 물처럼 느껴지는) 시어를 활용하며 그간 유지해왔던 ‘다른 몸’ ‘다른 존재’를 구현한다. 특히 시집의 각 부 앞에 「물랑」이라는 시를 나눠 배치함으로써 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토록 한다. 이는 물랑의 파편이 시집 곳곳에서 흐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유연하게 흐르고 떠도는 무정형의 세계를 더욱 환하게 열어젖힌다.
늦더라도 오세요
다음 초대도 발끝이 쓰는 문장입니다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 부분
목차
물랑
음악을 만들 때 /혼자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물결을 그리다 /미미 물랑 /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겨우 /아마 /말 풍경 /입과 지느러미 /초대 /초록의 방 /소녀와 달빛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소녀와 꽃의 사정 /달과 나무 아래에서 /검은 수평선 /물방울들의 밤
물랑
걷기 /기울어지며 /붉은 모래언덕 /발끝이 흔들린다 /밤의 물가에서 /딸들은 괜히 웃고 괜히 슬프다 /욕조와 노을 /그녀와 소녀가 걸어갔다 /검은 들판 /밤의 그림 동화 /욕조 식물 /집과 구두 /발목과 꽃 /검은 물방울 /건드리지 마 /달 구두 /꽃병 유영
물랑
물랑의 노래 /그녀의 끝 /알 수 없어서, 그녀를 /두 음 사이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야 /거리 /물결 속에서 /끝없이 눈이 내리는 /끝에서 /나무 아래에서 /조금은 행복하게
물랑
어느 날 쓴다는 것은 /골목의 빛 /떠다니며 /파도 /시집과 발 /유리창 공중 /흐린 날에 결씸 /창가에 시집이 놓여 있다 /소파는 계속 낡아갔다 /선물처럼
물랑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 /물방울무늬 /발과 지느러미 /음악을 만들 때 /해변으로 /내가 밟았던 것은 무엇일까 /아픈 그림자와 달빛의 박자로 /건드린다 /슬프게 끝나는 1/하얀 숲 /소녀와 고무줄놀이 /물랑
해설|여성적인 것의 숨결과 살갗·이 찬
저자
신영배
출판사리뷰
무엇보다 유연하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환상적 공간으로 이어지는 ‘물랑’이란 통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이 시집 전체에 수놓아진 “물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연적일 것이다. 다소 생소하지만 그간 신영배가 꾸준히 사용해왔던 ‘물’의 이미지를 쉽게 상기시키는 단어 “물랑”은 때로는 하나의 시로, 시어로, 각 부의 제목으로 시집 곳곳에 존재한다.
사라지는 당신을 생각해 책 위에 빛이 쏟아질 때 이유를 알아버릴 시와 당신을 생각해 시작처럼 끝처럼 공간은 빛나지 우리가 걸어가는 곳은 사라지는 숲속이야 숲이 왜 사라지는지 묻지 않고 고요할수록 빛나는 부리를 부딪치지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곳은 사라지는 물속이야 물이 왜 사라지는지 묻지 않고 발끝이 다 닳을 때까지 푸른 가슴을 끌어안지 물랑 당신을 그렇게 부르고 싶어 당신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물랑
―「물랑」 부분
물랑은 마치 신체를 지니지 않은 유령처럼 출몰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왜 사라지는지 묻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곳은 사라지는 물속”이고, “고요할수록 빛나는 부리”가 존재한다. 물랑은 신영배가 그간의 시집에서 사용해왔던 ‘물’의 의미들을 포괄함과 동시에, 어디서나 흐르고, 고이고,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뿐 아니라 때로는 증발하며 일상적 공간을 상상적 시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때문에 “물랑”을 하나의 의미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틈과 틈 사이를 흐르다가, 욕조처럼 파인 공간에 고였다 사라지고 나의 몸을 담글 수도 있고 때론 너의 몸까지도 담글 수 있는 흐르고 편재하는 ‘물랑’의 이미지는 정형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끝없이 의미를 확장해가는 열린 존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랑은 새로운 단어 그 자체로 읽는 이의 낯선 감각을 건드리면서 동시에 시공간의 자장을 바꾸고 전에 없던 세계를 창출해낸다는 지점에서 이번 시집으로 빠져드는 통로이자 시작이다.
조금 떠올라도 괜찮아
부유하는 유령 화자들의 흔들리는 세계
“나는 책 속에 갇히고 싶지 않아. 꿈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그래. 우리는 꿈과 함께 있을 거야.”
“난 책을 방해하지. 지우는 장난이 좋아.”
“괜찮아. 나는 계속 시작할 거야.”
―신영배, 「오늘의 소녀」, 『발견』 2017년 봄호
물랑, 시편마다 시구마다 흘렀다가 떨어졌다가 사라지는 곳곳에 역시 흐르듯 등장했다가 반짝 사라지는 ‘소녀’가 있다. “물과 랑이 소녀를 찾아”(「달과 나무 아래에서」)온다. 소녀는 마치 물랑처럼 실체 없이 흐릿하지만 어디에든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고 일관된 시공간의 맥락에서 멀어진 유령과 같은 존재로 시집을 떠돈다.
작은 방 안에
그녀는 중력을 받지 않는 꽃병을 가지고 있다
꽃병은 탁자 위에 떠서 꽃을 흔든다
시집이 흔들린다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창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들어올 때에도
그녀는 중력을 받지 않는 꽃병을 가지고 있다
공중에 사뿐히 떠올라
꽃병은 웃는다
―「꽃병 유영」 부분
이 시집에서 화자들은 “두 발을 물과 바꾸”(「조금은 행복하게」)고, “푸른빛에 두 다리가 녹아”(「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드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서는 것이 확실함, 정형성, 의지 등을 드러낸다면, 반대로 신영배는 땅에 닿은 발을 물로 지우고 세상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던 것들을 “공중”으로 띄운다. 공중에 떠오른다는 것은 곧 흔들린다는 것, 중력과 같이 하나로 당기는 힘이 없다는 것. 이러한 세계에선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도 ‘사내들이 의자를 집어 던져도’, ‘욕설과 고함이 날아들어도’ 그저 떠오를 뿐이다. 사라지고, 흔들리고, 공중을 떠도는 시적 화자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현재의 시공간을 뒤틀고 맥락을 해체하며 세상의 폭력까지 뒤흔드는 상상적 공간을 창출해낸다. 이는 이 시집에서 ‘소녀’로 등장하는 어떤 존재가 수행하는 역할과도 유사할뿐더러 역시 앞서 살펴본 ‘물랑’의 역할과도 비슷하다. 물랑-소녀에서 공중을 떠도는 여성적 신체 등은 전부 틈과 틈 사이 탈경계화를 추구하고 실체가 있지만 없는 유령처럼 떠도는 자리 그 지점을 끊임없이 가리킨다. 시인이 지향하는 여성-몸으로서의 시 쓰기라는 것은 결국 가장 확실한 실체의 존재를 뒤흔들며 모든 것을 전혀 다른 존재로 치환해버리는 것일지도. 닫히지 않고, 끝나지 않고 “문만 무수히 달린” 세계, 끊임없이 다시 열리고 다시 시작하고 계속 변화하는 시집이 여기 놓여 있다. 시 사이를 흐르는 물랑처럼, 시편 사이를 뛰노는 소녀처럼, 중력을 받지 않는 꽃병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 세계가 시작된다.